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 공동체에게 늘 부드러운 자세로 대했습니다. 허나 욕을 먹으려면 잘 해주고도 욕먹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바울일행이 떠나고서 데살로니가 지역에 1) '그들이 뭔가 팔아먹을 심산인거야', 2) '뭔가 잘못된 사상에 빠뜨리려고 하겠지', 3) '우리를 뭔가 염탐하러 온건 아닐까?'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하나 없이, 누군가에게 한없이 잘해준다는 건 의심부터 살만한 일이니까요. 1)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물건을 방문판매하러 다니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로치면 보부상들입니다. 이들은 무언가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말을 부드럽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또한 잘못된 종교에 빠뜨리려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배터리처럼 생각합니다. 인간 배터리를 모아다가, 자신들의 집단을 돌아가게 하려는 야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나를 위하느냐, 남을 위하느냐의 그 한끗 차이에서 이러한 결과가 벌어집니다. 3) 그리고 도시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빈번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바울일행이, 데살로니가 지역을 염탐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국가간의 이익을 얻으려는 모종의 움직임을 벌이고 있다고, 충분히 오해할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일행은 그래서 부드럽게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숨님과 같이) 부드러운 말'은 '파라클레오'라는 단어로 지금까지 성경풀이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보혜사'라 번역되기도 합니다. 즉 성령을 가리키는 별칭같은 단어입니다. 제가 '성령'을 '숨님'이라 부르듯 말입니다. 그들은 숨님을 따르는 삶 속에서 부드러움을 얻은 것이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취한 가면이 아니었습니다.
그 숨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검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검증'이라는 말은 '도키마조'라는 단어를 쓰는데, 예전에 <로마서> 풀이 할 때도 나왔던 단어입니다. 그때는 '시험받아 인정받음'이라 풀었습니다. 검증이든, 시험을 통해 인정받음이든, 어떠한 의미인지 감이 오시죠?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매순간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바울을 떨어뜨리고 망치려는 시험이 아닙니다.(그래서 사탄의 시험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시험과목은 '복음을 믿느냐?'입니다. 바울은 이 시험을 통해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믿느냐'라는 말을 '따라간다'로 풀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설득되다(페이소마이)'에서 온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 설득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에 설득되느냐? 출애굽입니다. 너 어린양을 시작으로 이집트에서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이 설득은 말로만 '네'할 수 없는 설득입니다. 몸이 어린양 피로 그린 문을 지나야지요, 몸이 광야로 나가 그 거친 바람에 부딪쳐야지요, 그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가나안으로 들어가야지요. 그러니 믿음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내 전인격이 구름기둥, 불기둥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매순간 물으시는 것도, '너 복음 따라가냐?' 이 물음이고, 이 물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이 시험에 인정받고, 인정받고, 그러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끝에서 되돌아보면, 무수한 하나님의 인정을 점찍듯 살아온 삶이었길 바랍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 맞춰진 삶입니다. 또한 이러한 삶은 바울의 유일한 정당성입니다. 그는 '너 왜 그렇게 부드럽게 살아?' 라고 묻는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이러한 삶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삶이야!' 라고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으로 살아내지 않고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2]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문단입니다. 다만 본래 쓰인 순서대로 문장구조를 드러내보려 애썼습니다.(하지만 쓰고나니 많아져버렸습니다.)
'뚜렷이 드러내다'라는 말에 대해서만 첨언하겠습니다. '영광'이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본래 '영광'이라는 말은 '의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억측'이라는 뜻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시대 이후, 이것이 '드러남'이 됩니다. 시대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고, 그 달라짐의 폭이 천당과 지옥입니다. 억측이었던 어떤 사실이, 어느날 눈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드러나다'로 풀다가, 류영모 선생께 힌트를 얻어 요새는 '뚜렷하다'라고 풉니다.
즉 '사람의 영광'이라 되어 있는 말은, 사람을 뚜렷이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사람을 눈에 보이게 한다는 말입니다. 국회의원 선거유세를 생각해보면 분명합니다. 사람의 영광입니다. 사람을 뚜렷이 드러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십니다. 그런데 그 눈에 안보이시는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말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아니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어찌 눈에 보이게 드러낸단 말입니까?
[3]
그래서 사절단이 필요합니다. 어디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에서 사절단이 왔으면 우리는 그 사절단을 보고서, '아 저런 나라가 있나보다' 할 것 아닙니까? 이 사절단이 바로 '사도'입니다. '보냄받은 이'라는 뜻이라 그저 뜻 그대로 써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절단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드러냅니다. 무엇으로? 복음 따라가는 삶으로! 숨님으로 숨쉬는 삶으로!
온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사절단이니 그 위엄이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의 보냄받은 자로서 무겁게 할 수도 있었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사절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사람들을, 마치 자기 아이를 품듯이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부드러운 말'도 이 아이를 품듯 하는 어미의 마음으로 그렇게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온통 의심하고 오해했지만 말입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사람들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이 갈망의 정체는 어제 강론했던 빌레몬서(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갈망으로, 보냄받은 이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호흡마저도 주고자 했습니다. 이 '호흡을 준다'는 말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성령을 숨쉬며 살아가는 삶의 가르침입니다. 즉 복음을 말로 선포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에 따라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같이 살면서 잘 전수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또다른 의미로는 '목숨'이라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삶을 주든, 목숨을 주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일행에게, 데살로니가의 예수 공동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