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예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예수의 이름을 전한다고 치안관들에게 붙잡혀서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얻어 맞고 감옥에 갖히지요.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꾹 참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다 맞을 것 맞고, 당할 것 당하고서야 자신이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밝히지요. 당시 로마시민을 함부로 고문하는 관리들은 엄벌에 처해졌으므로, 바울이 로마시민임을 알게 된 관리들은 벌벌 떨게 됩니다. 일종의 '전략적 고난'이라고 할까요? 이로써 바울은 정당성을 얻고 떳떳이 예수 공동체를 빌립보 지역에 세웁니다.
이렇게 빌립보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고나서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지역이, 바로 이 데살로니가 지역입니다. '테살로니카(혹은 '살로니카'라고도 부름)'지역은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큰 항구 도시입니다. 바울은 A.D.50년경에 예수 공동체를 세웠고, 이후 이 데살로니가 공동체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이 편지들이 최초의 신약성경이 될 것이라 짐작했을까요? 바로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편지의 발송인은 바울과 실루아노스와 디모데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실루아노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라'입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공동체에게 '힘입음'과 '평화' 있기를 빌어주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힘입음은 '은혜'를 풀어본 말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바보같은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속에는 '올'이라는게 있습니다. 이 '올'이라는 말을 도덕이라 해도 좋고, 양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하여간 이 '올'이라는, 마음 속에 옳은 것을 찾고자 하는 씨앗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 이 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올이 곧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라기는 커녕 온통 굽었습니다. 이 올이 굽은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악(惡)이라 합니다. 가온(心)속 올이 온통 삐뚤어졌다(亞)는 말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올이 있는데, 올이 똑바로 자랄 수 없는 지경에 모두 빠져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속에 올이 있어, '작심'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3일을 가기 어렵습니다. 올이 똑바로 자라질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올을 잡아서 곧게 펴주어야 합니다. 마치 곱추의 굽은 등을 교정하듯, 내 가온 속에 손을 넣어, 이 굽어버린 올을 똑바로 펴주어야 합니다. 이 올을 펴주는 것을 가리켜 '은혜'라 합니다. 은혜는 '거저주심'라는 뜻인데, 왜 그리 부르느냐? 내 속의 올을 거저 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힘입는다' 라고도 풀 수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내 올을 세우시는 그 분의 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힘입어 사는 것'이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그러니 곧게 일어선 올은 힘이 있습니다. 내 속의 올을 펴주는 이 힘이, 바로 죽은 예수를 다시 일으킨 그 힘입니다. 이 힘은 도덕적인 힘이요, 인격적인 힘이요, 병을 고치는 힘이요,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옳은 바대로 실천하고, 타인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을 입어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는 무엇입니까? 싸움없는 상태가 평화입니다. 이는 위로부터 힘 입어 살면 자연히 따라오는 삶의 결과입니다. 위로부터 힘 입으니, 다른 사람의 힘을 빼앗거나 억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위로부터 힘 입어 사니 나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평화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는 평화입니다. 이 힘입어 삶과 싸움없음이 모든 예수 공동체에 있기를!
[2]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함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쉼이 없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들 외에 누군가들을 생각하고 있고, 그 생각은 하나님께 닿아있습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어도 기도요, 무릎을 펴고 있어도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숨으로 닿아있으니 모든 순간이 기도 입니다. 호흡을 쉬는 법이 없으니(이 말이 재밌지 않습니까? 호흡은 쉬는 것인데, 쉬는 바가 없다니!), 이들의 기도는 쉼 없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 속에서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이들에 대한 기억은 이러합니다. 이들은 '신실함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신실함'이라는 말은 '믿음'을 풀어본 말입니다. '따름'이라 풀어도 좋고, '충성(忠性)'이라 풀어도 좋습니다. 요새는 '믿음'하면, 자신의 내면의 작용이라 생각하지만, 믿음은 따름입니다. 몸과 마음이, 즉 전인격이 따라가야 믿음입니다. 충성입니다. 굽었던(惡) 마음이 그 중심이 숨으로 뚫려 곧아 지는 것(忠)입니다.
'이뤄간다'는 말은 희랍어 '에르곤'을 이렇게 풀어보았습니다. '에르곤'은 '일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뤄감'이나, '에르곤'이나 신기하게도 자음이 똑같지 않습니까? 'ㅇㄹㄱ'. 에르곤. 이 말은 경작한다는 말입니다. 내 노동력을 부어 무언가 생산하고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일'입니다. 'ㅇ'는 빈자리를 채우는 자음이고, 'ㅣ'는 사람이란 뜻이고, 'ㄹ'는 움직임이란 뜻입니다. 즉 사람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믿음의 사역'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이 말은 하나님께 충성되게 살아서 삶에서 그 믿음을 이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니까, 아픕니다. 왜 아프냐하면 사랑 때문에 아픕니다. 거룩한 숨결로 속이 뚤려,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변을 보게되니,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따라가니 사랑 때문에 마음이 저며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아픔들을 견뎌냅니다. 사랑 때문에 아픈 것은, 피할 아픔이 아니라 견뎌야 할 아픔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지만, 아무 때나 아픈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아파야 참 사람이 됩니다. 하늘 아버지는 이러한 사랑으로 자식들을 길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한 자리에서 머물고 견뎌갑니다. 그 자리가 바로 '소망의 자리'입니다. 이 '소망의 한 자리에서 머문다'라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소망의 인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소망의 정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소망'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다루게 될 것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얘기하자면, '소망'은 '미래'입니다. 미래에 반드시 벌어질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 미래 때문에 현실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소망입니다. 신실함으로 속이 뚫려 아픔을 마다않고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소망은 미래로부터 오는 그 힘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예수 공동체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는 말입니다. 이들을 바울일행이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3]
이 세번째 부분은 번역이 제가봐도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원어가 말하는 바를 충실히 담으려고 애썼으니, 의미가 어찌 표현되었는지 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의 예수 공동체 사람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았음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 선택받음이 분명한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말로 예수쟁이 된 것이 아닌 게 이유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말로만 하는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람은 그 속의 '올'이 위로부터 힘입지 않았다는 말이니, 어찌 참으로 선택받은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선택'이 필요한 사람이지, '선택된' 사람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의 예수 공동체 사람들은 그들은 말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선택된 사람들이기에, '힘으로, 거룩한 숨으로, 그리고 전적인 힘입음으로' 되었습니다. 이거 다 한 뜻입니다. 힘이 거룩한 숨이고, 거룩한 숨이 전적인 힘입음입니다. 은혜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올'을 설명하면서 충분히 설명한 줄로 압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이러합니다. 이것으로 삽니다.
혹여나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선택되었다면,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버림 받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선택되었다'라는 말 앞에는 '먼저'라는 말을 붙여야 합니다. 이들은 먼저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 선택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선택된 이들의 삶은, 올이 일으켜진 삶, 즉 올바른 삶, 평화를 이루는 삶입니다. 그래서 선택된 이들의 삶을 통해, 나머지 사람들이 이 선택을 갈망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언약 공동체를 이 땅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약 공동체를 통해 집 나갔던 탕자들이 죄다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된 이들은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등대라 하겠습니다. 이사야의 표현대로라면, '열방의 빛'입니다. 주의 다스림과 그 분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입니다.
바울일행이 데살로니가 공동체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바울일행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 안에서,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는 삶 속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일행 역시 변화를 경혐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일방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상명하달이 아닙니다.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복음을 전달받는 사람들 양쪽을 변화시킵니다. '같은 힘(=숨=은혜)'으로 힘입어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