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은 '복제품', '흉내내다', '따라하다' 이런 말들이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의 '따라하는'이라는 말은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무언가 좋은 것이 있으면, 그 좋은 것을 따라하는 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무언가 좋아보여서 따라하면 저작권을 물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만, 적어도 윤리의 측면, 도덕의 측면, 삶의 측면에 있어서 좋은 것은 똑같이 따라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예수 공동체가 복음을 전한 바울일행과 주님을 '따라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무엇이길래, 시련 속에서도 그 말씀을 받고, 그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련 속 기쁨, 그 한 가운데 말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거룩한 숨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요, 바울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와 바울을 잘 따라했는지, 그들을 '음각도장'이라 부를 정도입니다. 즉 그들을 찍어놓으면 예수가 보입니다. 그들을 따라하면 예수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이 '음각도장'이라는 말을 '본(本)'이라는 말로 풀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깍아내고 파내어, 근본에 닿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 첫소절처럼 말입니다.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음각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도장을 찍어놓으면 예수가 보이도록 말입니다.
또한 도장은 어떤 사람을 대신해서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통장 만들 때 도장을 찍으면, 이 도장이 빨갛게 찍어놓은 그것이 나도 아니면서 '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주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나타내는 음각도장이 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몸에 어린양 피를 발라 삶으로 꼭 찍어놓으면, 그 찍어놓은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도장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 곧 우리는 이 땅의 그리스도들입니다. 예수처럼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장들입니다. 예수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인감도장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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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찍어놓으면 예수와 같은, 그 '음각도장들' 때문에 주의 말씀이 울려퍼집니다. 작은 진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주변을 울리고 울려서, 전체를 진동시킵니다. 잔잔한 물가에 파문이 그려지더니 곧 호수 전체에 큰 원을 그립니다.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의 작은 예수 공동체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전파된 그 속도와 범위를 생각하면, 이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이 데살로니가전서가 쓰인후 200년만 지나도 복음은 지중해를 완전히 덮어버리게 되니까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바울을 알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압니다. 바울일행이 그들에게 다가갔으나, 그들은 먼저 알고서 신나게 이야기해줍니다. 바울일행이 처음에 데살로니가 지역에 어찌 들어갔는지(사도행전 17장을 통해 우리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림자(개역성경에서는 '우상') 섬기는 것에서 살아계시고 말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어찌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 자신이 예수께서 다시 드러나시길 소망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음을 전합니다. 이 내용을 편지로 전달받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정말 기뻤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말은 본래 '그림자'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항상 진짜에 빚져있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그림자가 있듯, 진짜 소망이 있어야 가짜 소망도 있습니다. 생긴 게 비슷하다고 해서 그림자에서 헤매고 있으면, 진짜를 못만납니다. 그럼 어찌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짜를 만날 수 있을까요? 빛입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곳에서 고개를 들어 빛을 바라보고 그 빛을 따라가면, 눈이 부셔서 눈은 뜨지 못할지라도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둠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빛을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참 좋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말은,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사람을 괴롭게 하시고, 사람일에 전혀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한자로는 성(誠)입니다. 즉 하나님은 말(言)을 이루시는(成)데 정성(誠)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늘 아빠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그가 이루셨고, 이루시며, 이루실 이야기를 눈 앞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聖經>은 <誠經>입니다.
그가 이루신 일이 분명히 여기 새겨져 있습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난 그 아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것은 이뤄진 일입니다. 역사적 사실이기에, 누구도 손을 뻗어 일점 일획도 고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뤄질 일은 그 아들의 다시 나타남입니다. 우리에게 말씀대로 사는 삶은 그저 고상함을 위한 윤리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사는 우리가 되는 것이 타락을 뒤집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요, 왕의 명령이며, 그렇게 사는 것을 왕 스스로가 실제로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 왕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다는 말은 '아나메노'라는 말을 씁니다. '아나'는 '위(上)'고, '메노'는 '머물다'입니다. 예수를 머리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는 '한 자리에서 머물다(휘포모네스)'라는 표현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머물러야 할 한 자리, 그림자가 아닌 빛의 한가운데가, 바로 예수를 나의 머리 위에 이고 사는, 나의 삶의 자리입니다. 곧 義입니다. 어린양(羊)을 나(我)의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럼 예수를 죽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나를, 하나님이 아들로 여겨주십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내가 어린양을 닮으려 하는 모습을 오히려 기뻐하시고, 정말 닮아갈 수 있도록 하늘의 숨결을 부어주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장래의 화(禍)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화(和)를 이루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