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저는 학교에서 '사역자 투잡(Two-job)론'을 항상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일단 사역자도 사회 경험이 있어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고,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워서 사역자 자신이 생존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역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 하며,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일했습니다. 그럼 제가 주장했던 '목회자 투잡론'이 맞았던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 하나는 먹고 살수 있는 방편은 마련해야 하니까' 이런 생각으로 일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사회 생활과 동떨어진 삶을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요가 있을 때면, 밤낮으로 일할 준비(오늘날로 치면 '야근'인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어떤 필요 때문에?
어제 대법원에서 쌍용차 정리해고에 대해서 파기환송 판결이 났습니다. 6년에 걸친 투쟁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냥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쌍용차에서 하루 아침에 정리해고된 153명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복직'일까? 복직이 그토록 간절한 것은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가기'라는 더 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토록 힘든 싸움을 6년간 이어온 것일 겁니다. 그러니 설령 쌍용차에서 다시 받아주지 않더라도, 만일 누군가 이들의 재정적 부담을 도와준다면 이들은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 커피 마시면서 편하게 앉아 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입만 살은 저에게는 공상이었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던 사람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해 일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서로를 위한 노동의 시작이 됩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든 패들이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노동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울이 일했던 목적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공동체는 가난할 수 없습니다. '부의 재분배'라는 자본주의가 풀 수 없는 숙제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결됩니다. 이것이 그저 한낱 이상에 불과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제 역사의 기록입니다.
사도행전 4장
신실한 삶이 시작된 무리들은 가온과 호흡으로 하나되어,
자신에게 속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오히려 서로서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보냄 받은 이들은 큰 힘으로 주 예수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거저줌'과 '큼'이 그들 온 무리에게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다가,
그 판 돈을 가져다가 보냄 받은 이들의 발 앞에 놓았고,
보냄 받은 이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어떤 일을 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3
생업이 서로 같으므로,
바울은 그들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을 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톰라이트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그 일에는 재단, 세공, 가죽 바느질 따위의 힘겨운 육체노동이 따른다. 우리는 바울이 빌린 집이나 잠재 고객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독립된 일터에서 일했을 것이라고 추정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음식과 물건 구입은 물론이고 최소한 한 공간에 대한 세를 정기적으로 지불해야 했다.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p.46
요새 가죽으로 뭘 만들어보려고 이것 저것 보던 중에, 반가운 단어들이 보입니다. 재단, 세공, 가죽 바느질. 바울도 가죽을 다루었습니다. 천막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바울도 세입자였습니다. 일할 공간이 필요했으니까요. 평범했던 그의 일하는 모습이지만, 그의 노동의 가치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 그러한 사회를 꾸려나가기 위한 노동과 애씀이 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2]
여기 있는 단어들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거룩함', '의로움', '흠없음'. 이러한 단어들은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 공동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러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죄와 상관없는 삶을 보여주었고, 똑바로 서서 옳음을 추가했으며, 그러니 흠이 없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기가 정말 어렵잖아요.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 이 사람 거참 교만하구만' 하고 느껴지지 않고, '이 사람들이 정말 데살로니가 공동체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대했습니다.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제가 목사님께 사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 목사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저에게 '선생이 되려 하지 말고, 아비가 되고자 하렴' 이렇게 말씀해주셨거든요. 그 분은 정말 저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으로, 제가 일 저지르고, 사고쳐도 다그치신 적 한 번 없이, 언제나 저를 다독여주셨습니다. 2010, 2011년은 저에게 쉽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그 목사님의 아버지 같은 돌봄이 저에게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 같이 사람을 품는 일의 선배입니다. 이 일이 시대를 따라 전달되어 모든 예수 공동체를 든든히 세워왔습니다. 그럼 바울이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1) 일단 자녀를 숨님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2) 자녀와 가까이에서 이야기 나누며, 3) 자녀의 올바른 삶에 대한 증인이 되어줍니다.
[3]
증인이 되어준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개역성경에서는 "경계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이런 뜻이 나온 것일텐데, 일단 증인이 되어준다는 말은 지켜본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잘못하면 얼른 혼내기 위해서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걸맞도록 사는 모습의 증인이 되어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따뜻한 말인지 모릅니다. 훗날, "너 예전에 정말 하나님께 합한 행동들을 했었지" 라고 말할 수 있도록, 대신 '기억'해준다는 말입니다. 증인은 대신 기억해주는 사람입니다. 아이의 올바르게 선택했던 삶의 순간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가, 아이를 올바로 행하게 합니다.
행한다는 말은 희랍어로는 '페리.파테오'라는 말을 쓰는데, '페리'는 '주변'이고, '파테오'는 '밟다'입니다. 그래서 '주위를 밟다'. '걷다' 이런 의미가 됩니다. '삶'을 '걸음'에 빗대어 설명하는게, 마치 아버지가 아이가 걸음마 할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결국 아이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홀로 걸게 될 것입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의 예수 공동체에게 이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한자로 行은 도교에서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흐름(气)을 따라 움직이는게 行입니다. 그래서 行도 气도 모두 '흐름'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한 그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는게, 참된 행함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 꼭 고백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걸맞게 살아야 할 하나님. 그 분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분의 다스림과 뚜렷함에 이르게 하시는
그 하나님
'부르셔서', '이르게' 하시니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가나안은 하나님의 다스림이요(다스림은 개역성경에서 '나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뚜렷하게(영광) 드러나시는 날입니다. 다른 날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이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