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던 것이 빈(空)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은 '헛되다'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 나름입니다. 비인 것이 나쁜 것은 여전히 그대로 비어있을 때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비인 것이 채워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면 비우는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또한 무엇으로 채우느냐도 중요하겠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허영으로 채우면 안채우는 것만 못할테니 말입니다. "고집과 실컷은 캐내고 구부러진 올 곧게" 입니다.
때때로 빈 일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공허해지는 일이 그러한 일입니다. 무언가가 계속 마음에 흘러들어와 차오르고 하면 좋겠는데, 잠깐 차오르는듯 싶더니 이내 다시 비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사람을 만나든,무언가를 하든 , 종종 이럴 때가 있습니다. 흔히들 '공허하다' 말하는 그 느낌 말입니다.(요즘에는 애들 노래에도 나오더라고요) 마음이 헛헛합니다. 이런 기분은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다 할 수도 없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이, 내 취미가, 내 성취가 채워줄 수 없는 그 헛헛함은, 사실은 정말 참된 것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헛되다 헛되다 헛되다'하지만, 그 솔로몬이 느끼는 광활한 헛헛한 맘 마저도 채워버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참으로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플라톤의 <향연>에 보면 사랑을 이러한 '빔'을 통해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물이 흘러넘치는 곳에서, 비인 곳으로 흘러가듯 사랑도 그렇게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해서 비울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채워질 것이 약속되어 있다면 그 빔은 견딜만한 빔입니다. 소망있는 빔입니다. 그래서 결국 채워졌다면 더욱 비울수록 좋습니다.
바울일행을 만나기 전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비어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헛헛했기에 바울을 맞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바울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언가 헛헛한 것이 있고, 그럼에도 그 헛헛함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있으니,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듣고 실제로 정말 그렇게 하니까, 그 헛헛함 채워졌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나서 바울일행이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럼 다시 헛헛함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빔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껏 놀고나서 헤어지고나니 다시 공허한 맘이 드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일행을 통해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채워진 것은, 한 번 채우고나면 또다시 비어버리는 그러한 채움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자신을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물꼬'를 터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무언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도록 했습니다.그래서 자신이 없어도, 끊임없이 그 헛헛함을 채우는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또한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요한복음 4장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모진 일을 당했습니다. '박탈'의 일입니다. 예수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자꾸 바울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습니다. 육체적 자유를 빼앗고, 건강을 빼앗으며, 시간을 빼앗고, 마치 바울이라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사람마냥 이 땅에서 지워버리려고 했습니다. 본문에 '업신여김'이라는 써놓은 말은 희랍어로 '교만함을 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이 자신들은 태양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늘처럼 여깁니다. 그렇게 한껏 교만한 거짓 태양이 사람을 그늘 마냥 여기고 지워버리려 합니다. 그렇게 바울이라는 사람의 인격을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렇듯 태극(太極)을 잃은 양(陽)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음(陰)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박탈의 연속 속에서 바울의 속은 비지 않습니다. 계속 무언가 채워집니다. 그러니 거침없이 무언가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거침없이' 라고 번역한 말은, 전에는 '막힘없이'라 푼적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가 끊임없이 계속 통과해서 나간다는 말입니다. 바울 속에 무언가가 계속 채워지고 통과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니 업신여기고 몸을 구속하는 일로는 그를 헛헛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그의 속을 채웠습니까? 바로 숨입니다. 그 숨으로 계속 숨쉬니,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숨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말합니다. 이 '숨'을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이 숨으로 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둘로 편나누는 여러 싸움 속에서, 서로에게서 빼앗고 얻으려는 그 '둘', 거짓된 음양(陰陽) 속에서, 새로운 힘의 원천을 얻어 살라는 말입니다. 그 힘으로 살면, 세상을 끌어안는 제3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