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도교회 2014.11.12. 수요예배


[1]

아마도 이 때문에, 그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떠나게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를 새로이 맞아들이게 하기 위해 말입니다.

즉 더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노예를 넘어선,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말입니다.

그는 나에게 그러한 사람인데, 

살몸의 주인이기도 했던 당신에게는 오죽 하겠습니까?


[2]

그러니 만일 그대가 나를 공동체의 식구로 여긴다면,

그를 나에게 하듯 영접하십시오.

만일 그가 그대에게 무언가 저질렀거나 빚진 바가 있거든, 

그것을 내게 달아놓으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이는 혹여나 내가 그대에게 

'당신이 나에게 빚이 있다'고 말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아, 형제여! 부디 내가 그대와 주 안에서 연결되기를!

내 애끓는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멎게 해주시오!


0.


  키케로라는 사람의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는 책을 봤습니다. 이 사람은 법정의 일을 맡은 사람인데, 자기가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에 남 앞에서 말하는게 무척이나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간 앞에 서면서 두렵거나 떨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분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그 중함이 덜하지 않을 것인데, 참 제가 뻔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W. 토저가 담대한 것은 좋은데 그게 지나치면 뻔뻔해진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제가 딱 그 짝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기 앞서, 성도분들께 죄송한 말씀을 전합니다. 더욱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겠다고, 하나님과 성도분들 앞에 말씀드립니다.


1.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에 골로새라는 지역에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골로새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골로새입니다. 빌레몬은 이 지역의 유지였는데 아킵보와 압비아라는 사람과 함께 집에서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골로새에는 이 빌레몬이 이끌고 있는 공동체 외에도 다른 공동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온적은 없었고, 대신 에바브라가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다만 바울은 편지를 통해 이 공동체들을 가르치고 격려했습니다. 그 편지가 <골로새서>입니다. 빌레몬은 이 지역의 유지다보니까, 다른 부유한 집들과 마찬가지로 노예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종'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종'이라는 말이 나쁜 말처럼 들리지가 않잖아요. 바울도 자신을 종이라 했고, 예수님도 종이시고, 심지어 카톨릭에서도 교황들이 싸인할 때, '모든 사람의 종'이라고 쓸 정도니까요. 그러니 이 종이라는 말을 노예라 바꾸어보면 좋겠습니다. 그 당시의 노예는 전쟁포로입니다. 고향도 짓밟히고, 가족들과도 다 찢어져서, 남의 집에 홀로와서 굽신거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노예 중의 한 사람이 빌레몬의 집에서 탈출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나간게 아니라, 빌레몬의 돈을 도둑질해서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이 도망친 노예의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오늘날에야 노예제도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 노예는 오늘날 석유같은 것입니다. 당장 석유가 없으면 난방이고, 차량이고 다 쓰지 못할 것 아닙니까? 노예가 배 밑에서 노를 젓고, 노예가 사람들을 가마에 태워서 이동하며, 집안일도 도맡아하고, 심지어 아이들의 교육도 똑똑한 노예들에게 맡깁니다. 노예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시절입니다. 그러니 노예가 절대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회는 법을 단단히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친 노예에 대한 처벌은 사형입니다. 노예가 노예로 살지 않으려고 하면 죽음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뭐 그리 다르진 않습니다. 예전에 <추노>라는 드라마가 있지 않았습니까? 도망친 노예를 잡아다 오는 추노꾼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한 번 노예는 영원히 노예입니다. 그만큼 이 사회가 부과한 신분의 사슬은 풀어낼 수가 없는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탈출했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걸리면 죽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가출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듯 가출한 사람들이 더러 등장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요셉이 있습니다. 야곱도 그렇고요, 아브라함도 그렇군요. 자의든 타의든 집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아담도 에덴을 떠나 가출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가출했거나, 혹은 여러분이 가출했던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어린날에 -물론 지금도 어립니다만- 가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이나 좋지 않아서 정말 집구석에서 못살겠다 생각한 적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왜 인지는 모르겠는데, 집을 나와버렸습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친구네 집에가서 며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참 좋은 친구입니다. 저한테, 나는 너 못재워주니 집에 가라했습니다. 그래서 여섯시간도 안되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금방 들어갔지만, 집을 떠나있던 잠시간 계속 머리 속에,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밥 해주는 사람이 없고, 따뜻하게 잘 곳이 없어서 고생인게 아닙니다. 관계가 깨져서 고생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과도 눈흘기고 싸우고나면,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나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야곱은 제 형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가출한 것이고, 요셉도 제 형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가출한 것이고,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가출한 것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가출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출은 다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집을 나간다는 건, 관계에 문제가 있다 이 말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어 가출한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게 탕자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다시 오네시모를 생각해봅시다. 이 노예가 빌레몬의 집을 떠나 도망친 것이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관계의 문제 때문입니다. 무언가 상처를 받고, 예전에 주인으로 모시던 빌레몬을 어떻게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럼 이 시각 바울은 무엇하고 있었을까요? 바울은 골로새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에베소라는 도시에 있는 공동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갇힌 몸이었지만, 그의 친구들이 계속 그를 찾아왔고, 바울이 감옥에서 만든 편지들을 감옥 밖의 예수 공동체들에게 전달해주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다 그 시절 쓰였던 편지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를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감옥에 같이 갇혀서 만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면회를 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되었든 바울이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였습니다. 아마도 오네시모가 바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의 공동체도 바울의 소식들을 계속 들었을테니까, 만난 적은 없더라도 오네시모는 바울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에베소에서 오네시모와 바울은 만났고, 오네시모는 예수를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그 오네시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아들에 관하여 그대에게 숨님처럼 말합니다.

그는 내가 감옥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얻은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도망친 노예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이상한 사람인게, 감옥에서조차 그를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위해서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라지만, 바울이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비상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은 깨치고, 변하며, 돌봄받을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감옥이 바울을 가둔 것인지, 아니면 감옥이 바울 안에 갇힌 것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바울 혼자 일이 벅찹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이 일을 돕는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옥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꿈에 들떠있습니다.


2.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편지 하나를 들려줍니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한다'는 노랫말 마냥, 편지 한 장 손에 들고 오네시모는 왔던 길을 돌아갑니다. 그 때 오네시모의 손에 들려줬던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제 바울이 빌레몬에게 하는 말을 하나씩 들여다봅시다.


[1]

아마도 이 때문에, 그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떠나게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를 새로이 맞아들이게 하기 위해 말입니다.

즉 더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노예를 넘어선,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말입니다.

그는 나에게 그러한 사람인데, 

살몸의 주인이기도 했던 당신에게는 오죽 하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이 순간' 이라 말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가 가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것을 보니, 이 순간이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어떤 순간입니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새로이 맞아들이는 순간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어 가출한 이를 새로이 맞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새로이 맞아들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 노예를 넘어선, 곧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사랑하는 형제지간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아들이 된다는 말이 어찌 들리십니까? 옛날 어느 나라에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노예들에게 희한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직 멍에를 져본 일이 없는 어린양을 잡아다 죽여서 구워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받아다가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즉 밑이 빠진 네모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피로 그린 문을 한밤중에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문을 지나면, 다시는 이 집으로 못돌아옵니다. 이렇게 가출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로 그린 문을 지나 집나간 이들을 하나님이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바로 히브리 노예들입니다. 이 노예들이 그 피로 그린 문을 지나 노예에서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린양은 다름아닌 이것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노예가 아들되는 그 시작에 어린양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같은 경우를 오네시모와 바울의 관계에서도 봅니다. 도망친 노예였던 사람이 바울과 함께 이 피로 그린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바울의 앞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피로 그린 선명한 문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을 그리기 위해 내 주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너와 내가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나사렛 예수는 어린양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피를 힘입어 누구라도 함께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그 일에 바울이 어찌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냥 오네시모를 잘봐달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빌레몬을 위해서입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함께 그 피로 그린 문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3]

아, 형제여! 부디 내가 그대와 주 안에서 연결되기를!

내 애끓는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멎게 해주시오!


  애가 끓는다 말합니다. 개역성경에 보면,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라고 완곡하게 쓰여있지만, 저 평안의 원래 단어는 내장입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애 끓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여기서 애는 창자를 뜻하는 옛말입니다. 여기 관계에 문제가 생긴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집주인이고, 한 사람은 노예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甲과 乙입니다. 빌레몬은 갑이고, 오네시모는 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봅니다. 갑이든, 을이든 상관없이 함께 피 문을 지나 그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니다. 이것이 죄의 노예였던 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노예제도입니다. 세상이 이것으로 굴러갑니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가 가족이 된다고 하면 손가락질 할 사람들이 수두룩 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돈을 훔쳐다가 집나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네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빌레몬이 무디게 생각하면, 동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오네시모를 죽여도, 당시 사회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슬람에서 아비가 자기 딸아이를 무참하게 살해해도 여성인권이 추락한 그 사회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노예제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 내어놓아 그리신 그 새차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순간!


3. 


  과거도 미래도 모두 '이 순간'을 지나갑니다. '이제'를 지나갑니다. '지금'을 지나갑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서로 뒤틀렸던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현시대입니다. 이 현시대는 악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입니다. 오는 시대는 옛적부터 계신이에게 대권을 승계받은 인자가 다스리시는 시대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자가 다스리시는 그 오는 시대가 미래의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생각을 산산조각 내셨습니다. 오는 시대는 지금이야! 이 오는 시대가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에서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영생!


  영생을 사느냐 못사느냐는 내가 노예냐 아들이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악을 이기냐, 못이기냐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지금 이 순간 달려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과거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 영생을 삽니다. 이 순간 악을 극복합니다. 이 순간 죄악의 사슬을 끊어냅니다. 성령을 따라 옳은 생각으로 하나님께 닿고, 예수를 따라 바른 행실로 그렇게 영생의 점을 찍습니다. 그렇게 찍고, 찍고, 또 찍어서 내 삶을 영생으로 채워나갑니다. 곧 악을 이긴 지금들로 삶을 연결해나가는 것입니다. 


[2]

그러니 만일 그대가 나를 공동체의 식구로 여긴다면,

그를 나에게 하듯 영접하십시오.

만일 그가 그대에게 무언가 저질렀거나 빚진 바가 있거든, 

그것을 내게 달아놓으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이는 혹여나 내가 그대에게 

'당신이 나에게 빚이 있다'고 말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와 관계가 어긋난 사람과, 이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자본주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주의'라는 말은 그걸 사회의 중심으로 놓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하면 자본이 사회의 중심이요, 공산주의하면 함께 생산하는 것이 사회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인은 자본주의의 사회 속에 살고있더라도, 자본주의를 고백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주의입니다. 자본이 물론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자본은 중심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일 뿐 사회의 중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주의, 예수주의를 외치며, 돈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사람이 이 시대 속에서의 예수 믿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 돈 때문에 나와 관계가 어긋난 사람과 새로운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이 곧 재물 때문에 예수를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이 지금 죄수인데 얼마나 돈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가 진 빚을 자신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돈 쓰는 일에는 애가 끓지 않습니다. 그는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족되는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돈은 바로 이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관계 없이 돈 있다면, 그 돈은 쓸모 잃은 돈입니다. 쓸모 잃은 돈이 통장에 잔뜩 쌓여있는 것을 안전하다 말한다면, 그 안전은 거짓말입니다. 서로 관계가 깨진 사람들은 양쪽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출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영생의 새 차원을 경험하는 일만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바울은 스스로 오네시모의 짐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당신에게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 내가 갚을테니, 부디, 제발, 예수께서 열어재끼신 그 새로운 관계로 그와 함께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노예주의'로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당신이 '예수주의'라면, 당신 눈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이 곧 당신의 형제임을 모를리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회의 악을 바로 내 관계에서부터, 내 지금에서부터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무도 주인되지 않고, 하나님만 주인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면, 너도 나도 형제니 평등은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통해서 영국에서 흑인 노예 매매가 폐지되기에 1800년전 일입니다.


  빌레몬이 어찌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네시모를 내쳤는지, 아니면 받아들였는지. 그런데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같은 선택이 놓였기 때문에, 내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 선택을 내가 지금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관계가 틀어진 사람이 주변에 있으십니까? 그는 우리의 오네시모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 피로 그린 그 문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이 일을 위해서 필요한게 있다면 아끼지 맙시다. 그가 나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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