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바울일행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받았다는 점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바울일행의 감사 기도였습니다. 바로 앞 본문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손으로 가죽을 다루며 텐트 만드는 일에 밤낮으로 매진했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아빠와 같이 다독이고 따뜻하게 돌봤습니다. 인간적인 연민과 정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말이,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말했을 때, 그것을 타인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만한 일이면서도, 위험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마다하기엔, 이 일은 참으로 위대하여 꼭 이뤄졌으면 하는 일입니다. 마치 행성들이 일직선 상에 놓이며 십자형태를 만드는 '그랜드 크로스'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나의 행동-나의 말-타인의 받아들임-타인의 말-타인의 행동-하나님
이러한 직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그런데 그 속에 너와 내가 있는. 그 속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바울은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믿는 여러분들 속에서 힘을 발휘하시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믿는'은 '따르는' 입니다. 따를 때는 머리만 따를 수도 없고, 몸만 따를 수도 없습니다. 나의 말(머리)과 행동이 같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따를 수(=믿을 수) 있음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힘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전에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이를 우리가 전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품게 하며,
모든 사람을 지혜로 가르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고자 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나는 힘을 다해 일합니다.
내 속에서 힘내시는 그의 힘을 따라
그 힘으로 힘껏 싸우며 말입니다.
[2]
그런데 이 일은 쉽게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세상에 둘도 없을 좋은 일들만 가득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분명 고난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이 겪은 바와 같은 '그것'이란, 이스라엘에서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겪은 바로 그 고난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그들'에게 욕하고, 돌 던지며, 끝내는 가장 잔인한 죽음으로 되갚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사람들도 겪고 있습니다. 그것도 유대 사람들이 아닌 그들의 동족으로부터! 인류는 공통으로 복음을 박해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복음이 박해받는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두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예수가 죽음을 이겼다.
너희도 죽음을 이긴다.
사람들은 이 말을 억측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무관심으로, 또는 비웃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지배집단'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짜먹는 지배집단들의 무기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배집단이 하고잡은 얘기는 '죽고 싶지 않으면 위의 말에 따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일에 율법을 사용했고,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시켰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물질을 절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항상 성경과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지금 북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제가 서 있는 이 땅에서는, 지배계층들이 기독교와 성경을 박해하지 않으면서도 더 큰 효과를 누리는듯 합니다. 이 곳에서 복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경제 살린다'는 말에 모두가 깨갱합니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지 않으니, 생존이 가장 큰 삶의 이유가 됩니다. 내가 잘 사는 것이 전부가 됩니다. 마치 '누가누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 경쟁하듯, 티비에서는 '나는 이렇게 잘 먹어', '나는 이렇게 잘 살어', '나는 이걸 가졌어'. '나는 삶을 누리고 있어'만 노상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의 대척점에는 '나는 이렇게 못 먹어', 나는 이렇게 못 살어', 나는 이것 못 가졌어', '나는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라 말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쪽에 속했던간에, 죽음을 이기는 삶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서로의 잘됨을 위해 경쟁하고 투쟁해야 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됩니다.
홉스의 말대로 이러한 때에는 '새로운 사회 계약'이 필요하지요.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진리 위에서 새로이 약속하고, 새로이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 공동체입니다. 죽음과 생존으로 사람들의 코에 코뚜레를 끼워넣은 사회 속에서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또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은 바벨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토대로 쌓아올린 그 지배체제를 균열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당연히 박해를 받습니다. 지배계층의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들로부터 선동된 사람들도 이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너 모두를 망하게 할 작정이냐?"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를 망하게 하자는게 아니라, 모두를 살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 사람들이 이제 이 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와 함께 했던 자들이, 유대에서 겪었던 바로 그 일을 닮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전부'라 말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죽음을 이겼다'는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난은 삶의 어려움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말과 삶이 옳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니 감사기도입니다.
죽음은 오늘날도 우리의 도처에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점령당한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웰빙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려서 사는 동안이나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이 나라의 표어같습니다. 경제 살린다는 메가폰 소리가 너무 커서 정작 억울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작은 소리는 묻혀버립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현시대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세가 곧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게 서면 바람을 못느낄리 없습니다. 바람이 이리 세찬데 말입니다.
[3]
지배계층이 죽음으로 판을 짜놓았고, 그 속에서 씨알들은 선동되었으며, 세상을 이렇게 뒤틀리게 만든데에는 공중 권세를 잡은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움 속에서 참 빛을 알지 못하고, 그저 가시광선으로 보는 빛이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들 태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적 빛은 태양보다 먼저 있던 빛입니다. 그 빛을 알아야 참 빛을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빛만이, 찬란한 태양이 무색하게, 온 땅을 덮어버린 그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일행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 것 없이 '그들의 보존을 위해서'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보존'이라 풀은 것은 본래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성의 보존입니다. 즉 날마다 덮쳐오는 죽음의 파도 속에 휩쓸리지 않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파도 앞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땅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나를 붙잡아 주시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허공이 내게 힘주시면 끊임없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 힘에 붙들려 있으면 상황은 반전됩니다. '부활'은 죽음에 맞서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던 바로 그 힘으로, 내가 오늘 살아갑니다. 그러니 죽음이 나를 덮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홍해가 순종하여 길을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이 복음을 방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날마다 죽음에 점령당한 삶입니다. 무엇으로 죽음을 극복하겠습니까? 날마다 죽음에 휩쓸리니 그 속의 '올'이 삐뚤어집니다. 삐뚤어짐은 곧 죄요, 날마다 그 삐뚤어짐은 더해갑니다. 그 삐뚤어짐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생존'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도 자기자신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의 영향력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기주의'입니다. 혹은 설령 개인은 이기주의로 살지 않으려고 할지라도,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임인 '집단 이기주의'안에서 만족을 얻을수도 있습니다. 그 집단은 가정, 회사, 국가, 혹은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스스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마침내 노하심이 유대인들에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건은 A.D. 70년, 이스라엘이 지도에서 사라진 그 날에 대한 표현입니다. 자신들의 생존만을 위해서 투쟁을 부르짖던 이스라엘은 1,2차 로마와의 전쟁으로 완전히 멸망해버렸습니다.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만이 살아서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들을 짓밟은 로마는 어찌 되었느냐, 지금은 유적으로만 흔적을 볼 뿐입니다. 살고자 서로 물고 뜯었더니 둘 다 죽어버렸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아니면 제국이든 죽음에 맞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사는 것은 타인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의 생존 > 타인의 생명'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부등호를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생존 < 타인의 생명'입니다. 이것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을 생각하면 생각을 뒤집고(회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한 분은 힘입으면(은혜입니다) 우리는 달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역사가, 그리고 우리의 말이 이것을 분명하게 전합니다. 이제 행동만이 남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랜드 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