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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내용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내용은 우리가 맨 처음 살펴봤던 1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6~21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그리고 주, 예언의 숨결들의 하나님이 그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의 종들에게 금세 되어야만 하는 것들을 보이시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그이가 금세 옵니다. 바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이가 복됩니다."


  "신실하고 참되다"는 줄곧 나왔던 이사야 65장의 인유입니다. 계시록 후반부에 들어와서 새창조가 얼마나 강조되는지 알 수 있을만큼, 우리는 이 본문을 여러 차례 다루었습니다.


이사야 65:16,17

땅에서 복을 비는 사람은 아멘(참)의 하나님을 두고 빌며, 땅에서 맹세하는 사람도 진리이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지난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참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내용은 바로 '새 창조'였고, 이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맹세를 금하신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 창조는 하나님께서 맹세로서 보증하신 확실한 것이기에,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의 맹세가 이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한 맹세를 흐려놓아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참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맹세한 새 창조에 대해서 신실하십니다. 참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신(信)은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지시합니다.


  그레고리 빌은 복수로 표현된 "예언의 숨결들"을 성령이 아닌 예언자들의 영이라 읽습니다. 그러나 리차드 보컴은 이 "예언의 숨결들"을 스가랴 4장의 인유라 주장합니다. 스가랴에서는 하나님의 성전 재건이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숨결로만 된다고 했는데, 이 숨결이 바로 예언하게 하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생각(천사)으로' 임하고, 그 종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게 됩니다. 마치 요한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참되다면, 이 참된 말은 에클레시아의 성실한 지킴(信)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자신을 '참과 신'이라 소개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방식의 이룸입니다.


  계시록 마지막 장은 1장과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금세 되어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표현은 이미 1장에서 등장하는데, 우리는 이를 '다니엘서의 역전'으로 보았습니다. 다시금 확인하면,


다니엘 2:28,45

비밀을 알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꿈, 곧 임금님께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 머리 속에 나타난 환상은 이러합니다.

...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들어 와서 쇠와 놋쇠와 진흙과 은과 금을 으깨는 것을 임금님이 보신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꿈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 해몽도 틀림없습니다."


  즉 다니엘에게는 "앞으로(개역성경에는 '후일에') 일어날 일"이 요한에게는 "금세 일어나야 하는 일"이 됩니다. 시간 개념은 '앞으로'가 아니라 '금세'가 되고, 동사는 미래형이 아니라 당위가 됩니다. 즉 다니엘에게 감추어지고 고대되던 것이, 요한에게는 당면한 현실이 된 것입니다.


  또한 희랍어로 '마카로이(μακαροι)'로 쓰는 복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여기서의 복은 단연 아브라함 내러티브를 떠올립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의 수헤자가 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시대로부터 오는시대로 인도하셨고, 홀로가 아니라 함께 에클레시아를 이루었으며, 온 세상에 복과 저주의 기준(성령)으로 뚜렷이 드러난 삶(πνευματικος)을 사는 이들이 곧 '복된 이들'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2:7은 계시록 1장에 등장했던 구절과 유사합니다.


요한계시록 1:3

위로부터 깨닫는 자와 이 예언의 로고스를 귀기울여 듣는 이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7

그리고 보십시오, 그이가 금세 옵니다. 바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이가 복됩니다."


  계시록 끝장에 와서 복되다고 말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바뀝니다. "위로부터 깨닫는 자와 이 예언의 로고스를 귀기울여 듣는 이들"이란 표현이 빠지고,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이"로 통합됩니다. 결국 1:3이 말했던 "위로부터 깨닫는" 것과 "로고스를 귀 기울여 듣는"것이 모두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계시록을 건내받은 에클레시아는 이 내용들을 모두 귀 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뿐입니다. 지킴.




  그리고 나 요한이 이것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들었고 봤을 때, 이것들을 내게 보여준 그 천사의 두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그런 모습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고 예언하는 당신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당신의 동료 노예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세요."

 

  그리고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실로 봉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이는 여전히 불의를 행할 것입니다. 부정한 이는 여전히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이는 여전히 의를 행하고, 거룩한 이는 여전히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증인임을 분명히 합니다. 계시록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그대로입니다.


요한계시록 1:2

(그이는) 그이의 천사들을 통해 그의 종 요한에게 상징을 보내어 알게 하셨고, 요한은 하나님의 로고스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증언을 그가 아는 바대로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천사에게 경배합니다. '메신저'와 '메시지'를 혼동하는 실수를 19장에 이어서 반복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신의 부인을 누이로 속이는 잘못을 반복하듯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증인의 권위를 강조해야했다면 이런 진술은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굳이 요한은, 계시를 보고 들은 자신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대단하게 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애초에 닫아놓습니다.


  천사가 오히려 요한을 나무랍니다. 천사를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제시되는데, 이는 19장과 같습니다. 천사와 요한은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과 함께 하는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공동체에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인 천사는, 에클레시아와 함께 일합니다. 이 둘이 협력하는 일이 바로 '예언'입니다.


베드로전서 1:12

언자들은 자기들이 섬긴 그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성령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에클레시아의 같은 일을 하는 동료입니다. 천사는 오히려 에클레시아와 협력 관계입니다. 천사는 에클레시아가 예언하려는 내용을 전달해주고, 풍성하게 해줍니다. 지금껏 다양한 그림 언어로 요한계시록 내용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천사는 좋은 배우이자, 좋은 나래이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 안에는 천사숭배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이유는 바로 천사가 토라를 전달해주었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9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53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천사를 통해 토라를 건내받았지만(마치 요한계시록 저술과 같은 방식으로), 그 내용을 지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토라를 지키지 않고 천사를 숭배했던 것은, 앞에서 요한계시록 안에 쓰인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내용의 반례가 됩니다. 요한은 이를 경계하고, 천사의 위치를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를 통해 요한계시록 내용을 알게 된 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그 계시의 전달 방식보다 에클레시아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그 전달받은 내용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와 천사가 힘쓰는 일인 '예언'은 사람을 두 부류로 극명하게 나눕니다. 불의는 더욱 불의로 드러나고, 의와 거룩은 더욱 의와 거룩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즉 진실을 폭로합니다. 이는 다니엘서의 인유입니다.


다니엘 12:10

많은 사람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악해질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것이다.


  이 말은, 마치 선인과 악인이 정해져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론적 시각으로 그릇 이해된 예정론을 뜻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고방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비뚤어짐은 자가당착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비뚤어진 본인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뒤늦게서야 "아차"싶고("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반성하게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경우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비뚤어짐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오늘날 우리는 뉴스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고방식이든지 그 나름의 '타당성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안에서부터 시작될 수 없고 밖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외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가진 사고방식의 문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메시아 예수의 죽음'의 사건은 죄 없는 사람의 부당한 죽음이었고, 이 죽음을 통해서 인류는 그 동안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현실 체제가 극도로 타락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메시아 예수의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때의 일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점점 그 사고방식이 굳어갈 것이고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닫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 이야기'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이해를 이스라엘 이야기에 나오는 상징들을 이용해서 비유로 풀어내셨고, 그 비유의 끝은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라는 말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즉 이 새로운 해석에 대해서 생각하고, 현실을 새롭게 읽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의 문제는 파라오가 가진 '완악함'의 심상과도 연관됩니다. 즉 모든 인류는 파라오와 같은 완악함, 즉 폐쇄적 사고방식에 빠졌고, 그 폐쇄적 사고방식에 필요한 것은, 인류를 넘어선 인류이신 예수의 로고스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늘과 땅으로 표현되는, 창조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시각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더욱 다이몬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더욱 더 의로워지고 거룩해지는 사람"을 상상해봅시다.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십자가와 부활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정당성이 아니라 신의 정당성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그 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가 신의 정당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그 스스로가 거룩하게 산다는 말이고, 그 거룩은 현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오는시대의 삶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거룩은 "구별되다"의 의미인데, 이것은 분리주의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리주의로 가득한 이 땅에서 더욱 포용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에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이들로부터 자연스레 구별됩니다. 이것은 존 카푸토가 말한 "무차별적 관용"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가름이 제 가온에서부터 시작되는 관용입니다. 따라서 그 기준은 겸손하면서도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보십시오, 내가 금세 옵니다, 그리고 나와 더불어 나의 상(삯)도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자신에게 속한 일만큼 (말입니다). 나는 ㄱ이고 ㅎ입니다, 첫이고 끝입니다, 아르케이고 텔로스입니다. 자신들의 옷을 빠는 이들이 복됩니다, 그들의 엑수시아가 생명나무에와 그 도시로 들어가는 문들에 있기 위하여. 개들과 속이는 이들(마술사들)과 음행으로 몸을 망치는 이들과 살인하는 이들과 그림자를 숭배하는 이들과 모든 것을 행하며 거짓말과 우호관계를 맺는 이들 없이 (말입니다).


  그간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면서 '에클레시아'에 대한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즉 이기주의와 전체주의의 양극단을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삶의 양식으로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마지막 장에 와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 귀속되어 있는가'보다 '개인이 무슨 일을 했는가'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이 "각자에게", "자신에게 속한 일만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상은 2,3장에서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될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에페소스

생명 나무의 열매

 즈뮈르나

삶의 면류관

 페르가뭄

 감추었던 만나, 이름 쓰인 빛나는 돌

뛰아테리아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 새별별

 사르데이스

 빛나는 옷,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됨

 필라델피아

 성전의 기둥 됨

 라오디키아

 하나님과 함께 왕좌에 앉음


  오른 쪽에 쓰여있는 '상'은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게 합니다. 신혼집에서 남편과 하내가 하나되어 그 신혼집을 함께 꾸려나가는 그림입니다.


-생명 나무 열매는 새 예루살렘의 성문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성문을 지나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불 성벽이 지키고 있는 성벽을 지나서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신 에덴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즉 신혼집에 입성해서(신부가 아닌 이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남편과 먹거리를 공유하는 아내가 된다는 말입니다.


-면류관은 그 면류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그러한 삶을 살만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라틴어로 domina는 집의 안주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안주인은 그 집안 살림에 대한 권한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을 하면, 안주인이 된 신부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는데, 아마도 에클레시아에게 씌워주시는 삶의 면류관은, 화관이 아날까 생각합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곧 메시아 예수이시고, 이름 쓰인 빛나는 돌은 제사장 흉패에 달린 언약백성의 이름입니다. 이 집에 들어가는 신부는, 과부처럼 홀대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그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양식을 먹으며 이 힘겨운 길을 날마다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양식이 어디로부터 온 무엇인지를 마침내 알게 됩니다. 또한 그 만나를 공급해주신 이가 대제사장이시며, 그이의 옷에 붙은 보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빛나는 옷이 주어집니다. 이 옷은 신부에게 걸맞는 옷, "영광의 부활"의 옷이고, 이 신혼집에 거할 사람이 분명하다고, 삶의 책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 신혼집을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요소입니다. 기둥에 비할만 합니다. 


-그리고 새로이 재결합한 이 부부가 새로이 창조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일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상'입니다. 그런데 이 상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 개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가 중요합니다. 은혜와 공로의 이분법으로는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당신이 낀 시대를 어떻게 살아갔는지"가 중요합니다. 은혜와 공로가 뒤섞여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과부로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사랑했는지가 관건입니다. 그 사랑 하나만이 당신이 신부인지 음녀인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옷을 빤다"는 표현은 '1) 이전 상태 - 2) 과정 - 3) 새로운 상태'를 암시합니다. 1) 옷이 더러웠을 것입니다. 신부에 걸맞지 않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이것은 자신의 수치를 가려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을 입어봐야 소용없었듯 말입니다. 2) 옷을 빠는 것은 그 더러움을 씻어내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위해 "낀 시대"가 있고, 메시아 예수의 단독 부활로 개시된 이 시대 안에서 더러운 옷을 빨아 깨끗하게 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몸을 입고 살아가는 삶은 2)의 연속입니다. 오는시대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부지런히 우리 옷을 빨 뿐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이 3)입니다. 우리가 옷을 빨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옷을 빨다가 포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개"라고 부릅니다. 즉 배교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2:22

다음과 같은 속담이 그들에게 사실로 들어맞았습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또한 신부에 걸맞지 않은 삶을 고집하는 이들이 "속이는 이들(마술사들)과 음행으로 몸을 망치는 이들과 살인하는 이들과 그림자를 숭배하는 이들과 모든 것을 행하며 거짓말과 우호관계를 맺는 이들"로 표현됩니다. 이들은 신혼집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보냈고 일곱 에클레시아에 관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증거했습니다. 바로 내가 다윗의 뿌리요 후손, 새벽 빛남 별입니다."


  계시록은 갑자기 화자를 전환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핵심은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 증거하셨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관한 것들을'은 희랍어로 '에피(επι)'라는 전치사인데, 이것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관하여'도 되고, '에게'도 되고, '대항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가 역사의 처음과 끝인 이로부터 올바른 삶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전달받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처음과 끝인 이에 대한 표현은 "다윗의 뿌리, 후손, 새벽 빛남 별"입니다.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민수기 24: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당장 나타날 모습은 아니다. 나는 그 모습을 환히 본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다. 한 통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가 모압의 이마를 칠 것이다.


  '야곱에서 나오는 한 별'은 곧 메시아이십니다. 즉 토라에서부터 메시아를 별로 지칭하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또한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던 인유가 다시금 등장합니다. 이사야의 그루터기 이야기인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무가 열매 맺지 않고 잎만 무성해지자, 하나님은 이방 제국들을 들어 가지들을 잘라버리시고, 그 나무의 밑둥만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밑둥으로부터 줄기가 올라왔고, 한 싹이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새의 줄기"라는 말 역시, 위의 "야곱의 별"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사야 11:10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이사야 11장에서 "이새의 줄기"로 표현되었던 이는, "이새의 뿌리"로도 표현됩니다. 즉 "이새의 줄기"라는 표현은 이새를 후손임을 보여주지만, "이새의 뿌리"라는 표현은 그이가 이새보다 먼저 계셨음을 또한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생긴 논쟁이 마가복음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풀이는 여기)

베드로후서 1:19

또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예언'과 관련해서 별이 등장하는 또다른 경우는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예언의 말씀을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주의를 기울여 읽으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행위를 통해, 마음 속에 어둠이 가시고 마침내 새벽별이 떠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새벽별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구체화된 예수, 마침내 숨님으로 가온에 찾아오신 예수일 것입니다.

  물론 이 '새벽별'이라는 말이 모두 '예수'와 일대일 대응한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 새벽별이라는 어휘가 1) 어둠의 종식 과 2) 새로운 밝음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쓰일 때는, 예수와 정말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옛창조의 어둠이 끝장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낮이 마침내 드러납니다. 게다가 계시록은 21장 들어와서, 계속 "밤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1

그리고 그녀의 거리는 깨끗한 금, 새벽녘 동트는 해와 같이 빛나는 유리 같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25

그리고 그녀의 성문들이 낮동안 닫혀 있을 리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밤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25

그리고 밤이 더이상 없을 것이고, 그리고 등불과 햇빛이 더 이상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숨님과 신부가 말씀합니다.    


  "오십시오! 듣고 있는 이가 말할 것입니다,

  오십시오! 지금 목마른 이가 올 것입니다, 즉 지금 원하는 이가 삶의 물을 선물로 취할 것입니다."


  숨님과 신부는 같은 목소리를 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숨님은 신부가 신부일 수 있게 해주는 남편과의 연결고리입니다. 신부가 준비한 기름이 곧 성령입니다. 숨님은 신부의 사고방식과 실천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남편의 향기입니다. 그러니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숨님과 신부의 동일한 갈망은 남편의 오심입니다. 남편이 오실 때, 완고한 사고방식을 고집하던 이가 마침내 들은 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것을 말하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진정한 삶에 목말랐던 이가 남편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남편으로부터 삶의 물을 거저 얻게 될 것입니다. 


  남편을 갈망하던 여자가 삶의 물을 넘치도록 얻는 이야기는 요한복음 7장의 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는 남편이 다섯이지만, 정작 참된 남편은 하나 없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본문을 가져왔는데, 저 "성경에 이름과 같이"가 궁금해졌습니다. 구약성경 어디에 저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에, 예수께서 저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사야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야 48:21

주님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하셨으나, 그들이 전혀 목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그들로 마시게 하셨고, 바위를 쪼개셔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다.


  만일 바위에서 물을 내시는 것을, 바위 같은 완고함을 깨뜨리고 그 사람에게서 새로운 사고방식과 실천을 살게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숨님과 신부는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바로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두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 이것들 위에 보태면, 하나님도 그 사람 위에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보태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 바로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로부터 없이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의 일부를 그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시로부터 없이 하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는 이가 말씀하십니다.


  보태거나 없이 한다는 말은 개역성경에 '가감'이라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은 계시록을 가감없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 뿐이라 주장하는 신천지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감의 의미는 신천지처럼 계시록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 가감이라는 말이 어느 개인의 해석만을 옹호해야 한다는 근거로 쓰일 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감'은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도를 충실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계시록 내용에 없는 말을 보태고, 있는 말을 빼는 것은, 계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시록을 이용해먹을 때 하는 짓입니다. 마치 계시록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불리려는 어떤 이들처럼 말입니다.(그들은 계시록의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계시록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해석들을 합니다)


  따라서 이 '가감'이라는 말에 벌벌 떨며, 누군가의 해석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계시록의 의도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 이 계시록에 관한 다양한 접근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더욱 계시록 바깥의 우리 현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한 다양한 현실들이 계시록을 이해하는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은 의미와 삶을 통해서 얻은 의미가 맞아들어갈 때, 우리는 정말 가감하지 않은 그 의도를 삶으로 구현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겉으로 보았을 때 이질적으로 보이는 경전과 삶이 만나는 접점이, 바로 성령이 흐르는 자리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듯 충실히 계시록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애써야 하는 이유는(즉 가감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이제 에클레시아에게 계시록이, 마치 유대인에게 토라와 같이 하나의 규례와 규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4:1,2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는 규례와 법도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아서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곳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말에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신명기 12:32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이 모든 것을 지키고, 거기에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가감하지 말라는 말은, 이것의 의도를 잘 파악해서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네, 내가 금세 옵니다."

  아멘,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성령과 신부의 말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금세 옵니다"를 꼭 최종적인 재림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한 사람의 완고함에 균열이 생기고, 거기서 생명수가 흘러나올 때,우리는 그 자리에 왕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심주의로 흘러선 곤란하겠습니다만, 한 사람의 파라오가 마음이 부드러워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언의 성취로 봐야 합니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재림'이라는 단어 역시 '최종적인 도래'라기 보다는, 인구 문제나 식량 문제 등으로 신음하던 로마의 식민지가, 자신들이 신으로 떠받들던 로마 황제가 와서 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던 삶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왕의 귀환입니다. 그리고 왕의 귀환은 미래의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에클레시아가 살아가는 날마다의 오늘에서 벌어지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임마누엘은 부도수표나 그냥 해본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올 것입니다"가 아니라, '나중'이 "금세"로, '올 것입니다'가 "옵니다"로 쓰인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의 삶이 날마다 주의 날인 것은, 날마다 주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늘도 오시고, 내일 찾아올 또다른 오늘도 오시옵소서. 이렇게 살면, 나중에 도둑같이 찾아오셔도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올것이 왔으니,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날마다 보이지 않는 예수를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주 예수의 은혜가 모두와 함께 (있기를)!


  이 별다른 의미 없어보이는 짧은 마지막 인삿말이, 계시록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을 단번에 일축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전체의 장르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편지입니다.

  앞에서 인자가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편지를 쓰라고 요한에게 명한 것으로 계시록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보고 들었던 다양한 환상들과 음성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묵시문학으로서 계시록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맨 마지막 문장에 와서, 그 묵시문학으로 기술된 내용들 마저도, 일곱 에클레시아가 돌려보는 긴 편지 속에 포함된 내용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계시록을, 앞 쪽은 편지고, 뒷 쪽은 예언이라 보는 신천지의 해석은 자의적입니다.(이렇게 보려는 것은, 편지보낸 사건과 예언의 사건을 나누어, 자기들의 역사에 끼워 맞추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계시록 전체는 '요한이 예언한 내용을 보내는 편지'이고, 이 예언 편지는 에페소스 지역의 요한 공동체를 지나, 오늘 2016년 수원에 새로이 창조된 에클레시아에게도 회람된 것입니다.


  누군가 새로이 나타나 풀리지 않던 계시인 '계시록의 인을 떼서(?)' 새로이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던 게 아니라, 이미 요한이 다 인을 떼어서, 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돌려보도록 한 편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동네 전도사에 지나지 않던 제가 계시록을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약속의 목자'라서 계시록을 푼 게 아닙니다. 제가 에클레시아 인원이기 때문이고, 이제 바로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처럼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2:10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인(seal)으로 봉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봅시다.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그리고 주, 예언의 숨결들의 하나님이 그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의 종들에게 금세 되어야만 하는 것들을 보이시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그이가 금세 옵니다. 바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이가 복됩니다." 


  그리고 나 요한이 이것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들었고 봤을 때, 이것들을 내게 보여준 그 천사의 두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그런 모습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고 예언하는 당신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당신의 동료 노예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세요."

 

  그리고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실로 봉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이는 여전히 불의를 행할 것입니다. 부정한 이는 여전히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이는 여전히 의를 행하고, 거룩한 이는 여전히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금세 옵니다, 그리고 나와 더불어 나의 상(삯)도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자신에게 속한 일만큼 (말입니다). 나는 ㄱ이고 ㅎ입니다, 첫이고 끝입니다, 아르케이고 텔로스입니다. 자신들의 옷을 빠는 이들이 복됩니다, 그들의 엑수시아가 생명나무에와 그 도시로 들어가는 문들에 있기 위하여. 개들과 속이는 이들(마술사들)과 음행으로 몸을 망치는 이들과 살인하는 이들과 그림자를 숭배하는 이들과 모든 것을 행하며 거짓말과 우호관계를 맺는 이들 없이 (말입니다).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보냈고 일곱 에클레시아에 관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증거했습니다. 바로 내가 다윗의 뿌리요 후손, 새벽 빛남 별입니다."


  그리고 숨님과 신부가 말씀합니다.


  "오십시오! 듣고 있는 이가 말할 것입니다, 오십시오! 지금 목마른 이가 올 것입니다, 즉 지금 원하는 이가 삶의 물을 선물로 취할 것입니다. "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두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 이것들 위에 보태면, 하나님도 그 사람 위에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보태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 바로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로부터 없이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의 일부를 그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시로부터 없이 하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는 이가 말씀하십니다.
 
    "네, 내가 금세 옵니다."

  아멘,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그 주 예수의 은혜가 모두와 함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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