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요한계시록 21:1~8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은 다 이뤄지고, 이제 신약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은 구약을 새롭게 이루신 메시아 예수의 이야기이고, 구약의 약속은 지금도 신약을 통해서 새로이 이뤄지고 있는 중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계시록에 와서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에서 나온 말이고, 지금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취는 남아 있으므로, 구약은 이제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관점은 옳지 않습니다. 이사야서를 확인해봅시다.


이사야 65:16~19


  땅에서 복을 비는 사람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두고 빌며, 땅에서 맹세하는 사람도 아멘의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지난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에서도 시작이고, 성경 이야기 전체의 무대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차원인 하늘과, 사람의 차원인 땅이 창조되었고, 그 하늘과 땅의 관계가 사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하늘과 땅의 결혼 생활은 적대적인 원수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도덕률과 우리의 삶에 발생한 괴리가 곧 하늘과 땅의 균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위와 존재의 대립은 죽음을 낳습니다. 최초 창조된 땅에는 죽음이 창궐하고, 하늘은 소망없는 땅 위에 침묵하며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한 옛 하늘과 옛 땅 사이에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그이 안에서는 당위와 존재가 하나되었고, 죽음에도 정복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존재를 따라, 당위와 존재를 일치시키려는 이들이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메시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하늘과 땅은 그 새로운 존재에게 걸맞지 않은 무대입니다. 죽음으로 치닫는 창조세계에 새로운 피조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그 창조세계 전체 역시 새롭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왜냐하면 첫 하늘과 첫 땅은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첫 하늘과 첫 땅은 가버립니다. 계시록 21장은 창조세계 마저도 새롭게 변혁되는 결말을 보여줍니다. '첫'이 가버리고 이제 '새'가 옵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새 것이 온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새로워진, 이전의 문제들을 모두 극복한 궁극의 새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새롭게 된 하늘과 땅에는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았습니다. 이 바다는 짐승의 모태였고, 그 짐승이 힘을 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노아 시절, 모든 사람을 죽음에 가두어놓은 심판의 도구도 바다였고, 계시록 18장에서는 음녀가 이 바다를 통해 교역한 상품들로 하나님을 패러디하며 자신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바다가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말할 때 '새'는 악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소식이 아닙니다.


이사야 43:14~21


  너희들의 속량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에 군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치고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성문 빗장을 다 부수어 버릴 터이니, 바빌로니아 사람의 아우성이 통곡으로 바뀔 것이다. 나는 주, 너희의 거룩한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다.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내가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쓰러뜨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마치 꺼져 가는 등잔 심지같이 꺼버렸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내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바다의 패망은 출애굽의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다(惡)의 중심부를 말리시고, 그 길로 언약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을 내신 것은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환상 속에서는 바다의 일부가 말라서 특정 사람들이 건너오는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이미 시작하셨고, 이제는 바다 전체를 없애버리실 작정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그 하늘로부터 그 하나님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을 향해 갖춰 입은 신부로서 준비된채.


  더러운 것을 모두 닦아낸 창조세계가 신혼집이라면, 이제 그 신혼집의 안주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알고 있지만, 이 앞에도 '새'라는 말이 붙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12
내가 속히 온다. 네가 가진 것을 붙들고 힘내라, 아무도 네 면류관을 취하지 못하도록. 이기는 이는 내가 내 하나님 성전 안에 있는 기둥으로 삼을 것이고, 그는 여전히 머물러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 위에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 도시, 즉 새로운 예루살렘의 이름을 쓸 것이다, 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고 나의 새로운 이름도.


  요한은 이미 계시록 3:12를 쓸 때부터 이 도시를 염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이 '새 예루살렘'과 '메시아 예수의 새로운 이름'이 동일시 됩니다. 이 이름은 새창조에 참여한, 새로운 피조물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실체에 대한 지시'를 위해 존재합니다. 새 이름을 안다는 것은 새로워질 창조세계 전체를 안다는 말이요, 그것은 또한 그 창조세계와 같은 성격의 새로움이 내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시가 신부로서 표현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의 층들이 겹칩니다. 이스라엘이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표현되었다는 것, 일곱 머리 열 뿔 위에 앉았던 음녀가 자신은 무엇하나 필요 없는 여왕이라 선언한다는 점, 마침내 여자로 하여금 불륜을 저지르게 만들었던 외간남자는 파멸되고, 다시금 남편과 하나될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어 사는 결말을 성경은 '결혼'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결혼을 위해서 하나님은 신부를 '갖추고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사야서의 다음 맥락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52:1...6,7

너 시온아, 깨어라, 깨어라! 힘을 내어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아,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제 다시는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너에게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

"반드시 나의 백성이 나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반드시 나의 백성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과 내가 그들에게 말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신부로서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과 하나님의 씨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늘의 땅의 연합은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와, 땅에 속한 그분의 신부인 에클레시아와의 연합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열렬한 관심으로, 여러분을 두고 몹시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


  '거룩한 성이 남편을 향해 갖추어 준비된다'는 말은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 '옷'과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준비하셨던 것처럼, 요셉이 많은 옷을 입지만 결국 이집트 총리 옷을 입고서 모든 민족에게 식량을 나눠준 것 등.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씨알과, 그들의 처소가 입기 합당한 옷을 손수 지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설령 사람의 눈으로 그러한 준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속에서도 준비는 성실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봅니다. 그래서 새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창조의 옷은, 옛창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옛창조 안에서 완성합니다. 이는 마치 토라와 예수의 관계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예수는 토라로 인해 죽으면서, 토라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토라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마치 빈무덤에 놓였던 세마포가 예수께 걸맞은 옷이 아니었던 것과 같습니다(그러나 그는 세마포를 입고 나타나십니다!). 전혀 다른 재료의 같은 제품. 하나가 달라졌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몸은 몸인데 더 이상 살몸이 아닌, 숨과 혼연일체가 된 인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미래를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 하늘로부터 말하는 큰 소리를.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 장막에) 거하시리라, 그리고 그의 바로 그 씨알들이 있으리라,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 그리고 각각의 눈물을 그들의 두 눈으로부터 닦을 것이고,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애곡과 울음과 고통도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것들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마치 출애굽한 이들과 광야에서 함께 야영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장막을 친히 땅으로 가져와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시록 21장의 내용은, 에스겔 37장의 성취이기도 합니다.(따라서 구약은 이미 끝났고, 신약만이 남았다는 성경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에스겔이 한 말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에스겔 37:21~28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고 있는 그 여러 민족 속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며, 사방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우상과 역겨운 것과 온갖 범죄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범죄한 그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구해 내어 깨끗이 씻어 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그들 모두를 거느리는 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규례를 지키며 살고, 내 율례를 지켜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튼튼히 세우며,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들 한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어지게 하겠다. 내가 살 집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한가운데 있을 그 때에야 비로소 세계 만민이,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 것이다.'


  다만 에스겔의 예언과 한 가지 차이는 있습니다. 에스겔에게는 단수 표현으로 된 것이, 계시록 본문에서는 복수 표현입니다. '씨알들'입니다. 즉 에스겔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면, 계시록을 통해 주신 예언은 그 지평을 확장시킵니다. 그렇다고 에스겔의 예언을 무효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사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씨알들은 하나님을 봅니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신 것은, 제사장 나라가 아닌 나라들도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 닦아 주심은 어느 한 씨알이 아니라 '씨알들'에게 이뤄집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25:8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로써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아브라함 언약이 마침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의 '복'은 참말로 '복'입니다. 애곡, 울음, 고통이 이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옛창조의 현시대 안에서 온전을 향한 갈망이 꺾였을 때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반응들이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것들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신다고 하셨던 것은, 결국 이 슬픔의 처음 것들을 완전히 치워내실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는 결말을 통해 에서를 이유없이 소외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좌 위에 앉은 이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모든 것을 "


  그리고 이러한 새창조의 완성, 새 하늘과 새 땅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지금 시작된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좌에 앉은 이가 말씀하시길, 이 새 창조는 현재형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새 창조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새 창조를 스스로 배격하고 참여하지 않는 것만큼 저주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이가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라, 바로 그 말씀들이 신실하고 참되기 때문이다."


  다시금 이사야 65장의 맥락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65:15~19


  내 주 하나님께서 너희를 죽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님의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실 것이다. 땅에서 복을 비는 사람은 아멘(참)의 하나님을 두고 빌며, 땅에서 맹세하는 사람도 아멘(참)의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지난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65장은 새창조를 예언합니다. 그리고 그 새창조를 이루실 하나님을 '참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참"은 계시록 3:14에서 예수께 주어졌던 칭호이기도 합니다. 새 창조가 참됩니다. 하나님을 걸고 말하는 내용들입니다. 그 분이 참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말씀하신 새 창조가 참이며, 그 새 창조를 참이신 그 분께서 이 땅에 직접 구현하셨고, 우리는 그 직접 구현의 수혜자들로서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되었다. 나는 ㄱ이고 ㅎ이다, 아르케이고 텔로스. 바로 내가 목마른 이, 바로 그 사람에게 그 삶의 샘물로부터 줄 것이다, 선물로. 이기는 이는 그러한 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그런데 두려워하는 자, 신실하지 않은 자, 혐오하는 자, 살인하는 자, 음란한 자, 수쓰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부분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줄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죽음이다."


  "되었다!" 이 말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순종의 주님께서 하셨던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외침이 계시록 21장을 울립니다. 또한 일곱번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도 같은 외침이 울려퍼졌습니다.(계시록 16:17) 따라서 일곱번째 대접이 쏟아졌을 시점과 이 새창조의 시점은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1) 이 일곱번째 대접으로의 이김과 새창조를 보장하고, 2) 이 '낀시대'라는 유예기간을 확보하며, 3) 그 안을 살아는 새 사람을 출애굽시킨 사건이 됩니다.


  'ㄱ이고 ㅎ이다'는 이 시리즈 첫번째 풀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르케'라는 말은 태초, 시작, 세력등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고, '텔로스'도 목적, 끝, 이룸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시작된 것은 끝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옛창조로 시작된 것이 새창조로 마무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이루시는 이는,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들을 만족시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갈망이 이김이 됩니다. 갈망하는 자가 이깁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가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이기는 이가 되라고 에클레시아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추구의 다름 아닙니다. 그 추구가 올바른 사고를 낳고, 올바른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상은 새 이름이 기록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 새 창조, 곧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바라고, 아버지는 아들을 만족시킵니다. '부자유친'입니다. 아들은 효를 다해 자신을 아버지께 드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세상 전체를 상속하십니다. 하나님께로의 입양은 이러한 식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그 입양은 메시아께서 "왕들의 왕"되셨다는 사실을 천명했던 시편 89편과 공명합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듯 우리 역시 아들이 된다는 사실은, "메시아와 공동 상속자"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중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들로 입양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새 창조에 참여하지 못하고, 새 창조의 바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곧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실하지 않은, 혐오하는, 살인하는, 음란한, 수쓰는, 우상숭배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요약하는 단 한 단어는 '거짓'입니다. 모든 것이 참이 아닌 거짓에서부터 옵니다. 참되신 이는 새 창조를 이루고, 거짓을 추구하는 이는 사람을 두려워 하거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거나, 누군가를 혐오하며, 심지어 생명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중요히 여겨서 그 생명을 미워합니다. 음란과 속임과 우상숭배는 이것과 같은 성격의 다른 종류일 뿐입니다. 계시록은 이 거짓말쟁이들의 '부분'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집어넣겠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새창조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 전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새창조에 참여하지 못할 그 사람 인격의 어떠한 측면으로 볼 것인지는 생각해볼만한 문제입니다. 직역했을 때, '거짓말쟁이들의 부분(메로스)'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의'인데, 이것이 거짓말쟁이들이 타는 못에 참여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부분만이 타는 못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 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합니다. 다만 그 부분이 타는 못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구축해온 인격인데, 그 인격의 일부가 거짓되어 그것이 떨어져나갈 때의 아픔이 좀처럼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마치 눈을 빼고 손을 잘라서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자신의 사지가 뜯겨 나가는 것보다 더 한 아픔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풀어놓은 것이 교단의 해석과는 맞지 않습니다만, 이 최종적인 구원의 측면에 대해서만은 다른 가능성으로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두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아직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정죄와 판단을 위해 쉽게 사용될 수 있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잘못된 부분들을 극복해나가는 같은 싸움을 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21:1~5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왜냐하면 첫 하늘과 첫 땅은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그 하늘로부터 그 하나님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을 향해 갖춰 입은 신부로서 준비된채.

  그리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 하늘로부터 말하는 큰 소리를.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 장막에) 거하시리라, 그리고 그의 바로 그 씨알들이 있으리라,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 그리고 각각의 눈물을 그들의 두 눈으로부터 닦을 것이고,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애곡과 울음과 고통도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것들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좌 위에 앉은 이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모든 것을 "

  그리고 그이가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라, 바로 그 말씀들이 신실하고 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되었다. 나는 ㄱ이고 ㅎ이다, 아르케이고 텔로스. 바로 내가 목마른 이, 바로 그 사람에게 그 삶의 샘물로부터 줄 것이다, 선물로. 이기는 이는 그러한 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그런데 두려워하는 자, 신실하지 않은 자, 혐오하는 자, 살인하는 자, 음란한 자, 수쓰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부분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줄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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