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자손과 과부의 헌금(12:35~44)

  이 모든 일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왜 율법학자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다윗 자신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내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 적을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여기 내 오른편에 앉아라.'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

  온 무리가 기쁘게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 하여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고, 진심도 아닌 기도를 길게 한다. 그들이 더 엄한 정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 금고 맞은편에 앉아서 무리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많은 부자들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오더니 작은 동전 두 개를 집어넣었다. 합해서 20원 정도밖에 되지 않은 돈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을 했지만, 그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넣었다. 자신의 생계비 전부였다."


0. 두 개의 성전


  성전에서 하신 일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된 맥락 속에서 부분부분 본문들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처음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에서부터, 성전에서 제사를 정지시키신 사건, 소작인 비유, 모퉁이돌 비유, 가이사냐 하나님이냐 질문에 대한 답변,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계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내용들이 성전에서 벌어진 것들이고, 따라서 이스라엘 성전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우리는 두 개의 성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눈으로 보고있는 건물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을 유추해봤을 때 그려지는, 보이지 않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그간 했던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님


  지금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람과 다수의 치밀한 대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일대 다수의 레슬링 매치와 같은데, 한 쪽에서는 계속 터치하면서 선수가 교대됩니다. 율법학자가 나오고, 바리새인과 헤롯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이어 사두개인이 나오고, 제사장들도 나와 딴지를 걸었습니다. 이러한 공방전이 왜 벌어진 것입니까? 예수께서 성전의 제사를 중지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유대인의 중심,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명줄 같은 것이었고(이들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사백년간의 포로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끊어내는 예수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죽일 놈이든지, 메시아든지. 따라서 이스라엘과 예수의 대화 속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메시아는 어떤 분이신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힌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곧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디메오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바디메오가 예수 일행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서, 수치심도 무릅쓴채 소리질렀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거지 바디메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메시아 = 다윗의 자손. 그런데 예수께서는 반론을 던지십니다. 이것으로 되겠냐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기만 하면 충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을 인용하십니다.


시편 110편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동이 틀때 새벽 이슬이 맺히듯, 의 젋은이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이 시는 메시아에 관한 시로 유명한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메시아를 알고자하면 반드시 열어봐야 할 교과서와 같은 시입니다. 게다가 이 시를 기록한 사람이 다름아닌 다윗입니다. 다윗이 말하길, "하나님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내 주"가 메시아 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자신의 자손 중에 날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주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인 메시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내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 적을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여기 내 오른편에 앉아라.'


  처음 나오는 주는 하나님입니다. 희랍어에서는 히브리어의 하나님(아도나이)도 퀴리오스(주)로 번역하기 때문에 '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주고, '내 주'는 다윗의 주, 곧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적을 메시아의 발 아래 둘 때까지 여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인용하신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학자들은 뻔히 이 본문을 연구했을 것인데,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가르칠 뿐, 다윗의 주란 말은 쏙 빼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손이라 해야 지들 멋대로 할 수 있거든요. 자손이라 해야 메시아는 그저 자신들만의 메시아, 유대인만의 메시아, 동족의 메시아가 되거든요. 성전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이 곳에서 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메시아가 이방민족을 처부수고 유대인들이 옳다고 선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자신들의 혈통, 즉,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자요. 이것은 자신들의 혈통이 아닌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배척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순수 유대 혈통인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요, 이 혈통이 아닌 사마리아 인들, 혹은 유대인이지만 병이 걸리거나, 귀신이 들려서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배척당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혈통 기준의 인정과 소외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전을 옹호하는 메시아를 말하려다보니, 그들은 반쪽짜리 메시아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은 혈통이 기준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학벌이 기준이지 않습니까? 학벌이 좋은 사람은 살기 좋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낮은 학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벌로 치밀하게 짜여진 사회의 중심에 성전이 있습니다. SKY라는 성전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들어가려고 안달인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밥벌이 하는 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것인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이 나라에는 어느 지역 출신인가가 또 제 2의 혈통입니다. 영남 출신이냐, 호남 출신이냐에 따라 국회의원 당락이 결정됩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나라는 실제로 이것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1995년에 민주당인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 시장에 출마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쳤다고 했던 사람들이 미쳤던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좋은 정책을 가지고, 영호남의 말도 안되는 지역감정을 끊어내려고 했던 그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보기 좋게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무엇이 삶의 중심입니까?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기준입니까? 학벌입니까? 출신지역입니까? 혈통입니까? 



2. 주 : 전체를 돌보시는 분


  메시아는 다윗의 주님입니다. 다윗의 주. 주는 전체를 돌보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미입니다. 전체의 주. 그러한 주님을, 그저 동족들을 구하러 오시는 작은 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들이 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예수를 그저 나 하나 구하러 오시는 작은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죽음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학자들은 메시아를 자신들의 자손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다윗의 자손임과 더불어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말하면, 다윗도 그러한 주님을 섬기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민족도 메시아 앞에 엎드리는 하나의 민족일 뿐임이 드러납니다. 설마 율법학자들이 이거 몰랐을까요? 아니요. 밤낮 성서와 싸우는 그들이 몰랐을리 없습니다. 허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것 피하고자 했을것일 겁니다. 자기 민족 잘먹고 잘사는 문제에 눈이 뒤집어져서, 전체의 주님을 우리들만의 하나님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안하십니다. 성전 때문에 소외당하고, 버려지고, 죽임 당하는데, 그 성전에 하나님 계실리 없습니다. 


  주의 자리는 전체를 돌보는 자리입니다. 이 전체는 우주보다 큰 전체입니다. 이 자리는 일개 민족이 차지할 수도 없고, 오늘날의 경제가 설령 허락한다할지라도, 어떠한 기업도 차지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전체를 돌보는 자리는 생명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의 자리, 참 인간의 자리, 인자의 자리입니다. 무언가 욕심 가지고는 설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전체를 돌보는 종의 자리는 그러한 자리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만한 인간이, 민족이, 기업이, 나라가 이 전체를 돌보는 자리에 앉아보려 얼마나 애를 써왔습니까? 독재자들이 출몰했고, 게르만족이 일어났으며, 거대 다국적 기업은 세계를 점령한듯하고, 아테네는 해상권을 장악했기에 자신들이 전체를 돌본다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중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체를 돌보긴 커녕, 모두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 자리는 모든 것을 버려야 설 수 있는 십자가의 자리, 생명 말고는 다른 것 바라지 않아야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서야 하는 자리입니다.


  예수의 자리입니다. 그 분은 유대 혈통 안에서 나셨지만, 유대 혈통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는 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입니까? 우리의 메시아는 유대인이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십니다. 전체를 위한 메시아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 역사를 따라서 그 분을 알 수 있으나, 그 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유대를 넘어 나의 메시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문제는 유대 역사를 따르지 않고 그 분을 알려고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저 높은 수준의 윤리를 가르친 고매한 스승이라 생각하여, 석가와도 비슷한 분이라 말하는 자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십니다. 더불어 반대편의 함정을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그저 유대인 청년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신 일이 모든 인류의 가슴을 울리는 일임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소리입니다. 그의 죽음이 전체를 위한 죽음임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이십니다. 이 점을 잊어선 안됩니다.


   온 무리가 기쁘게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


  온 무리가 예수의 이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말씀입니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뿐 아니라, 다윗의 주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기쁘게 들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봅시다. 혈연 중심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배척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주"라는 말은 다윗의 혈통 아닌 사람들도 덮습니다. 다윗도 그에게 무릎 꿇는 한 사람이기에, 주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이의 메시아요. 모든 이가 메시아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기쁘게 들을 수 밖에요.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3. 전체를 돌보기 싫어하는 자들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 하여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고, 진심도 아닌 기도를 길게 한다. 그들이 더 엄한 정죄를 받을 것이다."


    율법학자들을 경고하십니다. 이들은 메시아를 자신들의 전유물이라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전체의 주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오해한 자들입니다. 우리도 착각하지 맙시다. 구원하시는 메시아는 특정 단체, 특정 혈통, 특정 계급의 메시아가 아니십니다. 율법학자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인사를 받습니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대접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들이 메시아를 자신들만의 것이라 거짓말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이름 팔아 대접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는 일이라곤, 하나님 이름 팔아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고, 일부러 사람들 보여주려고 기도도 길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더 엄한 죄가 있습니다. 왜 여기에 '더' 라는 비교급 부사가 들어왔습니까? 왜냐하면 메시아가 자신만 구원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죄는, 메시아가 자신들만 구원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하늘이 이 땅으로 돌입할 것이고, 이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지 않은 곳은 없게 될 것입니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사창가의 음란한 방구석 까지, 노숙자들이 잠자는 외진 어둡고 외진 곳 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구원을 빌미로 거들먹 거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자들이고, 우리는 나머지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애쓰지 않아, 많은 이들이 복음 듣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만 구원을 받게 된다면, 이것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내용을 또한 다른 차원에서 적용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종교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국가의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나의 차원에서 돌아봅시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이십니가? 기독교 아닌 이들은 돌보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안믿는 것들"이란 말은 쓰지도 말아야 하고, 생각도 말아야겠습니다. 예수 안 믿는 이를 나보다 못나게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은 계급을 만드는 자요, 그리스도와 정반대로 가는 자요, 예수를 자신만의 유산으로 삼으려는 천하의 거짓말쟁이입니다.


  둘은 국가의 문제입니다. 지금 국가들의 목적은 자기네 잘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역사 학문이 병들었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목적으로 박아버리고 생각을 하려하니, 동북공정이 나오고, 다케시마 소리가 나옵니다. 세 나라가 서로 역사를 자기의 자손 삼으려 하니 세 나라의 역사를 맞춰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도 전체를 돌보는 자리에 서려고 하지 않고, 꺾일줄 모른채 세상의 중심 행세를 하려 듭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전체의 주님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전체의 진실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 하기에 진실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체를 잃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문제로 적용시켜보면 어떠합니까? 예수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속한 교회, 가족, 민족, 국가의 소유일 수도 없습니다. 그 분은 전체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같이,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전체를 돌보는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자리가 인자의 자리, 주님의 자리, 참인간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 바라며, 그 자리에는 앉고나면, 양반, 상놈, 잘난놈, 못난놈, 기독인, 비기독인의 구별 없습니다. 그럼 무엇만 있습니까? 내가 살고자 하느냐, 죽고자 하느냐만이 있습니다. 죽음을 믿느냐, 부활을 믿느냐만 있습니다.


4. 가난한 가운데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쏟아붓는 자리


  예수께서 성전 금고 맞은편에 앉아서 무리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많은 부자들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오더니 작은 동전 두 개를 집어넣었다. 합해서 20원 정도밖에 되지 않은 돈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을 했지만, 그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넣었다. 자신의 생계비 전부였다."


  그리고 문제의 구절이 등장했습니다. 이 성전은 건물 성전, 예수께서 제사를 중지시킨 허울뿐인 건물입니다. 이 곳에서 구원이 자신들에게만 있다는 거짓말쟁이들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이용했습니다.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고, 진심도 아닌 기도를 길게 하는 자들이 이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로마를 짓이기자고 작당모의하며, 유혈이 낭자하는 전쟁도 불사하자는 미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작 하는 일이라곤 서민들 피를 빨아먹는 일입니다. 


'전쟁불사론'-'공멸론'…거침없는 한나라


  심지어 과부의 20원조차 그들의 손아귀로 들어갑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자신과 이 과부를 동일시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학자들에 의해 자신의 가진 전부가 집어 삼켜진 과부처럼, 예수도 자신에게 구원이 있다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에 의해 그의 전부가 삼켜질 것입니다. 생명조차 삼켜질 것입니다. 비천한 가운데 그는 모든 것을 다 죽음에 쏟아부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새성전의 모퉁이 돌은 그렇게 빚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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