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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22~22:5


그리고 나는 그녀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그녀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양도 역시.


  성전이 없다니요! 그럼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메시아께서는 다시금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전은 대지 위의 중심이라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랜드마크이자, 곧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이제 도시의 일부가 아니라 그 도시 자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성전이 온 우주를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었던 표지판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뚜렷이 드러나셨고, 스스로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그 도시를 향해 빛나기 위한, 해의 필요를 갖지 않고 달의 필요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뚜렷이 그 도시 (자체)를 밝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등불은 그 어린양입니다.


  (2016.12.30) 빠뜨렸던 구절에 대한 설명을 추가합니다.

  그 성전과 일치된 도시에는 해와 달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해와 달이 만들어낸 질서 안에서 이뤄졌던 옛창조를 극복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두 가지 동사의 대조가 돋보입니다. "~를 향해 빛나기 위한" 으로 번역한 것은 '파이노마이'입니다. '빛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사에는 "~를 향해"가 따라옵니다. 즉 빛나는 것은 해와 달입니다. 해와 달은 스스로 빛나며 다른 것들을 비출 뿐, 자신들이 비추고 있는 것이 스스로 빛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새 창조는 다릅니다. 새 창조가 이루어졌을 때 해와 달이 불필요한 것은, 새 창조의 예루살렘이 스스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동사를 '포티조'를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뚜렷이 그 도시 자체를 밝게 만들어버립니다. '비춤'과 '밝게 만듬'은 다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도시의 광원(光元)이 되셨습니다.

  '비춤'과 '빛나게 만듬'의 차이는 "이 도시의 등불이 어린양"이란 말로 분명해집니다. 어린 양은 등불로서 이 도시 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빛에 대한 이러한 담론은 새창조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새창조는 누군가에 의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남입니다. 스스로 빛난다고 해서 하나님을 배제한 다른 빛을 찾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입니다. 그렇게 빛나는 것이 새 창조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씨알들이 그 빛을 통하여 걸어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그들의 뚜렷을 그녀에게로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 빛으로 씨알들이 걸어나옵니다. 제가 이 구절에서 집중하려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이중결론입니다. 계시록은 19:11~21:8을 사이에 두고 두 가지 결론을 보여줍니다. 17:1~19:10에는 '바벨론의 멸망'이, 21:9~22:9에는 '새 예루살렘의 충격적인 면모'가 드러납니다. 이 두 가지 결론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배역이 있습니다. 바로 "땅의 왕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9:19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짐승과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들을, 그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모였는데, 그 말 위에 앉으신 분과 그이의 군대에 맞서.


  즉 "땅의 왕들"이라 언표된 대상에게는 두 가지 결론이 제시됩니다. 요한계시록은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끼어있는 시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무언가 정해졌을 때, 그것은 인과관계나 시간 순서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으로 겪어나가며 살고 있는 이 끼인 시대는 그야말로 potentialis의 시대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정해졌으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 하나 정해졌다고 말할 수 없는 시절입니다.

  "땅의 왕들"에게는 두 가지 결론이 열려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과 함께 멸망할 수도 있고, 새 예루살렘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꼭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인만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고, 의미를 확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날 하늘의 차원을 거절한 채, ''땅에서 아르케가 되고자 애쓰는 모든 사람들이 곧 "땅의 왕"아닐까요? 오늘날 자신을 '인생의 주인'이라 믿고, 이 땅에서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의 "땅의 왕"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쉽게 말하기 전에, 그들의 눈 앞에 이중 결론이 놓여있음을 말해야 하는 예언자적 에클레시아입니다.


  '씨알들'. 즉 전세계에서 민족들이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뚜렷을, 하나님의 뚜렷에 일치시킵니다. 즉 자기 자신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그러한 이들을 받아주고, 그들이 하나님과 만나도록 합니다. 이 도시 전체가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성전이라는 이름에 참으로 부합하는 기능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성문들이 낮동안 닫혀 있을 리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밤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민족들의 뚜렷과 영예를 그 도시로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보편적인 것과 혐오와 거짓을 만드는 이는 들어올리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삶의 책에 기록된 이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사야 60장의 인유입니다.


이사야 60:1~5, 10~11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으로부터 오며,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서 올 것이다. 그 때에 이것을 보는 너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흥분한 너의 가슴은 설레고, 기쁨에 벅찬 가슴은 터질 듯 할 것이다. 풍부한 재물이 뱃길로 너에게로 오며, 이방 나라의 재산이 너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

  이방 자손이 너의 성벽을 쌓으며,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비록 내가 진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 내가 은혜를 베풀어서 너를 불쌍히 여기겠다."


  너의 성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서, 밤낮으로 닫히지 않을 것이다. 이방 나라의 재물이 이 문을 지나 너에게로 오며, 이방 왕들이 사로잡혀서 너에게로 끌려올 것이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최종 국면은 피 비린내나는 처벌만이 아니었습니다. '밤'이라는 옛 질서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빛으로 빛나고, 빛이 없을 때를 노리고 공격할 외부의 적이 더이상 없기 때문에 성문은 닫아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열린 문으로 전에는 원수였던 이들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원수들은 '민족들'입니다. 다문화적 뚜렷과 영예가 새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보편적인 것과 혐오와 거짓을 만드는 이'입니다. 여기서 '보편적'이라는 말은, 현시대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것들이란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세속적인 것'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시대에 살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것이지만 절대선이신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무언가입니다. '혐오할만한 것'은 옳지 않음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 무언가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가증한 일'로 번역되어 있는데, '가증한 일'이라하면 A.D.1세기 유대인은 안티오코스 4세가 제우스 신상을 유대 성전에 밀어넣은 일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만한 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더러운 것들의 근원은 거짓입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들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러한 행동을 고집한다면, 그는 예루살렘의 주민등록인 삶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러한 사람이 이미 과거에 정해져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는, 현재 고집하고 있는 삶이 틀려먹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집을 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이중결론 앞에서 '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몸을 찢어 가져오신 이 새로운 시절 속에서.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통해 드러난 아브라함의 복을 선택하라고.


  그리고 나에게 삶의 물의 강이 수정처럼 보였고, 그것은 그 하나님의 왕좌와 어린양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요한에게 새로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좌와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의 물, 곧 '생명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솟아나 창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는 물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예언된 바 있습니다.


스가랴 14:8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서,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흐를 것이다. 여름 내내, 겨울 내내, 그렇게 흐를 것이다.


에스겔 47:1...8

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로 내려갔다가,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요엘 3:18

그 날이 오면, 산마다 새 포도주가 넘쳐 흐를 것이다. 언덕마다 젖이 흐를 것이다. 유다 개울마다 물이 가득 차고 주의 성전에서 샘물이 흘러 나와, 싯딤 골짜기에 물을 대어 줄 것이다.


그녀의 대로 가운데 (흐르고), 강의 여기저기에는 생명 나무가 열 두 열매들을 맺으며, 달따라 각각 그 열매를 내고, 그리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 씨알들의 치료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저주들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등장했던 생명나무가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그 중에서도 마지막 장을 넘기니 다시금 등장했습니다. "강의 여기 저기"라는 표현으로 보아, 생명 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세계로 흐르는 생명수 가에 셀 수 없이 많은 생명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 나무들의 존재 목적은 하나입니다. 치유. 그리고 이 생명 나무로 올 수 없었던, 아담에게 내려졌던 저주는 이제 끝났습니다. 모든 씨알들은 이 생명 나무 잎사귀를 통해 치유됩니다. 하나님처럼 영생하게 되었습니다.


스가랴 14:11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에 자리 잡을 것이다. 다시는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좌와 어린양이 그녀 안에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의 종들이 그이를 섬기며, 그리고 그이의 얼굴을 볼 것이며, 그이의 종들이 보여질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들의 미간에.


  새 예루살렘 안에는 남편과 신부가 함께 삽니다. 남편은 하나님이시고, 아내는 그이의 신실한 종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달리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죽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즉 우리가
아직은 거울을 통해 어른대는 것을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볼 것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분으로부터 깨닫지만,
그때에는 하나님 나를 아시듯 꿰뚫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며 섬기는 이들이 누구이며, 그들의 미간에 무어라 새겨질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 모두는 성전에서 섬기는 종이므로 그들의 직책은 '제사장'입니다. 이미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을 때부터, 그들은 제사장 나라로서 끼인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마치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대면하러 발에 끈을 매고서 지성소로 들어갔던 것처럼, 새 예루살렘에서 섬기는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이사야 61:6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 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미간에 새겨진 말은, 제사장의 머리에 쓰인 바로 그 말입니다.


출애굽기 28:36

너는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서, 그 위에, 인장 반지를 새기듯이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라.


  이제는 이마에 쓰인 그 말대로 살 수 있는 제사장이, 마침내 되었습니다. 인간의 완성. 생명수, 생명나무, 온전한 제사장, 이뤄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하나님을 마주함.


그리고 밤이 더이상 없을 것이고, 그리고 등불과 햇빛이 더 이상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이라는 옛질서는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하루의 절반을 빛 속에서 살다가, 다시금 어둠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참 빛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다시는 자신을 감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 속에서, 그 분의 흔적을 더듬어 마침내 새 예루살렘에 이른 이들에게는, 현시대든 오는시대든 언제나 뚜렷했던 한 분입니다. 그 태양보다 밝은, 어둠보다 깊으신 이가 마침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이사야 60장에 예언된 바 있습니다.


이사야 60:19~22

해는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며, 달도 더 이상 밤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오직 주님께서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 주님께서 몸소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며, 네가 곡하는 날도 끝이 날 것이므로,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으며, 다시는 너의 달이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백성이 모두 시민권을 얻고,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만든 주님의 작품이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가장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주가 이 일을 지체없이 이루겠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21:22~22:5


   그리고 나는 그녀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그녀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양도 역시. 그리고 그 도시는 그 도시에게 빛나기 위한, 해의 필요를 갖지 않고 달의 필요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뚜렷이 그 도시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등불은 그 어린양입니다. 그리고 민족들이 그 빛을 통하여 걸어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그들의 뚜렷을 그녀에게로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성문들이 낮동안 닫혀 있을 리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밤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민족들의 뚜렷과 영예를 그 도시로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보편적인 것과 혐오와 거짓을 만드는 이는 들어올리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삶의 책에 기록된 이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삶의 물의 강이 수정처럼 보였고, 그것은 그 하나님의 왕좌와 어린양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그녀의 대로 가운데 (흐르고), 강의 여기저기에는 생명 나무가 열 두 열매들을 맺으며, 달따라 각각 그 열매를 내고, 그리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 민족들의 치료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저주들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좌와 어린양이 그녀 안에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의 종들이 그이를 섬기며, 그리고 그이의 얼굴을 볼 것이며, 그이의 종들이 보여질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들의 미간에. 그리고 밤이 더이상 없을 것이고, 그리고 등불과 햇빛이 더 이상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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