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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8~29

"그리고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이글거리는 두 눈과 금처럼 빛나는 놋쇠와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십니다.


  "이글거리는 두 눈과 빛나는 놋쇠 같은 발"이란 표현도 인자 환상에서 보았던 이미지의 일부입니다. 다니엘서의 인유입니다.


다니엘 10:6

그의 몸은 녹주석 같이 빛나고, 그의 얼굴은 번갯불 같이 환하고,

눈은 횃불 같이 이글거리고, 팔과 발은 빛나는 놋쇠처럼 뻔쩍였으며,

목소리는 큰 무리가 지르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글거리는 두 눈", "하나님의 아들"은,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 인자가 심판자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두 눈"은 "가온들과 장기들을 살피는"으로 연결됩니다. 희랍어로 '본다'는 곧 '안다'입니다. 즉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께 감출 것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너는 내 아들이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편 2장을 떠올리가 하는데, 본문에서 그 아들은 따뜻하게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분이 아니라, 현시대의 통치자들을 쇠 지팡이로 부수어 버릴 심판자로 등장합니다. 즉 주님은 사람의 깊은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로마서 2:5,6

완고한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드러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분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5

그러니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는 아무 일에도 가능성을 닫고서 판단을 굳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어둠에 감춰진 것들을 밝히실 것이고, 가온 속 방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칭찬이 각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을 줍니다. 현시대 어디에도 모든 것을 아는 자가 없고, 아는 것도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시대 안에서도 올바른 생각과 실천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두 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따를 때 말입니다. 따라서 그이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그이가 쇠 지팡이로 현시대의 통치자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안정을 얻습니다. 마치 견고한 놋쇠처럼 단단한 발로 대지를 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게임에 많이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만, 시장경제가 발달하기 이전에 재화의 교역은 '길드'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뛰아테리아 지역은 구리와 청동을 제련하는 길드로 유명했던 지역입니다. 그들에게 "금처럼 빛나는 놋쇠 같은 발"은 날마다 생업의 현장에서 만나는 생생한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나는 너의 일들, 인(仁), 신(信), 디아코니아, 견딤을. 그리고 처음 일들보다 끝의 일들이 더 풍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 네가 이세벨이란 여자를 내버려두었다는 사실도 가지고 있다.(그녀는 여자 예언자라 불리며, 나의 종들이 길을 벗어나 포르네이아를 저지르게 하고, 그림자 숭배의 음식들을 먹도록 가르친다.)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 보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자는 "알고 있다"로 운을 뗴십니다. 그가 알고 계신 것의 주체는 '너'라는 단수, 즉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 '천사'입니다. 인자는 그 천사의 인(仁)을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인'은 사랑의 대체어입니다.남녀사이의 감정을 넘어, 관계 속에서 이루는 인간다움의 의미를 담고자, 다석 선생을 따라 유학에서 용어를 가져옵니다.(자세한 내용은 여기)

  인자는 그 천사의 신(信)도 알고 계십니다. 피스티스. 신실함입니다.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 신실함은 새창조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실 토라 이야기, 다시 말해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할 사람들 속에 새로이 창조하시는, 현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로마서 4~8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자는 그 천사의 '디아코니아'도 알고 계십니다. '디아코노스'라는 말은 우리에게 '청지기'라는 번역어로 익숙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섬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맡아 다스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치 브루스 웨인의 대저택을 맡아 관리하는 알프레도처럼 말입니다.(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부활하신 메시아의 역할은 디아코노스로 분류됩니다.)

  인자는 그 천사의 '견딤'도 말합니다. 이 말은 '아래 머물러 있음'의 의미입니다. 이교 사상을 가지고 경제적인 짜임이 견고하게 이뤄진 사회 속에서 사는 것은 다른 에클레시아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돼지머리 놓고 고사상에 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상업 전체를 이방신을 숭배하는 문화와 연결했을텐데, 그 안에서 사는 에클레시아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고단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유혹도 심했겠지요. 그럼에도 죽임당하고 살아나신 인자의 다스림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같은 왕권 행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딤'입니다.


  그리고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에서, 이러한 삶이 점점 규모있게, 완성도있게 발전해나갔습니다. 처음보다 나은 나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완전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말이고, 그 솔직함은 모든 면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쳐나가기 위한 당연한 전제입니다. 틀어놓은 노래 중에 이승환의 workaholic이란 곡에서 "빠져 완벽에 빠져"라는 가사가 들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벽은 이미 균형을 잃어버린 완벽입니다. 일에 끌려다니다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완벽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추구하는 완전은 그러한 완벽이 아닙니다. 솔직함입니다. 그리고 그 솔직함은 균형됨을 위함입니다.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되자는 것입니다.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의 '과오(過誤, 이 말도 참 적절합니다. '잘못된 것을 그저 지나쳤다'는 말입니다)'는 '이세벨'이라 지칭되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를 그저 내버려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이 이세벨은 아닐 것입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부인으로 열왕기상 16~22장에 나옵니다. 이세벨은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온갖 이방신을 들여온 여자로 유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여자 예언자'라 불리는 사람은,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 안에 잘못된 사상을 들여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상이 에클레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1) 포르네이아 하게 하고, 2) 그림자 숭배의 음식을 먹도록 만듭니다.(그리고 이 역사적 사실은, 이후 천사들을 통해서 상징화되어 표현될 것입니다. 계시록 18장에 같은 일을 하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두 가지 결과를 봤을 때, 우리는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와 같은 문제로 신음하던 공동체를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그들은 '영(靈, 우리는 줄곧 '숨'이라 풀었습니다)'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소위 오늘날 말하는 '영성(spirituality, sprit도 '숨'이란 뜻입니다)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자신들이 이미 영적인 것을 다 이루었다고 오해했습니다. 부활이 두 단계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서, 자신들은 이미 예수의 단독부활을 통해 성령을 받았으므로, 자신들은 영의 실존을 얻은 완성형 인간이라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은, 자신들은 모든 상황들로부터 안전한 새로운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우상 제의에 자유롭게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에클레시아의 일원이면서도, 이교신전에서 성적 방종으로 드러 누워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포르네이아'라는 말은 단순 성적인 문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더 포괄적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에 물들어 있는 일그러진 삶 전체를 향한 진단입니다. 인(仁)이 있고, 신(信)이 있고, 디아코니아와 견딤이 있다할지라도, 심지어 처음보다 발전했다 할지라도, 에클레시아는 이러한 일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일이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에게도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마주했듯, 요한도 같은 문제로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편지'라는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의 전개방식은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수사 의문문들을 나열한 바울과 전혀 달랐습니다. 인자의 환상과 예언, 천사들을 통한 상징.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을 사용했던 두 사람이 같은 결말로 이어집니다. 부활과 새 하늘 새 땅, 메시아 예수의 다시 나타나심과 하늘과 땅의 하나됨. 그리고 이러한 편지들은 사람들을 곧게 세우려는, 동일한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생각을 바꿀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바꿀 뜻이 없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대로 던져 버리고, 그녀와 몸 섞은 이들도 큰 어려움으로 반드시 던져버린다, 만일 그들이 그녀와의 일에서부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내가 죽음으로 그녀의 아이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에클레시아들은 깨닫게 되리라, 내가 장기들과 가온들을 살피는 내가 지금 있다는 사실과 내가 끝에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일을 따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을 남발하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재가 되라고 떠드는, 그럼에도 그릇된 사람들을 낳고 있는 이 여자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을 바꾸다'라고 번역한 말이 '회개'입니다. 자신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해야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세벨이라 불리는 이 사람 뿐만 아니라, 에클레시아 전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자의 날카로운 양날검 같은 말씀은, 잘 하는 것과 잘 못하는 것을 일러줍니다. 이때 잘 하는 것을 보느라, 잘못하는 것을 간과하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을 고칠 수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라는 말은 '잘못에 대한 인정'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면, 저 여자는 에클레시아에서 쫓겨나 침대로 던져질 것입니다. 그녀와 사상을 공유하고서 그릇된 길을 걸었던 이들도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던져버린다'는 현재형입니다. 즉 심판은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서도 벌어집니다. 그들이 그릇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심판이고,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 심판이 찾아오는게 아니라, 생각을 바꾸지 않고 사는 그 순간 자체가 심판의 순간입니다. 균형과 온전함이 없는 '그릇된 완벽'에 빠져버린 삶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던져버림'이 미래의 일이 아니란 점이 그 다음 절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녀의 사상에 물든 추종자들은 현실 속에서 '죽음'으로 심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이는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이가 죽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의 아들, 곧 쇠 지팡이의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장기들과 가온들'은 이어일상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장기들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고, 인격 또한 밖에서는 그 실체가 규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들과 가온들을 붙여서 써놓은 것 같습니다.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속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레미야 17:10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사람의 '의식(consciousness)'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의식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의식없이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정작 의식의 기원과 방법에 대해서 설명할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각주:1]


  이러한 앎은, 즉 의식을 넘어선 초의식적 앎은 창조주의 앎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자신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갈라갑니다. 즉 죽고 부활하셨다고 알려진 이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차원을 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한 쪽은 의식을 넘어선 앎을 부정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가 그러한 앎으로 공명정대하게 판단할 것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자신도 참여하고자 합니다(信). 


  인자가 우리가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해둡니다.

1) 내가 지금 있다. 속을 살피는 존재로.

2) '끝'에, 우리는 우리가 일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재적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로마서 1~3장.





그러나 너희 뛰아테리아에 있는 남은 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더이상 이 가르침을 엑수시아할 것이 없으니, 너희는 사탄의 깊은 것들을 깨닫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듯, 나는 너희 위에 다른 부담을 던지지 않는다. 다만,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붙잡아 힘을 내라, 내가 올 때까지.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이세벨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엑수시아'는 '본질(우시아)로부터 끌어낸 자격이나 힘'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귀신 내쫓음(본질적인 힘으로)', 혹은 '권리 행사(권리는 본질에서부터 옴으로)' 라고 번역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더이상 이 가르침을 엑수시아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이미 잘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본질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본질이 몸에 베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르침을 받아서 실천하라는 권고가 그들에게는 불필요합니다. 그들은 지금처럼만 하면 됩니다. 지금 가진 것들을 '붙잡아 힘내면' 됩니다.


  여기서 "내가 올 때까지"는 인자가 다시 나타나시는 재림을 뜻할 수도 있지만, 인자와 친밀함을 느끼는 현실의 순간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예배, 기도, 성경을 보고,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 살아계심을 느끼는 순간들 말입니다.

  이러한 순간들이 끊임없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말하듯, 주께서 어디 숨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다시금 우리의 가온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살도록 하는 새 힘과, 우리가 가지고 있던 바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정확한 주기가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信)의 길에 '업앤다운'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우리는 다운이 되었을 때는 붙잡아 힘내고, 업되었을 때는 그 분께 참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깨닫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저 말은 위의 여자 예언자가 했던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속을 꿰뚫어보시는 인자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아마도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에게, "우리가 사탄의 깊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교신전에 행사에 참여해보라. 우리는 그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래도 안전하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영적 실존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봐라, 예언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러나 사탄의 깊은 것을 모르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깊음을 아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로마서 11:33~36

아, 깊도다!
하나님의 풍성함과 지혜와 지식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찾아낼 수 없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으며,
누가 그와 '더불어 논하는 이'가 되었으며,
누가 그에게 미리 드려서, 그의 보답을 얻으리요?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서 그를 지나 그에게로 감이라.
그 드러남이 그에게 현시대로부터 오는시대에 이르도록, 아멘.


  견고한 놋쇠로 만든 발은, 하나님의 깊음을 아시는 메시아 예수의 발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깊음은 오히려 사람을 흔들리게 합니다.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릇된 길을 걷게 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같이, 현시대가 왜곡되는 것을 따라 자신의 몸을 비뚤리며, 포르네이아의 삶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기는 이와 나의 일들을 끝까지 지키는 이에게, 민족들에 대한 엑수시아를 줄 것이고, 쇠 지팡이로 그들을 목양할 것이다, 마치 질그릇이 깨지듯, 마치 나 역시 나의 아빠 곁에서 받았듯이. 그리고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줄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그리고 '이기는 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기는 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부연합니다. 이기는 이는 '나의 일들을 끝까지 마치는 이'입니다.

  계시록의 어휘들은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이 뒤에서 다시 등장하고,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더해줍니다. 일은 오늘 메시지의 서두에 등장했던 단어고, 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는 처음보다 나중의 일이 더욱 풍성하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세벨 문제에 빠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더할 것이 없고 지금 하고 있는대로 끝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자신의 일한대로 인자로부터 받는 날'이었습니다. 그 받는 것들 중 하나가 '엑수시아'라는, 역시나 앞에서 나왔던 어휘를 통해 표현됩니다. 민족들에 대한 엑수시아가 주어집니다. 즉 본질에 참여하여, 열방을 다스릴 권한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다스릴 권한'이라고 하면, 누군가 위에 군림하는 것이 떠오르지만, 저는 이 엑수시아가 앞에 나왔던 '디아코니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즉 세계 여러 민족을 섬길 권한이,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이 곧 디아코노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5

디아코노스들의 다양함이 있지만, 같은 주입니다.


  그리고 시편 2편의 인유인 '쇠 지팡이'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현시대의 왕들을 부수어버리기 위한 도구인 쇠 지팡이가, 오늘 본문의 끝에 와서는, 양을 돌보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짐승들에게는 자신들을 해하는 무기가 되겠지만, 그이의 양들에게는 안정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이세벨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더욱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하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쇠 지팡이를 기준으로, 울타리 밖 짐승이 될 것인지, 울타리 안의 양이 될 것인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기 때문에 역전의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현재적 심판에 신음하는 현실 속에서도 말입니다.


  쇠 지팡이를 사용하는 인자의 목양 방식에 대해 두 개의 "~하듯"이 붙습니다.


1) 질 그릇이 깨지듯

2) 나 역시 아빠께 받았듯


  "질 그릇이 깨진다"는 표현은 토기장이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나오고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 질그릇 이야기를 인용합니다(로마서 풀이는 여기). 토기장이는 두 개의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진노의 그릇을 깨부수는 것은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의 당연한 권한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에서 벗어난 진노의 그릇을 깨부수겠다는 예언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역사 위에 펼쳐진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진노의 그릇은 깨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현시대의 크로노스는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해서 깨진 건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 오직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진노의 그릇 뒤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사탄의 머리가 졌습니다.


  그 결과, 메시아 예수의 깨짐(죽으심)을 통해 '긍휼의 그릇'이 새로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긍휼의 그릇이 에클레시아입니다! 구약의 충격적인 전복. 구약을 새로이 읽는 이 에클레시아의 독법(讀法)에 유대인들은 증오심에 불탔고, 희랍인들은 어리석다 생각했습니다. 질 그릇이 깨지듯 메시아 예수께서 깨지셨습니다. 이것이 하늘 아빠가 아들을 길러내시는 방식이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참 아들은 오히려 희미해지기는 커녕, 뚜렷해졌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빠께 효(孝)를 다한 아들은 고난 속에서 빛났습니다.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 이교문화로 넘실대는 파도 속에서 난파되고 있을 때, 그들은 이것이 하늘 아빠의 양육 방식이자, 메시아 예수의 목양 방식임을 알고 더욱 견뎌야 합니다. 올곧게 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견딤의 결과는, 새벽별입니다. 


민수기 24: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당장 나타날 모습은 아니다.

나는 그 모습을 환히 본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다. 한 통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가 모압의 이마를 칠 것이다. 셋 자손의 영토를 칠 것이다.


  어둔 밤 중에 환히 빛나는 새벽별은 곧 메시아 자신입니다.(계시록 22:16에 이 별은 다시 등장합니다.) 민수기 24:17의 인유인데, 민수기 구절에는 지팡이도 등장합니다. 이 "한 통치의 지팡이"가 곧 시편 2편에서 인유된 "쇠 지팡이"라 요한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독법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는 중입니다. 다니엘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어둔 밤, 메시아는 새벽별은 어둠에 잠식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깨짐과 부활의 새창조는 불변의 과거로 오늘날도 남아 있고, 그 주인공은 하늘에서 모든 땅에 있는 생명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견딜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십니다. 배운 바 지켜나가야 할(다시 말해 '이길') 힘이 되십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8~29

  "그리고 뛰아테리아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이글거리는 두 눈과 금처럼 빛나는 주석같은 발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일들, 인(仁), 신(信), 디아코니아, 견딤을. 그리고 처음 일들보다 끝의 일들이 더 풍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 네가 이에제벨이란 여자를 내버려두었다는 사실도 가지고 있다.(그녀는 여자 예언자라 불리며, 나의 종들이 길을 벗어나 포르네이아를 저지르게 하고, 그림자 숭배의 음식들을 먹도록 가르친다.)

  나는 그녀에게 생각을 바꿀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바꿀 뜻이 없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대로 던져 버리고,  그녀와 몸 섞은 이들도 큰 어려움으로 반드시 던져버린다, 만일 그들이 그녀와의 일에서부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내가 죽음으로 그녀의 아이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에클레시아들은 깨닫게 되리라, 내가 장기들과 가온들을 살피는 내가 지금 있다는 사실과 내가 끝에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일에 따라 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너희 뛰아테리아에 있는 남은 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더이상 이 가르침을 엑수시아할 것이 없으니, 너희는 사탄의 깊은 것들을 깨닫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듯, 나는 너희 위에 다른 부담을 던지지 않는다. 다만,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붙잡아 힘을 내라, 내가 올 때까지.

  그리고 내가 이기는 이와 나의 일들을 끝까지 지키는 이에게, 민족들에 대한 엑수시아를 줄 것이고, 쇠 지팡이로 그들을 목양할 것이다, 마치 질그릇이 깨지듯, 마치 나 역시 나의 아빠 곁에서 받았듯이. 그리고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줄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1. <존재하는 신>, 앤터니 플루, p. 18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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