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8~11

  "그리고 너는 즈뮈르나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첫이자 끝이신, 죽었다 살아나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눌림과 궁핍을 알고 있다, (오히려 네가 지금 풍요롭다는 사실도.) 그리고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말하는 이들로부터 (나온) 험담도 알고 있고,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첫이자 끝이신, 죽었다 살아나신" 즉, 1장에서 나타난 바로 그 인자가 이번에는 요한을 통해서 '즈뮈르나 에클레사의 천사'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다시금 인자는 삼중표현, 죽음과 부활로 묘사됩니다. 각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앞으로는 1장의 인자 환상과의 연결되어 있고, 뒤로는 '천사들을 통해 전달되는 환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주 긴밀하게.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땅을 잃어버린 이후에도, 유대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그 명맥을 유지해왔습니다. 땅은 없어도 유대인은 있었고, 그들은 회당과 토라를 중심으로 독특한 생활양식을 유지해나갔는데, 이러한 삶은 다신교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이방인들이 보기에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그러한 유대교를 보호해주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안된 기독교 역시 유대교와 비슷한 류로 취급되어 어느 정도 보호를 받았습니다. (네로 황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기독교와 비슷한 류로 취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토라 이야기를 공유하지만, 그 토라 이야기가 이뤄지는 방식에 대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완전히 상충되는 이야기를 합니다.(이에 대해서는 '성경으로 지은 생각의 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토라 이야기'에 대한 다른 이해 따문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계속 로마에 고발해왔습니다. 즈뮈르나 에클레시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해 로마로 압송되었고, 심지어 예수님도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에 넘겨져 죽임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말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분명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분명할텐데, 성경은 이들을 '유대인'이라, '이스라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오리려 '사탄의 회당'이라 부릅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토라를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토라를 지킨다'는 말 안에는, '이 토라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토라 이뤄짐에 대해 그릇 사고하게 되면, 토라를 지킬 수도 없게 됩니다. 유대인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유대인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즉 유대사람은 눈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할례는 살가죽에 보이게 해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사람은 비밀스럽게 감춰져있으며,

할례는 규정이 아닌, 하나님의 숨결 속에서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칭찬(발음이 '유다')은 사람으로부터 있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있습니다.


  토라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숨결로 이뤄집니다. 이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 방법을 통한 결과는 눈에 뚜렷이 드러납니다. 바로 지킴입니다. 실천입니다. 토라 이룸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하면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유대인은 바로 숨결로 토라를 이루려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유대인이라 말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험담이요, 사람을 디아블로스의 곤경에 빠뜨리려는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사람들을 유대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만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곧 겪게 될 것을 두려워 말아라. 보라, 곧 디아볼로스가 너희들로부터 (몇몇을) 감시로 집어 던질 것인데, 너희들이 시험받기 위함이다.


  '디아볼로스'는 '이간질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디아'는 둘로 떼어놓는다는 말이고, '볼로스'는 던진다는 뜻입니다. 즉 둘로 찢어 던져놓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을 로마에 넘겨주려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사탄의 회당'이라 언급했습니다. 앞에서 천사를 '집단 인격'으로 보았던 방식으로 사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타락한 집단 인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은 사람들을 찢어 던져놓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누군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탄이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짜먹는 왜곡된 인격이, 개인을 넘어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단순히 타인의 삶을 위협하는 것을 하고자 사탄이 지금도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최종 목적은 토라 이야기가 이뤄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날이 자신이 끝장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이 죽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생명을 걱정해주는 좋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베드로를 예수께서는 사탄이라 호통치셨습니다. 예수는 목숨보다 토라 이야기의 이룸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오히려 전자를 후자를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디아볼로스의 악한 행위들도,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마치 가롯유다의 악한 행위가 십자가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건의 일부가 되었듯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뜻 안에 있다'는 말을 오해해서, '결국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왜 죄 지을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창조하셨어요?", "결국 가롯유다가 십자가 사건을 이루는데 필요했던 영웅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의 숨결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들 뿐입니다. '뜻 안에 있다'는 말을, '손바닥 위에 있다'라는 불가의 표현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손오공이 아무리 날뛰어도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말이, 손오공의 날뜀을 부처님이 조장했다는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롯유다에게 '못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분명 악합니다. 그러나 그 악한 행위들을 선한 역사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어야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3장에서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말하는 자들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면 되겠네?"하고 말했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비밀스러운 유대인들을 통해 토라 이야기를 이루신다는 바울의 말을 듣고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말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비뚤어져 죽음으로 떨어지는 인류를 분명히 고치십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언제나 선택된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리고 누구나 선택되길 원하면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을 퀸의 노래를 듣고 '챔피언'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원래부터 우리 모두가 챔피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선택된 '챔피언 한 사람'을 통해, 모두가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고, 그 길로 가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챔피언입니다. 누가 챔피언입니까? 그이를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참되게 사는 사람들이 챔피언입니다. 아직도 비뚤어진 인격에 눌려있는 이를 어찌 챔피언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값싼 위로입니다. 그 길걸어 챔피언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챔피언이 된 게 아닙니다.(그리고 그러한 사람이라면, 애시당초 챔피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챔피언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이들이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합니다. 그 챔피언을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언표합니다. "이긴 이".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서, 사탄은 에클레시아를 무너뜨려 토라 이야기를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시험하지만, 에클레시아는 그 시험 덕분에 오히려 '강해집니다'. 설령 자칭 유대인들의 밀고로 감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랑했던 에클레시가 식구들로부터 찢어져 따로 던져진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인자는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삼중표현이후 '두려워말라'라는 표현이 주어지는 방식은 이사야서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이사야 41:4~10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섬들이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두려워한다.
저 멀리 땅 끝에 있는 나라들이 무서워서 떤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나온다.
그들은 서로 손발이 맞아서,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한다.
대장장이는 도금장이를 격려하고,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모루를 치는 자를 격려하여 이르기를
'잘했다. 잘했다' 하며, 못을 박아서 우상이 기우뚱거리지 않게 한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이사야 44:2~8

너를 지으신 분 네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를 도와주마' 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부어 주고,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내리겠다.
그들은 마치 시냇물 가의 버들처럼, 풀처럼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는 주님의 것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그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이스라엘의 속량자이신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다.
누가 나처럼 선언할 수 있으며,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느냐?
나를 누구와 견줄 수 있느냐?
만일 있다면, 내가 옛날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고했듯이,
그들에게 다가올 일들을 미리 말하여 보라고 하여라.
너희는 떨지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내가 예전부터 너희에게 이미 예고하여 주지 않았느냐?
나는 예고하였고, 너희는 이것을 증언할 나의 증인들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또 있느냐? 다른 반석은 없다. 내가 전혀 아는 바 없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신적존재가, 한 공동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준 문헌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교도 '하늘'을 말하고, 초기불교도 '니르바나'를 말하나, 이토록 자신을 사랑해줄 것을 애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한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너희들이 '열흘의 눌림'을 갖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열흘의 눌림'은 투옥기간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다니엘서의 인유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시험을 견디는 온전한 기간으로서 열흘입니다. 즉 인자는 디아블로의 어려움을 겪을 에클레시아 사람들에게 온전한 견딤을 말씀하십니다.

다니엘 1:12~15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의 얼굴빛과 왕이 내린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의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시고,
이 종들의 요청을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독관은 그 말을 따라서, 열흘 동안 시험해 보았다.
열흘이 지났을 때에 보니, 그들의 얼굴빛이 왕이 내린 음식을 먹은 젊은이들의 얼굴빛보다 좋고 건강하여 보였다.



죽음까지 신실한 이가 되어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그리고 설령 '죽음'으로 위렵받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신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신실함은 생명의 면류관으로 돌아옵니다. 곧 부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운동선수가 받는 월계관을 부활에 비유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현시대가 끝나는 마지막 날, 곧 주의 날이 이뤄지는 날에, 신실한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영광의 부활로 나아옵니다. 설령 죽더라도 말입니다. 즉 죽임당하나 부활하고, 눌리지만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메시아께서도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여주셨던 삶의 방식이고, 토라를 이루는 길입니다.


이기는 이는 두번째 죽음으로부터 유죄판결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되는데, 바로 두번째 죽음입니다. 즉 생물학적 몸의 죽음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두번째 죽음이고, 이때 신실한 이를 따르는 삶을 살지 않았던 이들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유죄판결이 선언될 것입니다. 이 '두번째 죽음'에 대한 표현은 계시록 20:4~6으로 연결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는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천사들이 보여주는 상징으로 확장되어 계시록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조에 대한 근거가 됩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8~11

  "그리고 너는 즈뮈르나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첫이자 끝이신, 죽었다 살아나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눌림과 궁핍을 알고 있다, (오히려 네가 지금 풍요롭다는 사실도.) 그리고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말하는 이들로부터 (나온) 험담도 알고 있고,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곧 겪게 될 것을 두려워 말아라. 보라, 곧 디아볼로스가 너희들로부터 (몇몇을) 감시로 집어 던질 것인데, 너희들이 시험받기 위함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열흘의 눌림'을 갖게 될 것이다. 죽음까지 신실한 이가 되어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이기는 이는 두번째 죽음으로부터 유죄판결 받지 않을 것이다.


반응형

'요한계시록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3:1~6  (2) 2016.03.03
요한계시록 2:18~29  (2) 2016.03.02
요한계시록 2:12~17  (4) 2016.02.29
요한계시록 2:1~7  (5) 2016.02.25
요한계시록 1:1~20  (7) 2016.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