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queen - the show must go on
마이클 구그리엘무치, 프레디 머큐리, 필리버스터에 나왔던 박원석 의원. 그 사람 일의 성과와 성(性)문제에서의 이김과는 다른 문제일까? 그리고 <담요>. 이기지 못해서 인(仁)에 실패하고 신을 버린 사람들.


요한계시록 2:1~7

  "너는 에베소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이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이의 오른손에 일곱개의 별을 쥐고서, 일곱 금 촛대 가운데로 거니시며.


  앞에서 보았던 인자의 환상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의 오른손에는 '천사들이', 그리고 그의 발은 '모든' 에클레시아를 거니십니다. 그이는 오늘도 모든 신실한 이의 관계망 안에 이렇게 계십니다.  그이가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에베소 에클레시아에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먼저 구성부터 살펴봅시다. 이후 이어지는 인자의 메시지는 편지 형식이라 볼 수 없는 예언의 형식입니다. "그이가...말씀하십니다"라는 구절에 대해 주석가들은 이 표현 방식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과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즉 요한은 하나님께 받은 예언으로서 2장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예언에 관해서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감싸고 있는 계시록 전체는 '편지'의 구성으로 쓰였습니다. 요한은 "은혜와 평화"라는 편지글 특유의 인사말로 계시록을 시작했고 결론적 권면(22:6~19) - 축복 기도(22:20,21)로 끝나는 전형적인 편지글의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계시록 자체가 인자가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쓰라고 명하셨던 바로 그 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A. 요한에게 예언으로 주어진 말씀은, B. 천사들을 통해 상징으로 확장되고, C. 이 모든 내용이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보내는 편지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각각 주시는 예언의 결론부는 계시록 결말 부분(19~22장)과 맞아 떨어집니다. 그레고리 빌은 인자의 말씀과 계시록 결말 사이의 환상들이 요한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을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저 예언으로 알아듣게 말씀하시면 될텐데, 왜 천사들을 통한 상징으로 그 내용이 확장될 필요가 무엇이었을지를 생각해봅니다.

  먼저 '천사'라는 용어에 대해서 정리를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월터 윙크는 개인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은 '천사'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계속 부정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천상적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는 칼 융이 주장했던 집단 의식의 개념을 끌어옵니다. 따라서 그는 성경의 '천사'라는 말은, "에클레시아의 물리적 외형 안에 존재하고,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또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에클레시아의 내면성", "사람들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집단적 인격이거나, 전체의 느낌"이라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미가엘 천사장이 맡고 있다고 생각했고, 토라는 천사들이 건내 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10장을 보면, 다니엘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준 천사가 자신이 '페르시아 천사장과 싸워야 한다(21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희랍의 천사장도 올 것이라 말해줍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올 것이라는 구절도 있습니다(12:1). 이런 구절들을 보았을 때, 성경은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관된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천사는 '나'라는 개인을 넘어 '우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격이라 생각합니다. 요한은 '우리'라고 부르는 하나의 에클레시아가 공유하는 인격에 편지할 것을 명받았습니다. 따라서 에페소스에 있는 에클레시아는, 이 편지를 '개인'이 아니라 '우리'로서 받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유대인 공동체와 하나되어 살아갔던 자신의 과거를 '나'라고 풀어나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 천사들을 통해 '상징'으로 메시지를 주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징'은 그 성격이 집단적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특정 기호를 보고 합의된 의미를 교환할 수 있어야 상징입니다. (symbol이라는 말은 '함께sym 던지다bollo'라는 의미) 인자는 예언을 주셨고, 그 예언이 천사들을 통해 상징으로 확장됩니다. 그 상징들을 편지로 담아 요한이 모든 에클레시아에 보냅니다. 이러한 방식이 무엇 때문인지는 좀 더 계시록 뒷부분을 연구해나가면서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오늘은 인자가 주시는 예언의 메시지를 들여다 봅시다.
 

  "너의 일들과 수고와 너의 견딤을 내가 안다, 그리고 네가 나쁜 것들을 건내 받아들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자신들이 사도들이라 불리는 이들을 시험해서,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 속이는 자들임을 밝힌 것도 내가 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네 첫 인(仁)을 네가 버렸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생각을 바꿔라, 처음 일들을 행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사도행전 18~20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받자, 그를 고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사람들만의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군중이 원형 경기장에 모여 아르테미스를 연호하기까지 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집단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에페소스 지역에서 에클레시아는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아르테미스를 인정하지 않고 죽임당한 메시아를 선언하며, 서로 차별없이 먹을 것을 나누는 전혀 다른 생활방식을 고집했던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어나갔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속이기 위해서(무엇을 목적으로?) 거짓 사도들도 공동체에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 거짓 사도들을 물리쳤고, 자신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밖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삶이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내부 지향적인 공동체가 되기 쉽습니다. 외부로부터 방어하는 일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담벼락을 두텁게 쌓아올리고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깥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인자는 '너'라는 단수표현으로 지칭되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신'에게 처음 인(仁)을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이 인(仁)이라는 말은 제가 고린도전서 13장 해설 이후, '사랑'대신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남녀 사이의 감정적 교류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류영모 선생을 따라 고전유학의 인(仁) 개념을 가져왔습니다.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두(二) 사람(人) 사이에서 추구해야 할 인간다움'의 뜻으로 쓰고자 합니다. 따라서 '인을 버렸다'는 말은, 내부 지향적 공동체는 참 인간다움이 아니라는 말일테고, 아마도 바깥 사람들을 구제하고 섬기는 일이 끊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참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일은 에클레시아의 존재 목적입니다. 노아시절 이후 끊어진 숨님을 다시 받은 것은, 새로운 인간 창조의 서막이었습니다. 생기(푸쉬케)를 받아 사람이 되었던 아담과 같이, 숨님(프뉴마)을 받아 참 사람 메시아에 참여한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땅에는 없던 온전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부활하는 방식으로 새창조를 개시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다움을 뚜렷이 드러내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피조물이 이 땅에 창조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인(仁)이 중요합니다.(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인(仁)을 통해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에페소스의 에클레시아는,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참 인간다움과 거리가 먼 행동에 익숙해졌는지를 '기억해내야' 합니다.

  '기억'은 중요합니다. 기억이 있어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비인간화('타락'은 '떨어지다'의 의미입니다. 곧 인간성의 추락입니다.)되었는지 알아야,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고쳐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잃어버렸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뜻없는 성실함은 오히려 길을 더욱 잃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인자는 에베소 에클레시아에게 '기억 - 마음 바꿈(회개) - 처음 일 행함'을 요구하십니다. 처음 일이란 아마도,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바깥을 끊임없이 돕고 섬기려는 기이한 삶일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메시아의 왕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서 고난과 견딤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네 촛대를 너의 자리로부터 옮길 것이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틀림없이. 그러나 이것을 네가 가지고 있으니, 니콜라이테스들의 일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그 일들을 싫어하노라.


  요한은 비인간화의 길을 걸었던 그 자리를 기억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실천을 해야한다는 인자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일 메시아의 명령을 거절했을 경우, 촛대가 옮겨집니다. 촛대는 앞에서 스가랴 4장의 인유였고, 숨님의 힘으로 일어선 새 성전, 에클레시아를 가리켰습니다. 촛대가 옮겨진다는 것은, 더이상 에클레시아가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너의 자리로부터'이 '너'는 에페소스 에클레시아의 천사를 가리킵니다. 이를 풀면, 두 사람 이상의 관계 안에서, 메시아를 통해 계시된 인간다움을 추구하지 않을 때, 그 에클레시아는 더이상 에클레시아로서 기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대는 '증언'의 기능을 수행하는 에클레시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이사야 42:6,7)으로 부르셨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말과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이 땅에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부르심과 무관한 삶을 고집했고, 그 결과 '촛대가 옮겨졌습니다'.(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올 기회가 아주 박탈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언액백성의 지위'에 대한 논의는 로마서 9~11장에서 벌어집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숨님 - 인(仁) - 증언'. '인(仁)을 추구하는 것'은 숨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이러한 삶을 사는 이의 말에 힘을 실어줍니다. 즉 증언의 힘은 말 자체에 있지 않고 삶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숨님은 기름으로 표상됩니다. 그 기름은 촛대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 근원적 힘입니다. 그런데 기름을 거절한 삶, 다시 말해 인(仁)으로 살기를 거절한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기름은 없습니다. 그가 증언하나, 그 증언은 금방 꺼질 증언, 메시아가 다시 나타날 그 날까지 타오를 등불이 아닙니다.
  최근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특히, 성(性)문제에 대해서), 사역의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가시적 성과와 개인의 도덕성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연구를 하면서 달라진 생각은, 가시적 성과와 개인의 도덕성이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순결한 도덕성은 성과를 영원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삶이 그 사람의 말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창조적 과업(일)을 영원하게 하는 일은, 자기 자신부터가 똑바로 사는 일입니다. 전자가 열매라면, 후자는 뿌리입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뒤에 나 자신이 실격당하지 않도록,

나는 내 몸을 거칠게 다루고 노예 삼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는 방식만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영원토록 살아있게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에클레시아가 증언하는 방식입니다.

  앞에서 했던 추측들을 다시 모아보면, 에페소스 에클레시아의 '공통 정신'은 내부지향적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 받으면서도 섬기는 메시아 예수의 왕권, 즉 인(仁)을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런 에클레시아에게 인자는, 다시금 인을 실천해서, 에클레시아가 증언하는 그 메시지를 효력있게 하라고 명합니다. 고난으로 기름 맥여, 증언으로 밝게 빛나는 금촛대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촛대를 옮길 것이다'는 미래시제이고, 그 앞에 '가서'는 현재시제입니다. 이 말은 인자가 늘 우리에게 오고 계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의 날, 단 한 번의 재림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오고 계신 메시아이십니다. 즉 에클레시아 한 가운데를 거니시며, 오른손으로 천사를 보내 상징으로 뜻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주님은, 오늘도 에클레시아에게 전진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오고 계신 예수는 에클레시아를 타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타자성이 배제되듯, 그이는 에클레시아에게 지치지 않고 전진하십니다.(그리고 이러한 전진으로 바깥을 향할 것을, 에베소 에클레시아에게 요구하십니다.)

  니콜라테이스(개역성경에서는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다음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의 일을 싫어하고 자신들을 지켜낸 것은 내부지향적 공동체의 장점이자, 분명히 칭찬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인자의 말씀은 예언의 형식을 따라, "귀 있는 자는..."으로 마무리 됩니다. 원고를 쓰면서 Queen의 the show must go on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쇼는 끝이 났고, 그들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쇼는 반드시 끝이 날 것입니다. 저 노래 제목과 달리 말입니다. 그리고 저 노래 제목을 오늘 본문에 적용해서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The symbol must end.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가 등장하는 구약의 본문들을 확인해보면, "귀 갖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내용들이 줄을 잇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모두 이스라엘이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을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6:9,10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예레미야 5:21, 6:9,10


"이 어리석고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다 따내듯이,
적군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샅샅이 뒤져서 끌어 갈 것이다.
그러니 예레미야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2:1~3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반역하는 백성 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 사람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대낮에 짐을 싸 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것처럼, 네가 살고 있는 그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거라. 그들이 반역하는 백성이기는 하지만, 혹시 그것을 보고서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저 위의 이사야 6장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들을 귀 없는 이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10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못 알아듣게 한다'는 예수님이 의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상과 충돌합니다. 그리고 이 충돌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충돌이 예수님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장의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마침내 듣게 되고 깨닫게 될 때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이사야 6:11
그 때에 내가 여쭈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이게 중요하지요. 대체 언제까지 모르게 하실 작정인지 이사야가 물었고, 하나님께서 이제 무엇이라 대답하시는지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주민의 십분의 일이 아직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 죽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지며 온동네에 불이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때까지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마태복음 24장이고, 마가복음 13장이 말하는, A.D.70년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멸망하는 그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헤아릴 수 있는 희망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이 거룩한 씨가 누구일까요? 신천지는 씨를 보면서 말씀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여기서 씨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이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씨이고, 이 땅의 그루터기이신 예수님 부터, 이게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이 보여주었던 상징들의 종착역이 바로 메시아 예수였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는 예언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상징들의 결말인 바로 이 예수를 통해서 들을 수 있게 된 이들이 있습니다. 예언되었던 들을 수 있는 이스라엘, 그들이 바로 에클레시아입니다. 그 에클레시아에게 성령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음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그리고 상징으로 전하는 증언이 마치는 날, 고난과 견딤 속에서 끝까지 메시아께 충성했던 사람들은 생명 나무로부터 먹게 될 것입니다. 이 생명 나무에 대한 진술은 천사들을 통한 상징을 지나, 계시록 21장에 가면 다시 등장합니다.
 
  이김.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 꼿꼿하게 선 사람(ㅣ)이요, 김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연기라면, 이김은 그 '김'과 함께 하는 '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그리고 끝까지 숨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이김'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너는 에페소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이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이의 오른손에 일곱개의 별을 쥐고서, 일곱 금 촛대 가운데로 거니시며.


 "너의 일들과 수고와 너의 견딤을 내가 안다, 그리고 네가 나쁜 것들을 건내 받아들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자신들이 사도들이라 불리는 이들을 시험해서,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 속이는 자들임을 밝힌 것도 내가 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네 첫 인(仁)을 네가 버렸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생각을 바꿔라,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네 촛대를 너의 자리로부터 옮길 것이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틀림없이. 그러나 이것을 네가 가지고 있으니, 니콜라이테스들의 일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그 일들을 싫어하노라.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음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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