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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7~13

"그리고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거룩하고 참인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그이가 열면 아무도 잠글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잠그면 아무도 열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이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거룩'하고 '참'인 이. '거룩'은 '구별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배제를 위해 구별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너희는 속되다" 식의 편가르기로 쓰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전체를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하라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고, 이 구별됨은 우리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라, 타락을 해결하시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로서의 구별입니다.

  '참'은 '알레떼이아'입니다. '망각의 강(레떼)'를 거슬러 건너왔다는 말로, '기억'입니다. 그래서 참, 진실은 곧 기억입니다. 사람은 과거를 볼 수 없고, 자신의 죽음 이후 미래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중간적인 존재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래서 지금 여기만을 살 뿐입니다. 그러한 끼인 존재가 참되기 살 수 있는 기억을 어디로부터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람의 손타고 내려온 모든 것은 왜곡되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참된 기억을 가지고, 참된 미래상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길은, 모든 것을 온전히 아시는 한 분 계심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그이를 신뢰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몰라도, 온전할 수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온전하신 한 분을 따르는 것이, 오늘 내가 겪는 현실의 목적, 이유, 뜻입니다.


  거룩하고 '참인' 이('참된'이 아닙니다. 수동태가 아니기 때문에)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는 1:18에 나왔던 인자 환상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잠그다'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열쇠'라는 의미의 '클레이스'와 '닫다'라는 의미의 '클레이오'는 동족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클레이오'라는 동사를 쓰다가, 확실히 닫을 수 있는 열쇠라는 발명품이 개발되었고, 그래서 그 열쇠를 '클레이스'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열쇠'와 같은 계열의 동사임을 드러내기 위해 '닫다'가 아닌 '잠그다'로 풀어봅니다. 즉 어떤 '문'이 있는데, 그 문은 '다윗의 열쇠'로만 열고 잠글 수 있는데, 그것을 인자가 가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이사야 22:22의 인유입니다.


이사야 22: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둘 것이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어깨'라고 하니 플라톤이 생각납니다. '플라톤'이란 말은 어깨라는 뜻인데, 그는 올림픽을 무려 두 번이나 우승한 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상에도 밝으니, 참으로 건강한 육체, 건강한 정신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22:22 어깨의 주인공은, 엘리아김입니다. 그는 기원전 732년,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유다를 침략했을 때, 유다 왕 히스기야의 수석 행정관이었던 사람입니다. 이사야 22:22는 엘리야김이 유다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대목입니다. 그레고리 빌은 이사야 22장과 메시아 예언으로 유명한 이사야 9장의 연관성을 말합니다.


엘리아김의 어깨에 열쇠가 두어진다

- 이사야22:22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이사야 9:6

엘리아김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이사야 22:21

그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라

- 이사야 9:6

엘리아김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다

- 이사야 22:23

그 정사...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자와

- 이사야 9:7

엘리아김은 하나님의 의해 왕의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 이사야 22:21

오실 메시아도 이와 같을 것이다

- 이사야 9:6,7


  즉 엘리아김은 모실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엘리아김의 열쇠가 언약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권한을 의미했다면, 메시아가 가지고 계신 다윗의 열쇠는, 에클레시아를 다스리시는 권한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한낱 사람이, 메시아의 모형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A.D.1세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하나님, 심지어 신적 존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에게 출애굽을 가져다줄 지도자가 곧 '메시아'였고, 그저 사람에게 쓰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메시아가 죽임당했습니다. 모두가 인간 예수가 하고자 했던 무브먼트가 다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이는 다시 살아났고, 이 부활한 사람의 존재가 '메시아'라는 어휘도 충격적으로 뒤집어 놨습니다. 즉 '혁명 운동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입니다.

  엘리아김은 오실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로 살았고, 오신 메시아는 그 예고를 기이한 방식으로 이루셨습니다. 이 점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오늘 우리 에클레시아 역시 오실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로, 즉 메시아의 모형으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삶이, 그이를 가리키고 있을 때, 오시는 메시아는 우리를 충격적이고 기이한 방식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따라서 '모형론'을 얘기할 때, 이것은 구약 인물들에게만 적용해선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메시아의 형상이요, 온전한 것을 바라는 불완전한 모형들이며, 이 불완전이 온전함으로 역전될 것입니다. 무수한 예고들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려있는 문을 (전부터) 두었고, 그것을 아무도 잠글 수 없다. 왜냐하면 네가 작은 힘을 가졌고, 나의 로고스를 지켰고, 나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쇠에 이어 '문'이 등장했습니다. 이 문은 다윗의 열쇠로만 열고 잠글 수 있는 문인데, 지금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 앞에 열려 있습니다. 만일 이 '문'이라는 어휘를 요한도 바울과 같은 용례로 쓴 것이라면, 이 '문'은 곧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6:9

나는 오순절까지 에페소스에 머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크고 활기찬 문이 내게 열렸기 때문인데, 반대하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는 "작은 힘을 가졌고"라는 표현을 보아, 소규모 공동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에 나왔던 에페소스 에클레시아와,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와는 달리, 이들은 로고스(말씀)를 지켰고('들었고'가 아닙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지역 안에서도 메시아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촛대답게 빛을 밝혔고, 그 작은 공동체를 통해서 '증언'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증언의 기능을 잃어버리지 않은 에클레시아를 통해, 새 창조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은 사람의 '가온'에 창조되는 문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신실함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신실한 이들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증언, 열린 문, 새 창조, 신실한 사람들, 에클레시아. 이것을 이루는 데 있어서 공동체의 규모는 부차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라, 내가 주리라,

사탄의 회당으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말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거짓되다.)


보라, 내가 그들을 창조하리라,

  그들이 와서 내 두발 앞에서 경배하도록,

  그리고 내가 네게 어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왜냐하면 나의 견딤의 로고스를 네가 지켰기 때문이고,

              나 역시 너를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세계 전체에 와서, 땅 위에 사는 이들을 시험할 '시험의 때'로부터


  두 개의 '보라'가 나옵니다. '보라'라고 번역해도 되고, '자,' 라고 해도 됩니다. 주위환기의 목적이 있는 말입니다. 먼저는 사탄의 회당으로부터(에클레시아를 훼방하려는 유대인 무리들은 이미 앞에서 살펴봤습니다.) 무언가를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다'의 목적어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몇"이라는 말을 추가했습니다. 유대인들 중 몇 사람이 돌아올 것을 말씀했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ESV는 give가 아닌 will make를 사용했는데, 뒤에 나오는 동사에는 그렇지만, 앞에 있는 동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없는 말을 더 넣을 수도 없고, 있는 말을 뺄 수도 없어서 일단은 "주리라"만 남겨두고 두 번째 '보라'로 넘어가겠습니다.


  인자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무리들'을 창조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포이에오'라는 동사를 쓰는데, 이는 '하다'도 되지만, 하나님이 주어인 경우, '창조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앞에서 '문'을 새창조의 문으로 읽은 것은, 뒤에 있는 포이에오 때문입니다.

  소규모 공동체라도, 로고스를 지키고 메시아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으면, 그 에클레시아는 증언의 기능을 충실히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서, 인자는 필라델피아 지역에 새 창조의 문이 열어 두셨습니다. 사탄의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 문입니다. 그들 자신이 새창조를 겪습니다. 그들은 돌아와 인자의 발 앞에 경배하고, 그가 에클레시아의 천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가 다시 한 번 언급되는데, 바로 '인자의 견딤의 말씀(로고스)을 에클레시아가 지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와서 내 두발 앞에서 경배하도록"은 이사야의 인유입니다.


이사야 45:14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이집트가 수고하여 얻은 재물과 에티오피아가 장사하여 얻은 이익이 너에게로 넘어오고, 키 큰 스바 사람들이 너에게로 건너와서 네 밑으로 들어와 너를 따를 것이며, 사슬에 매여 와서 네 앞에 엎드리고, 너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이르기를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할 것이다."


이사야 49:23

왕들이 네 아버지처럼 될 것이며, 왕비들이 네 어머니처럼 될 것이다.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엎드릴 것이며, 네 발의 먼지를 닦아 줄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내가 주인 줄을 알 것이다. 나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이사야 60:14 

너를 괴롭히던 자들의 자손이 몸을 굽히고 너에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자들이 모두 너의 발 아래에 엎드려서, 너를 '주님의 도성'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 이라고 부를 것이다.


  오늘 서두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거룩'은 전체를 위해 구별됨이기 때문에, 에클레시아가 온전한 구별됨으로 살아가면, 그들을 통해 전체에 속한 이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는 토라를 잘 지키면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로 돌아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해있습니다. 여기서 "토라를 지킨다"는 말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복음 믿음'을 '토라 지킴'의 반댓말처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라는 버릴 것이 아니라 이룰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를 발라 출애굽 한 뒤 50일째되는 첫번째 오순절날, 그들은 토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마가의 넓은 다락방에서 최초의 에클레시아는 숨님(성령)을 받았습니다. '토라를 숨님으로 이룬다.' 이것이 토라를 이루는 방법이요, 에클레시아가 해야할 바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킴'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토라를 지키는 삶이 이 땅에 현존할 때, 그것을 배우기 위해 모든 민족이 주께 나아옵니다.


  사탄의 회당과의 싸움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누가 참 이스라엘(유대인)이냐?'가 지금 관건입니다. 지금 소아시아 지역에는 서로 유대인이라 주장하는, 두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공동체를 지혜의 왕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탄의 회당은 숨(삶, 생명) 없는 무언가를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숨으로 그 토라를 이룸으로써 사탄의 회당에 맞섭니다. 누가 진짜입니까? 오직 참 이스라엘은 숨 쉼으로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얼마 전 '고린도전서 연구'할 때도 바울이 같은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예언'에 대해서 말하던 바울이, 에클레시아가 모였을 때, 개인적인 방언에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한다면, 참으로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대목입니다.(고린도전서 14:20~25 풀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바울도 요한도 같은 예언, 같은 미래상을 붙잡고서 힘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3:4의 인유도 나옵니다.


이사야 43: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고린도전서 13장부터, 사랑을 '인(仁)'으로 고쳐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이 참 흔한데, 저는 이 말이 우상숭배를 의미하는데도 참 용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어느 대상에게 참여하고 있으면, 그것을 모조리 '사랑'이라 말하는 현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할 수 있는 말을 찾다가, 다석 선생을 따라 고전 유교의 '인(仁)'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은 정의하기 어려운 말입니다만,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다'는 뜻도 있고,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이뤄야할 인간다움'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에클레시아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말을 지키고 받은 이름에 걸맞게 살고자 하는(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와는 달리) 작은 에클레시아를 사랑하십니다. 어질게 대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에 매마른 현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질게 대하시는 기이한 사람들을 통해, 참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에클레시아 본래의 기능입니다. '본래'라는 말을 넣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날 에클레시아들도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주께서 남은 자들을 두셨을 것입니다. 숨겨있고, 소규모이지만, 신(信)과 인(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러한 관계망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


  인자는 지키려는 이를 지키십니다. '창조세계 전체에 와서, 땅 위에 사는 이들을 시험할 시험으로부터' 말입니다. 여기서 "땅 위에 사는 이들"은 에클레시아 바깥의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험 받습니다. 그 시험은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벌어집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간의 모든 차원에서 끊임없이 이 시험 문제가 출제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그러나 매번 같은 문제가 출제되지만, 창조세계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역사라는 두꺼운 오답노트만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에클레시아는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다를 수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make difference). 그들에 맞이한 분은 올바른 분이 아니라, 올(디카이오쉬네) 그 자체이십니다.


내가 속히 온다. 네가 가진 것을 붙들고 힘내라, 아무도 네 면류관을 취하지 못하도록. 이기는 이는 내가 내 하나님 성전 안에 있는 기둥으로 삼을 것이고, 그는 여전히 머물러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 위에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 도시, 즉 새로운 예루살렘의 이름을 쓸 것이다, 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고 나의 새로운 이름도.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속히 온다'고 대충 말씀해놓고서, 2000년이 지나도록 안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이는 언제나 오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가 하늘로 한 번 가심은 그이가 늘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재림'은 그의 늘 오심이 눈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안 오셨다가 오시는 게 아니라.)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에게 말씀하셨듯, "붙잡고 힘내라(카르테오)"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붙들고 힘내려면, 가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가진 것 귀한 줄 모르고 다 내다 버리면 붙들 것도 없습니다. 에서가 나중에 가진 것이 없어서 눈물로 상황을 바꿔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듯 말입니다.


  요즘 '스테판 커리'라는 농구선수가 NBA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데, 이 '스테판'이라는 말의 뜻이 면류관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과 같은 이름입니다. 여자 이름인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이름이 스테판은 아니지만, 저 역시 스테판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오롯이 제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도 빼앗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것을 붙들고 힘내야 합니다. 돈이나 재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격입니다. 인격의 온전한 것,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나의 바탈을 붙들고서 힘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험의 때에 내 면류관을 안 빼앗기는 방법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을 이룹니다. 에스겔은 열 두지파에게 약속의 땅이 분배되는 예언을 하고서 그들이 살게 될 도시의 이름을 이렇게 말합니다.


에스겔 48:35

이렇게 그 둘레가 만 팔천 자이다.

이 도시의 이름이 이제부터는 '여호와샤마'라고 불릴 것이다." 


  여호와 샤먀. 이 말은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임마누엘'입니다.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계속 '이기는 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왔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진 메시지 안에서 이기는 자는 곧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기둥. 이 기둥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성전이 된 이이는, 이제는 결코 성전 밖으로 쫓겨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됩니다. 그와 분리되는 경험은 현시대로 족합니다.


  열쇠, 문, 성전. 어쩌면 처음부터 요한은 거대한 건축물을 처음부터 생각하고서 오늘 본문을 구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은 그 건물의 이름을 다음의 삼중표현으로 말합니다.


내 하나님의 이름

내 하나님의 도시(즉 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새로운 예루살렘)

그리고 나의 새로운 이름.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는 이 안으로 들어왔고, 지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안에서부터 부르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사탄의 회당에서조차도 이 사람들에게 이끌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 이 건물의 문이 잠기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갑자가 구절이 떠올랐는데,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말을 지키고,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증언에 최선을 다했는지 저 자신에게부터 묻습니다. 강요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현시대를 지배하고, 또 강요를 통해선 될 일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강요할 일은 있습니다. 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52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고린도전서 9:26,27

나는 허공을 치는 사람처럼 권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뒤에 나 자신이 실격당하지 않도록,

나는 내 몸을 거칠게 다루고 노예 삼습니다.



요한계시록 3:7~13


  "그리고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거룩하고 참인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그이가 열면 아무도 잠글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잠그면 아무도 열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이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려있는 문을 (전부터) 두었고, 그것을 아무도 잠글 수 없다. 왜냐하면 네가 작은 힘을 가졌고, 나의 로고스를 지켰고, 나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주리라, 사탄의 회당으로부터.(그들은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말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거짓되다.) 보라, 내가 그들을 창조하리라, 그들이 와서 내 두발 앞에서 경배하도록, 그리고 내가 네게 어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왜냐하면 나의 견딤의 로고스를 네가 지켰기 때문이고, 나 역시 너를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창조세계 전체에 와서, 땅 위에 사는 이들을 시험할 '시험의 때'로부터.

  내가 속히 온다. 네가 가진 것을 붙들고 힘내라, 아무도 네 면류관을 취하지 못하도록. 이기는 이는 내가 내 하나님 성전 안에 있는 기둥으로 삼을 것이고, 그는 여전히 머물러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 위에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 도시, 즉 새로운 예루살렘의 이름을 쓸 것이다, 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고 나의 새로운 이름도.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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