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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1~6

  "그리고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숨들과 일곱 별들을 가지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사르데이스는 고대 뤼디아의 수도입니다. 예전에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을 때, 몇 차례나 '사르데이스'라는 지명을 보면서도,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인줄도 모르고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역사> 1권 84장을 보면, 페르시아의 퀴로스에 의해 사르데이스가 어찌 함락되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르데이스는 지형이 가파른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 성벽을 오를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휘로이아데스라는 사람이, 뤼디아 군인 하나가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투구를 주우러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기억해두었다가 그 쪽으로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이 잇다라 올라갔고 도시 전체를 함락할 수 있었습니다. 몰라 찾아온 한 사람 때문에 도시 전체에 큰 일이 벌어지고서 600년이 지났고, 그 도시 위에 에클레시아가 세워졌습니다.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즉 너는 지금 '살아있다'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로 너는 죽었다. 깨 있어라! 그리고 곧 죽을 상태였던 남은 것들을 곧게 세워라! 내가 알고 있던 바, 너의 일들은 나의 하나님 앞에서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기억하라, 네가 어찌 받았고 들었는지, 그리고 지켜라! 생각을 고쳐 먹어라! 만일 네가 깨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갈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너에게 어느 순간에 갈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그 불리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부름받은 사람들'이란 뜻입니다(엨 : from, 클레시스 : 부름). 그들을 부르신 분은 죽음에서 일어나신 새창조의 주님이시니, '그이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참말로 살았습니다. 에클레시아는 그 주님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그는 '산 이' 입니다.(계시록 1:18)


  그러나 산 이의 이름을 받은 그들은 그 이름과 같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산 사람의 삶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 구실 못한다는 뜻입니다. 죽음보다 큰 것이라곤 모르는 사람마냥, 자신의 몸을 습관적으로 무의미에 내던져 버리고, 그러면서도 생존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며, 강한 자들을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죽은 삶은, 에페소스 에클레시아와 평행 관계를 이룹니다. 이 두 에클레시아는 이렇게 가다간, 결국 '증언'의 힘을 잃어버릴 것이고, 촛대가 옮겨질 위기에 있습니다.

  인자는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 "깨 있으라" 명령합니다. '그레고레우오(깨다)'라는 동사는 '에게이로(일어나다)'에서 왔습니다. 즉 주저 앉아서 에클레시아 구실 못하는 사르데이스 공동체에게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곧 죽을 상태였던 남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새번역에서는 '남아 있는 사람들'로 번역했지만, 이는 중성명사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일으켜 세워야 할 무언가일 것이고, 그것은 '살아계신 분의 이름'과 관련있는 무언가일 것입니다.

  "가득 찼다"라는 말은 '완성하다', '이루다'라는 의미도 됩니다. 아마도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이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산 것이 죽은 것 되고, 일으켜 세워야할 만큼 정신적 가사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12~15a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사르데이스가 페르시아에게 함락당하던 때를 생각합니다. 굳건한 요새는 굳건하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고, 도둑처럼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페르시아군은 그 결점으로 파고들어 사르데이스를 멸망시켰습니다.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가 생각을 바꾸어(회개), 일어나 굳건히 서지 않으면, 우주를 다스리시는 인자를 적(敵)으로서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이뤘다는 착각을 어서 던져버려야 합니다. 낚시줄을 자를 기세로 붙잡고서 놓을 줄 모르는 꽃게는 완고함을 버려야만 끓는 물을 면할 수 있습니다.


  인자가 도둑처럼, 알지 못하는 때에 올거라 말씀하십니다. 마치 사르데이스 요새의 결점을 보고 있는 휘로이아데스처럼, 인자는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의 죄를 아십니다. 그가 오신다는 말이 꼭 최후의 심판만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인자는 언제든 오실 수 있고, 그가 오셔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에클레시아의 빛나는 이름에 걸맞지 않으므로, 더 이상 촛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말입니다.


  하지만 사르데이스에서 몇몇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옷은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빛 안에서 나와 함께 거닐 것이다, 지금도 그럴 자격있는 자들이다. 이처럼 이기는 이는 빛나는 옷을 입을 것이고, 나는 '삶의 책'으로부터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나의 아빠 앞에서, 그리고 그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인정할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그러나 나무가지가 잘려나가는 현재적 심판 속에서도 하늘에 계신 분은 언제나 남은 이들을 남겨주십니다. 남은 이들은 언제나 역전의 실마리입니다.(그리고 '역전의 실마리가 되는 남은 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인격이 망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속에 무언가 남아서 참을 그리워하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법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앞에서 "곧 죽을 상태였던 남은 것들"이란, 역전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속알의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은 자들의 옷은 더럽혀지지 않았고, 그들은 빛 안에서 인자와 함께 거닐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이라는 말은, "이기는 이"의 의미를 풍성하게 합니다. 지금 자신이 입은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이"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입은 옷을 더럽히지 않으면, 인자는 그에게 빛나는 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본성에 속한 몸을 심으면, 숨에 속한 몸을 받는다(고린도전서 15:44)"는 바울의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더럽히다"라는 말은 계시록 뒷 부분에서 천사들을 통한 상징으로 다시금 언급되는데(14:4), 포르네이아와 관련됩니다. 작게는 성적인 범죄고, 넓게는 우상숭배, 즉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앎과 그 앎으로 인한 왜곡된 삶을 뜻합니다. 14장 가서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생명책"에서 '생명'은 '조에'라는 단어를 씁니다. '생명'은 다른 게 아니라 '삶'입니다. '생명책'에서 '생명'이란, '오는시대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삶의 책"은 출애굽기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2:31~34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자신들을 떠나 시내산으로 올라가자,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지도자 없이 광야 한 복판에 남겨지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통해서 안정을 얻고자 한게 아닌가 합니다. 금송아지를 출애굽의 하나님이라며 절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안정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인간성은 내팽겨쳤습니다. 피조물을 다스릴 존재로 세우신 사람이, 피조물을 경배하고 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망각한 것입니다. 사람 구실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은화 30개와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일입니다.

  모세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책'이 언급됩니다.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때'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천사가 언급됩니다. (이 천사는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천사일 것입니다.)

다니엘 12:1~4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오는시대의) 생명(삶)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러나 너 다니엘아, 너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씀을 은밀히 간직하고,
이 책을 봉하여 두어라. 많은 사람이 이러한 지식을 얻으려고 왔다갔다 할 것이다."


  '그 책'은 다니엘서에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책은 다시금 천사와 함께 언급됩니다. 어려운 때가 오는데, 그 어려운 때에 책에 기록된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함'이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 편안한 삶을 산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피하게 된 백성'이 '책에 기록된 백성'인데, 이 사람들은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깨어나 오는시대에서 살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계시록 본문으로 돌아오면,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저 '피함'이 무슨 의미인지 뚜렷해집니다. 저 '피함'이 '이김'입니다. 비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입고 있는 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옷이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본성에 속한 몸'이라면, 육체적 본성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오는시대의 삶이고, '오는시대의 삶'을 누릴 이들의 삶입니다. 깬 사람들이고,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그들은 자신이 받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사람이고, 주저 앉아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성이 망가지는 어려움을 '피하지 못한 사람'. 오는시대로 들어오지 못하고 현시대를 고집하기에 생명책에 지워질지도 모르는 위기의 사람입니다.
  그럼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자께서 "일어나 서라"로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을 고쳐 먹어(메타노이온)"라고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 "죄를 물으시는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죽음은 인간에게 타락 이후 두 번째 기회를 주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찾아온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 때를 붙잡아 힘을 내야 합니다. 인간성을 일으켜 세우고, 우리가 듣고 받았던 그 이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아직 '참'을 향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역전의 실마리 삼아, 우리의 삶 전체를 개혁해야합니다. 그래야만, 인자께서 하늘 아빠와 천사들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인정하다"라는 말은 '호모로기오'라는 동사를 씁니다. '같이 말하다'입니다. 우리는 인자의 이름을, 인자는 우리의 이름을 함께 말하게 될 것입니다.  들을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으십시오. 그렇군요. '들을 귀'. 이것이 우리에게 남은, 우리의 인격을 뒤집을 역전의 실마리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3:1~6

  "그리고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숨들과 일곱 별들을 가지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즉 너는 지금 '살아있다'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로 너는 죽었다. 깨 있어라! 그리고 곧 죽을 상태였던 남은 것들을 곧게 세워라! 내가 알고 있던 바, 너의 일들은 나의 하나님 앞에서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기억하라, 네가 어찌 받았고 들었는지, 그리고 지켜라! 생각을 고쳐 먹어라! 만일 네가 깨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갈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너에게 어느 순간에 갈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르데이스에서 몇몇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옷은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빛 안에서 나와 함께 거닐 것이다, 지금도 그럴 자격있는 자들이다. 이처럼 이기는 이는 빛나는 옷을 입을 것이고, 나는 '삶의 책'으로부터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나의 아빠 앞에서, 그리고 그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인정할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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