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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2~17

"그리고 너는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날카로운 양날검을 가지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시 1장에서 묘사된 인자를 만납니다. 1장에서 다채롭게 묘사된 내용들은 각각의 에클레시아에게 적용되는 세부내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구약의 상징들이 집약된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당황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상징들이 각각 에클레시아들의 상황과 필요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리라'라는 말씀을 들은 에페소스 에클레시아에게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는 분으로 오셨고, '디아볼로스의 열흘간 시험'에서 견디라 말씀하신 즈뮈르나 에클레시아에는 죽었다가 사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에는 날카로운 양날검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날카로운 양날검'은 메시아의 입에서 나옵니다. 즉 '상황을 분명히 판단(심판)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의 양쪽이 날카롭게 갈립니다.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는 1) 어떠한 사태를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 인자는 2) 인자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그 사태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을 촉구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민수기 22~24장에 등장합니다. 가나안으로 진격해오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했던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발람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사태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보는 것은, 발람의 번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라는대로 말하지만, 발람은 경제적 유혹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그는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만들어준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지만, 이스라엘에 모압 여자들을 보내어 성적 범죄를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의 마지막은 칼에 찔려 죽임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1) 상황과 2) 말씀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말씀으로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1) 상황

-긍정적인 상황


  "나는 알고 있다, 어디에 너희가 살고 있는지를(그 곳에 사탄의 왕좌가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이름을 붙잡아 힘냈다는 사실과, 나의 신실한, 나의 증인 안테이파스의 날에(그는 사탄이 살고 있는 곳에서, 너희 곁에서 죽임당했다), 나의 신실함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자는 자신이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페르가모스는 로마의 수많은 식민지 중에서도,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을 최초로 건설한 도시입니다. 그들은 그 신전을 '아데미 신전'이라 불렀습니다.('아데미' 숭배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9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설은 여기) 게다가 페르가모스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치료의 신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구급차에 그려진 구부러진 뱀 그림이 아스클레피오스를 가리킵니다.(저는 한동안 그것이 놋뱀 그림인줄 알고 살았습니다만. 아스클레피오스는 요한복음의 베데쓰다 연못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해당 본문의 해설은 여기) 이 뱀이 대표하시는 도시(성경에서 뱀은 타락 이야기의 '옛 뱀', 사탄을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의 신전들이 페르가모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인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사탄의 왕좌가 있다."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상황은 처참하기만 합니다. 다신교이면서도, 황제 숭배를 구심점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 안에서, 황제가 아닌 메시아를, 다신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는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과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맞고, 네 생각도 맞다는 말을 쉽게 하는 오늘날은 분명 사상의 다신교적 상황입니다. 다양성을 지켜나가는 것은 중요한 가치입니다만, 무엇을 구심점으로 갖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다양성'이라고 해서 기준이 없지 않습니다. 다양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포섭하기 위한 거대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마치 모든 로마 식민지가 황제 숭배의 그늘 아래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숭배가 인정될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제가 아닌 성령을 중심으로, 다양한 신들이 아닌 죽임당한 인자를 따르는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려는(심지어 여자와 노예라 할지라도) 공동체의 고달픔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자는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이러한 상황을 알고 계시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인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페르가모 에클레시아가 인자의 이름을 '붙잡아 힘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카르테오'라는 동사를 잘 번역해야겠습니다. 기본적인 의미는 '붙잡다'인데, 그저 붙잡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붙잡고서  그 붙잡은 것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카르테오입니다. 그래서 '붙잡아 힘냈다'라고 번역했지만 성에 차지 않습니다. 암행어사의 마패를 생각해봅니다. 마패를 단단히 붙들었다는 말은, 그저 손의 악력을 뜻하는 말이 아닌, 암행어사로서 권리행사의 의미합니다. 즉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는 인자의 이름을 마패처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으로 권리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신교이면서도 메시아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는 그 페르가모스에서 말입니다. 이 '권리 행사'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에베소 에클레시아에 대해 풀이했을 때 같은 말을 했습니다. "메시아의 왕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서 고난과 견딤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붙잡아 힘냈다'는 말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페르가모 에클레시아의 일원 중 하나가 죽임당했습니다. 그가 죽임당한 구체적 정황을 그려낼 순 없지만,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신신한 증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즈뮈르나 에클레시아에게 인자가 요구하신 것은 "죽음까지 충성할 것"이었습니다. 이 충성의 본보기가 바로 다음 단락에서 언급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치열했던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삶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는 그들이 잘해왔던 것에 대해서 언급하신 이후, 그들의 문제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라면, 순교자를 배출한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무언가 잘못을 얘기가하기가 대단히 꺼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지, 더 잘할 필요가 있을까' 하기 쉽지 않을까요? 그러나 인자의 입에서 양날의 검이 나옵니다. 잘한 것은 잘 한 것이지만, 못한 것은 못한 것입니다. 잘 한 것이 못한 것을 상쇄할 수 없습니다. 완전을 향해 가는 에클레시아는 모든 면에서 온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상황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너희가 발람의 가르침을 붙잡아 힘냈다는 사실이다(그는 발락에게 이스라엘 아들들 앞에서 덫을 던지라고 가르쳤고, 그림자 숭배를 말했고, 포르네이아를 저질렀던 자다). 이렇듯 네가 니콜라이테스들의 가르침을 붙잡는 일(사람)들을 가졌다.


  그들은 그릇된 것을 붙잡아 힘냈습니다(카르테오). 인자는 그것을 '발람의 가르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당시 만연했던 이교 문화의 일부를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순히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비인간화로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쓰인 고기가 시장에 나오더라도, 그것을 먹는데 거리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신경써야 할 것은, 아직 옳고 그림의 기준이 분명히 서지 못한 지체들뿐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희랍어가 보여주는 뜻 그대로 실체가 없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인간이 갖는 두려움의 투영'이라 말한다면, 그림자와 같은 우상에게는 적실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그림자 숭배가 벌어지는 신전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히 금했습니다. 의미가 중요합니다. 종교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은 내가 그 제의를 통해 숭배의 대상의 일부임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메시아의 사람들은 그림자의 일부가 아니라, 새로운 실존(우시아)의 일부입니다.
  종교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가르침을 따르느냐 역시 참여(코이노니아)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민수기에서 발락은 발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상(象)'입니다. '발람'이라는 말은 이후 경제적 요구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그릇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림자를 숭배하는 무의미한 성행위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발람의 가르침'입니다. '포르네이아'라는 말은, 결혼관계를 벗어난 성관계를 가리키는 말이고('포르노'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당시 성관계는 그림자 숭배 제의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에클레시아 안에 들어와서, 이교 신전에서 사제와 성관계를 가져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가르쳤고, 페르가모 에클레시아의 일부는 그런 가르침을 내치지 못하고 따라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니콜라이테스들의 가르침'도 발람의 가르침과 비슷한 류일 것입니다. 니콜라이테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아직 학자들 간에 합의된 의견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6:5에 나오는 '니골라'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지만,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니코'는 승리라는 뜻입니다.(그래서 '니코데모'는 '민중의 승리'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라이테스'라는 말도 '라오스'에서 온 '백성', '민중'이란 의미이니, 분파주의를 내비취는 말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니면, '라오스'는 이스라엘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를 염원하는 혈통적 유대인 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즈뮈르나 에클레시아에 찾아왔던 그들!)


2) 말씀


마음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전쟁을 치를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이기는 이에게 내가 감춰진 만나, 즉 빛나는 흰돌을 줄 것인데,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받은 자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름이.


  인자는 그들의 상황을 아십니다. 그들의 잘 한 것도 아시고, 잘못하고 있는 것도 아십니다. 그이는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즉 생각을 바꾸어, 실천에 이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금 양날검이 등장합니다. 만일 마음을 바꾸어 잘못하고 있는 것을 고치지 않으면, 메시아와 맞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메시아와 전쟁을 치루게 되는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게 주어지는 예언의 형식을 따라, 숨님에 대한 진술과, 이기는 자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감춰진 만나'가 주어집니다.


민수기 11: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발람 이야기가 나오는 민수기는 만나에 대한 내용도 노옵니다. 거기서 만나를 진주와 같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춰진 만나가 빛나는 흰돌과 연결됩니다.(그래서 둘로 나누지 않고 "감춰진 만나, 즉 빛나는 흰돌"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흰돌을 지나 이름에 이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름입니다. 감추인 만나(흰 돌)을 얻은 이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이가 받는 이름'은 이기는 이에 대한 앞에서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계시록 말미와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짐승의 이름표를 받는 14:11과 대조되는 이 이름에 관한 내용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62:2
이방 나라들이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즉 이기는 이가 받을 그 이름은, 하나님께 받은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 이름이 최종적으로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65:13~15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보아라, 내 종들은 먹겠지만, 너희는 굶을 것이다.
보아라, 내 종들은 마시겠지만, 너희는 목이 마를 것이다.
보아라, 내 종들은 기뻐하겠지만,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보아라, 내 종들은 마음이 즐거워 노래를 부르겠지만,
너희는 마음이 아파 울부짖으며, 속이 상하여 통곡할 것이다.
너희의 이름은, 내가 택한 백성이 저주할 거리로 남을 것이다."

내 주 하나님께서 너희를 죽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님의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실 것이다.


  이 이사야의 내용이,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상황을 꿰뚫습니다. 날카로운 판단 속에 현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누군가는 먹지만, 누군가는 굶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이 땅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감추인 만나를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에클레시아의 새로운 정체성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림자를 쫓다가 끝내 삶을 마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예언이 지금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현실입니다. 좌우의 날선 주의 말씀이 분명히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 이름이 감추어졌다는 것이 마치 부부간에 이뤄지는 성(性)과도 같습니다.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이교 신전에서의 포르네이아와는 달리, 인자와의 은밀한 관계 속에서 에클레시아는 에클레시아다워집니다.

  주께서 에클레시아에게 주신 이름에 대해서는 3장에서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2:12~17

"그리고 너는 페르가모스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날카로운 양날검을 가지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고 있다, 어디에 너희가 살고 있는지를(그 곳에 사탄의 왕좌가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이름을 붙잡아 힘냈다는 사실과, 나의 신실한, 나의 증인 안테이파스의 날에(그는 사탄이 살고 있는 곳에서, 너희 곁에서 죽임당했다), 나의 신실함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너희가 발람의 가르침을 붙잡아 힘냈다는 사실이다(그는 발락에게 이스라엘 아들들 앞에서 덫을 던지라고 가르쳤고, 그림자 숭배를 말했고, 포르네이아를 저질렀던 자다). 이렇듯 네가 니콜라이테스들의 가르침을 붙잡는 일(사람)들을 가졌다. 마음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전쟁을 치를 것이다.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이기는 이에게 내가 감춰진 만나, 즉 빛나는 흰돌을 줄 것인데,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받은 자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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