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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의 얼개

A. 11:1~10 "남은 자"

  B. 11:11,12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의 풍성함

    C. 11:13~15 중심 : 사도직분, 몇이라도, 부활

  B'. 11:16~24 첫 곡식, 감람나무 비유

A' 11:25~32 a.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5~27)

                       b. 모든 사람을 위한 불순종과 긍휼(28~32)


B. 11:11,12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의 풍성함

로마서 11:11~32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 완전히 고꾸라졌습니까? 일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의 비뚤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에 이르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옆에서 그 구원을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스라엘의 비뚤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피폐함이 이방의 풍성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이 돌아왔을 때)의 풍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9장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라는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자신들의 살몸을 따라 메시아가 나셨는데, 그들은 토라를 붙잡았으면서도, 그 토라의 결말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파라오를 닮은 완악함이고, 하나님은 오늘도 이 파라오들을 향해 손을 내미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는 처참한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 때문에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짐이 완전히 고꾸라짐입니까? 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입니까? 일 없습니다! 그 분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완고함은,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완고함은, 2)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게 하고, 3)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질투하게 되며, 4) 마침내 (바울은 이것을 상상해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마저도 신실함의 새로운 맥락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풍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상상도 못할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을 바울은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저주의 메시지로만 들리던 '하나님의 질투'가, 이방인들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금 그 질투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안으로 들어오게 할 것이라고 누가 기대했겠습니까? 바울이 로마서 10:19에서 인용했던 이사야서의 구절은, 사실 이러한 의미였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백성 아닌 자 곁에서 질투나게 하며,
내가 너희를 어리석은 백성 곁에서 성내게 하리라.


  본문에 새롭게 도입된 주제는 '풍성함'입니다. 이 풍성함은 오직 신실함의 한 길로 얻어지는 "남은 자들의 풍성함" 입니다. 그 한 길을 따라 모든 민족들이 하나의 연대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 민족들 가운데는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인용하기를, 복음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적고, 예언자는 폭력과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고, 눈이 어두워지고, 등이 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용들이 갖는 반전의 결말이 곧 풍성함입니다. 상황은 시궁창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지고 씨 뿌리는 농부는 신실하게 일했고, 마침내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남은 자들의 완전한 수가 차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들이 모두 자라나 영글었습니다. 이것이 풍성함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이 풍성함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넘어짐'을 주목해야 합니다. 5:20을 다시 인용합니다.


로마서 5:20

토라가 (현시대에) 깊고도 넓게 들어온 것은 '잘못된 걸음'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비뚤어짐이 넘쳤던 그 곳에 하나님의 거저주심이 넘쳤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잘못된 걸음'은 '토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넘치게' 되었고, 그 잘못된 걸음이 그저 저주의 상황이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거저주심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 5:20의 시각으로, 이스라엘의 상황을 들여다본 것이 11장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통해 하나님이 풍성함을 이루십니다. 즉 그들의 '넘어짐'이 풍성함의 '넘침'이 되었습니다.


C. 11:13~15 중심 : 사도직분, 몇이라도, 부활

  내가 이방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의 사도인 만큼, 이 직무가 하나님을 나에게 뚜렷이 드러냅니다. (내가 할 일은) 어떻게든 나의 살몸이 옆에서 질투하게 해서 이스라엘 중에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거절함이 세상의 평화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에게 나아가 손내미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의 1차 독자들에게 말합니다. 바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이면적 유대인'이라 불렀던, 거룩한 숨결이 마음에 부어져,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새 길을 걷기 시작한, 기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 삶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새로운 삶이 이스라엘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B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기뻐하시는 것은,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기이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더불어 이것은 바울은 그들에게 '반유대주의'를 경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즉 유대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버림받았다고 판단하고서, 또다른 분열을 만들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금 비뚤어짐의 노예가 되는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분열을 조장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반유대주의를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중해 지역의 회당들을 찾아다니며, 줄기차게 이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폭력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남은 자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 중 누군가가 신실함으로 반응하여, 성령의 성전되기를 갈망하며 말입니다. 이것을 바울의 편지를 받아들고 있는 이방인 독자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절했기 때문에, 세상에 없던 평화를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로마서 7장을 떠올리게 하는데, 비뚤어짐이 이스라엘 안에서 그 끔찍함을 최고치로 드러냈고, 시온의 메시아는 십자가 죽으심으로 아담성을 단번에 처리하셨습니다. 이 일에서 이스라엘은 비극적이게도 파라오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거절을 통해 이뤄진 십자가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절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절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완고하게 되었고, 그 완고함이 십자가 사건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마치 파라오의 완고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한 비뚤어짐에 대한 유죄판결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거절함으로 새로이 된 이 사람들이, "아름다운 발" 되어, 이스라엘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독특하게도 이스라엘을 "나의 살몸"이라 표현합니다. 이것은 7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몸은 이 비뚤어짐에 종노릇하는 비참한 인간성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것을 드러낸 것은 토라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 자신의 살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로마서 7장에서 논증한 비뚤어진 인간성은 자신의 살몸이자, 곧 살몸을 따라 동류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를 통해서 이 살몸에 복음이 전해진다면? 그래서 그 살몸들이 신실함으로 돌아온게 된다면? 그것은 죽을 살몸이 복음으로 인해 부활한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거절함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은혜와 평화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곧 부활입니다. 이제 어린양의 수혜자들이, 이제 파라오들에게 나아가 진정한 왕의 소식을 전하고, 파라오들은 새사람이 되어 주께 돌아옵니다.


  이것이 부정한 신부를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자신을 거절한 비뚤어진 살몸에게 자신의 말과 숨을 전하십니다, 자신을 배신했던 이의 온전함을 바라며! 바울은 이 일을 위해서 이방인들이 자신과 같은 심정으로 함께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질투하게 만드는 것"은, 탕자에게 누군가가 풍요로운 아버지 집에 대한 소식을 전해서, 탕자로 하여금 집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그리고 먼저 예수를 받아들인 '큰 형'은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아직도 본남편이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신실함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의 결말에는 자신을 지금 죽이려 하는 원수들의 돌아옴이 있고, 그들과 함께 하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메시아의 신실함이, 바울에게도 있습니다. 모든 이에 대한 긍휼함이 하나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바울 안에 부어졌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예수 공동체도 같은 마음 부어진 공동체이기에 바울은 비뚤어진 이들의 부활을 바라며 나아가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논의를 위해서 "첫 곡식 가루"와 "뿌리"의 이미지를 가져옵니다. 전자는 민수기 15:20의 인용으로, "곡식 가루 떡 덩어리의 익은 첫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덩어리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정결케 된 것으로, 이스라엘이 사용해도 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찬가지로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 전체가 거룩합니다. 핵심은 첫 곡식가루와 뿌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 곡식가루는 '남은 자' 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거저주심 속으로 들어온 이들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역시 그러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즉 유대인이 다시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인지해야 합니다.


B'. 11:16~24 첫 곡식, 감람나무 비유

   만일 첫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덩이도 그러합니다. 게다가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합니다.그러나 만일 (본래 있던) 가지들 가운데 얼마가 꺾이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나무인 당신이 품종 좋은 올리브나무 안에 접붙임되어 그 뿌리 양분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 (잘려나간) 가지들에게 자랑하지 마세요. 만일 자랑한다해도, 당신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뿌리가 당신을 지탱합니다.


  바울은 '뿌리'와 '가지'의 이미지를 길게 이어갑니다. 만일 뿌리를 앞서 첫 곡식가루처럼 '남은 자'라 생각한다면, 원가지를 '나머지 이스라엘'로, 그리고 접붙임받은 가지들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이스라엘 남은 자' +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연대는 보여줄지 몰라도, 지금 바울이 집중하고 있는 잘려나간 가지에 대한 논증이 부가적인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B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지탱한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그리스도인 안에서, 율대인이 이방인의 근본이 될 수 있습니까? 일 없습니다.) 따라서 뿌리는 앞에서 첫 곡식가루와는 달리(그리고 첫 곡식가루로 드리는 제사의 이미지는 유대인에게만 유효할 것입니다.) 뿌리는 메시아입니다. 게다가 메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이새의 뿌리"라는 말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있던 가지들"이란 유대인이고, "야생 올리브 나무인 당신"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비뚤어져서, 메시아로부터 떨어져나갔을 때(그들은 토라를 뿌리라 생각했지만, 토라는 생명의 양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방인이 메시아에게 접붙임될 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비뚤어짐을 통해 이루신 기이한 구원 계획과도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자신들이 유대인들보다 우월하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본래 자신들이 '뿌리'와 연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람들끼리의 상대적 우월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토라의 행위를 자랑했던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은, 곧 상대적 우월감이었습니다.(토라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상대적 우월감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원인들은 그릇된 자랑이 됩니다. 심지어 바울이 5장에서 말했던, "한 분 하나님 자랑합니다"의 말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빌미삼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보다 상대적 우월감을 가져도 된다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도, 상대적 우월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자랑은 나를 높이지 않고, 오히려 나를 낮춥니다. 내가 살몸이었다는 분명한 과거 속에서, 그 과거가 뒤집힌 분명한 현재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렇게 말하겠지요. "(본래 있던)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임받기 위함이다." 맞습니다. 믿지 않아서 그들이 잘려 나갔습니다. 반면 당신은 신실함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본래 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당신도 아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상 대화 속에서, 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했던 말은 옳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절했기 때문에, 이방인이 메시아와 한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사실이 상대적 우월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신실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앞에서 계속 반복했던 얘기는, 신실함을 잃어버렸을 때, 언약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마저도, 메시아의 뿌리로부터 잘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실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것이고, 자랑은 약속을 지키는 것 없이도 자신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지위가 유지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니 자랑을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적 우월감의 근거를 부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우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베푸심과 엄격함을 보세요. 타락한 자들에게는 엄격함이, 여러분에겐 그 베푸심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베푸심 속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여러분도 잘라 버리실 것입니다. 또한 잘려나갔던 이들도, 신실함 없는데 머물지 않으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접붙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저들을 접붙이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본성을 따라 나는 당신도 야생 올리브나무에서 잘려, 그 본성을 거슬러 품종 좋은 올리브 나무 안에 접붙임되었는데, 본래 품종 좋은 올리브 나무의 가지였던 이 사람들이 그 본성을 따라 자기 자리였던 그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로마에 있는 예수 공동체에 대한 경고입니다.

즉 공동체는 자신들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지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만일 신실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공동체가 "높은 마음"을 품었다면, 그 공동체는 메시아로부터 잘려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분의 판결은 엄중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스라엘이 버림받지 않았다"라는 말이, 이스라엘이 메시아의 신실함으로 열린 오는 시대를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심지어 자기 아들과 자기 자신 조차도!), 그 분에게는 엄격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메시아로부터 잘려나가는 것이고, 스스로 메시아를 버린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음 구절에서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또한 잘려나갔던 이들도, 신실함이 없는데 머물지 않으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접붙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에게 줄기차게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돌아오면, 메시아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신실하면, 우리는 그 뿌리로부터 진리와 성령의 진액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 이유가 더욱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저들을 접붙이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다시 저들을 접붙이실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앞에서는 부활이라 했습니다. 비뚤어짐의 노예가 되었던 살몸을, 다시금 메시아와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돌아가고자 한다면, 즉 신실하기만 하다면, 사람 속에 성령이 부어지고, 새 마음이 창조되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는 의의 산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의 산정은 하나님의 선언이므로 반드시 이뤄집니다. 이 광야길의 모든 과정 속에서 내리는 만나는 예수의 살점이요, 마시는 물은 예수의 피이며, 그들을 이끄는 성령은 메시아의 숨결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메시아와 하나되어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가 지금 열려있습니다. 이른 바 오는 시대, 메시아에 접붙임되는 길, 타락한 사람을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와, 거룩한 글자인 토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던 이들도 메시아와 하나가 되거늘, 하물며 이스라엘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이 그들만 배제하셨겠습니까?


A' 11:25~32 a.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5~27)

                 b. 모든 사람을 위한 불순종과 긍휼(28~32)

a.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5~27)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 비밀을 알았으면 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향해 지혜롭다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비밀은 역사의 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이방 사람들이 충만하게 들어오는 날까지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굳어짐'이 있게 되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결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시온에서부터 '흐르게 된 이'가 오리라.

야곱에서부터 하나님께 등돌린 이들을 다시 돌아서게 하리라.

내가 그들의 비뚤어짐을 베어버릴 때마다

이것이 저희에게 내 언약을 따라 이뤄질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신인데, 한국사람인 내가 왜 다른 나라의 신을 믿어야 해?"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미스테리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 비밀이란, 역사의 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역사의 한 부분이란 곧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후 그 아브라함의 살몸으로부터 나온 후손들이 마음이 굳어졌고,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 아니냐는 반문을 갖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사용하셔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을 이루셨음이 마침내 드러났습니다.(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나, 토라가 이미 기록하고 있던 바였습니다. 신명기 29:4, 이사야 6:9~10, 29:10) 메시아는 비뚤어짐에 대한 유죄판결을 위해 죽으셨고, 마침내 사람들은 비뚤어짐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노예로서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스라엘의 비밀이 아니라, 온 인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유대인의 조상이 아니라, 온 인류의 대표로서 만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A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는 "풍성함"의 의미를 확인하고서 왔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다민족으로 이뤄진 공동체입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머리색깔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메시아의 신실함. 하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다채로운 가지들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씨들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사야 59:20,21을 인용하여, 위 본문의 "이런 식으로"를 구체화하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전모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 앞 내용인 이사야 59:7,8은 이미 인용된 바 있습니다. 토라를 발췌해서 만든 유대인 고발장의 일부가 이사야 59:7,8이었습니다. 함께 적어둡니다.) 


이사야 59:7,8,20,21

   그들의 발은 나쁜 일을 하는 데 빠르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신속하다. 그들의 생각이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황폐와 파멸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안전한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공평이 없다. 스스로 길을 굽게 만드니, 그 길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이 없다.

...
  주님께서 시온 속량자로 오시고,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를 회개한 사람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과 맺은 나의 언약은 이러하다. 너의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너의 입에 담긴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너의 입과 너의 자손의 입과 또 그 자손의 자손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바울이 고쳐서 인용한 내용들이 보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시온에"라 되어 있으나, 바울은 "시온에서부터"라 옮겼고, "속량자"는 "흐르게 된 이"라고 제가 과도하게 번역해보았습니다. 요점은, 비뚤어진 사람들에게 주께서 직접 찾아오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시온에서부터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부터 "저는 유대 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희랍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있을 것입니다."를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임하시며, 그 시온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온에서부터 속량자의 위대한 사역이, 온 세계로 흘러갑니다.("메시아의 말숨"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떠나는 "아름다운 발"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기서도 '숨님(영)'과 '입'이 등장합니다. 즉 신명기 30장의 언어, 바울이 10장에서 말했던 바로 그 구원입니다.


"말숨이 네 입 속에 있으며, 네 마음 속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신실함의 말숨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당신의 맘으로 한 분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즉 맘으로 신실하여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저에게 신실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모든 사람의 한 주님은, 그이를 향해 소리쳐 부르는 모든 사람 속에 가득 차오르시어, 유대 사람이나 희랍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하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새의 뿌리"이신 메시아 예수는, 왕으로서 대적을 베어 없애버리십니다. 그 때마다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일이 바로 신명기 30장의 포로귀환입니다. 구원입니다. 참 인간다움. 창조의 좋음으로 하나님과 온 우주를 다스릴 우주 상속자 되는 것. 마음으로부터 신실함이 시작되고, 입으로 고백하기 시작하며, 결국 온 몸이 새롭게 되는 데 이르는 일이 벌어지는 때마다, 메시아의 승리, 포로의 해방, 말씀의 이룸입니다.


b. 모든 사람을 위한 불순종과 긍휼(28~32)

  복음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여러분들을 통해 원수가 되지만, 택하심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조상들을 통해 사랑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저주심과 부르심에는 뉘우칠만한 잘못이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도 전에는 하나님께 설득되지 않더니, 이제는 이스라엘의 설득되지 않음으로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와같이 지금 이스라엘이,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이에게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저희도 이제 긍휼을 입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설득되지 않음에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반문을 제기하던 모든 오해를 최종적으로 뒤집습니다.


A.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께 설득되지 않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완고하게 하셨다는 진술이, 곧 언약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었듯 말입니다. 그러니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우월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완고함 덕분에,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B. 그런데 역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 이후, 이제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을 보내어, 진노의 그릇에게 손을 내밀라 하십니다. 즉 완고함을 깨뜨리고, 그들 마저도 그 마음에 성령을 부으시고, 입으로 고백하게 하여 새 그릇으로 창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진노를 긍휼로 덮음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논리를 모든 사람에게 확장시킵니다.

A'.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설득되지 않는 오늘날의 상황은, 오늘 우리에 대한 긍휼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비뚤어짐의 노예로 가두신 것은, 비뚤어짐에서 출애굽한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뚤어진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A와 이스라엘B의 관계처럼. 이스라엘A의 완고함이, 이스라엘B의 구원의 방법이라면, 모든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완고함이, 오늘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B'. 그런데 역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 이후,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어, 진노의 그릇에게 손을 내밀라 하십니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입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포로기의 끝났다는 사실을 전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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