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표적 : 

그의 시간,

이제 일을 시작할 때




0. 서론 : 다리 만들기

-요한복음의 서론(1:1~18)과 결론

 

1. 변화된 물질, 다시 만나는 하늘과 땅

 

2. 그의 가치 : 죽음을 이기는 것

 

3. 그의 시간, 이제 일을 시작할 때

 

4. 찢기는 몸, 넘치는 생명

 

5. 혼돈 속 혼돈 속 혼돈 속의 인자

 

6. 예고편 : 죽음에서 일어난 사람

 

7. 모든 기적들은 이 빈 무덤을 가리키고 있었다.

 

 


0.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봅시다. 그리고 요한이 그리려고 했던 큰 그림을 우리 마음에도 새겨둡시다. 키워드를 정리해봤습니다.


서론(1:1~18)

-[하늘, 땅, 말씀, 어두움에 잠긴 세상, 그 세상 속 성막, 그를 믿는 자, 은혜, 진리]

 

첫 번째 표적(2:1~12)

-[혼인잔치 : 새 하늘과 새 땅, 물질의 변화 : 부활의 육체, 믿음 : 물 떠온 하인]

 

두 번째 표적(4:43~54)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 존경(티메),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 일어나는 아이, 믿음:신하의 걸음]


  오늘 보고자 하는 본문은 다소 깁니다. 무려 47절에 달하는 분량. 그러나 이것은 한 사건입니다. 흔히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있지만, 베데스다 이야기는 병자가 치유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사실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길더라도, 하나의 사건 안에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1~47

그 뒤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는 양의 문 근처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는 다섯 개의 주랑이 있는데, 많은 병자들이 주랑에 누워있었다. 눈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자들이었다. 

  38년 동안이나 병세에 차도가 없던 한 남자가 거기 있었다. 예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이미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음을 아셨다.

  “낫고 싶으냐?”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병든 남자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물이 휘돌 때 저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그 남자는 즉시 나았다. 그는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


  이 모든 일은 안식일에 일어났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병 나은 남자를 나무라며 말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침상을 옮기면 안 되오!” 

  그가 대답했다. “나를 고쳐 주신 분이 침상을 걸어가라고 내게 말씀하셨소!”

  그들이 말했다. “정말이오? 당신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대체 누구요?”

  하지만 병이 나은 남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곳을 떠나셨고, 그곳은 붐볐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그 남자를 만나 말씀하셨다. “보아라! 너는 이제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러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남자는 가서 자기를 낫게 해준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일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런 일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고, 나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유대 사람들은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안달했다. 그가 안식일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해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다.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아들도 그래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자기가 하는 일을 전부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여 주실 것이고, 너희는 놀랄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주시듯이, 아들도 자기가 택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전부 아들에게 맡기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죽음에서 나와 생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듯이, 아들에게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질 권리를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권한까지 아들에게 주셨다.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들을 그 때가 오고 있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예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것도 내 권한대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것에 바탕하여 심판한다. 또 내 심판은 공정하니,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나 자신에 대해 증언하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않다. 나에 대해 증언해 주시는 다른 분이 계시니, 나는 그분이 나에 대해 하시는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자를 보냈고, 그는 진리에 대해 증언했다. 나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은 환하게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너희는 잠시나마 그의 빛을 기뻐하였다. 하지만 요한의 증언보다 더 중요한 증언이 내게 있다. 아버지께서 완성하라고 내게 주신 일들, 곧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들이 나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언이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셨다. 너희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분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너희는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게 하지 않았다. 너희가 그분이 보내신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나에 대해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없음을 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는 나를 맞이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맞이할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따로 있다. 그는 바로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다! 만약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에 대해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너희가 내 말을 믿겠느냐?”



1. 소망이 만나는 자리, 

그러나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요한복음 5:1~47

그 뒤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는 양의 문 근처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는 다섯 개의 주랑이 있는데, 많은 병자들이 주랑에 누워있었다. 눈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자들이었다. 

  38년 동안이나 병세에 차도가 없던 한 남자가 거기 있었다. 예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이미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음을 아셨다.

  “낫고 싶으냐?”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병든 남자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물이 휘돌 때 저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그 남자는 즉시 나았다. 그는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


  이 사건의 때와 장소를 먼저 확인해봅시다. 요한은 세번째 표적이 될 사건을 언급하면서 세심하게 그 때와 장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날은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유대인들은 떨어져살더라도 명절이 되면 성전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안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입니다. 예수도 여기에 계십니다. 


  이 베데스다는 특별한 연못입니다. 간헐철이거든요. 그래서 가끔씩 호수 중앙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이 현상 때문에 이 호수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물이 부글부글 거리는 순간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순간이므로, 이 때 호수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입니다. 이 연못은 유대인에게만 유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진 연못으로 유명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사용하는 세계보건기구


  생각해보면,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데스다'에 온 유대인이나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찾아온 이방인이나 원하는 것은 같았습니다. 그것은 병이 낫는 일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 이곳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소망이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이 곳, 베데스다로 찾아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병이 깊으면 깊을수록 병이 치료될 수 없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중심으로 다섯개의 행각이 놓여있고, 이 곳에는 여기저기에서 몰려온 병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호수가 끓어오를 때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호수가 끓어오르면,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당도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중풍병자나, 앉은뱅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서 존재는 곧 경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쟁에 패배한 사람들이 수십년을 그 자리에 앉아서 낙담한채 시간을 보내는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처럼 말입니다. 경쟁에 밀려나 어떠한 삶의 희망도 붙잡지 못하는 어느 노숙인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38년을 앓던 중풍병자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물이 휘돌 때, 저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그의 안타까움이 느껴지십니까? 어쩌면 그는 조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베데스다만을 바라보는 그의 등 뒤에 누군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38년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거십니다. "낫고 싶으냐?" 그가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중풍병이 걸린 이후 38년동안 고대하던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모든 사람이 갈망하던 바가, 그 자리에서 이뤄졌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병자는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물속에 먼저 던져주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오셨고, 그는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했습니다.



2. 그들의 시간과 예수의 시간


 이 모든 일은 안식일에 일어났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병 나은 남자를 나무라며 말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침상을 옮기면 안 되오!” 

  그가 대답했다. “나를 고쳐 주신 분이 침상을 걸어가라고 내게 말씀하셨소!”

  그들이 말했다. “정말이오? 당신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대체 누구요?”

  하지만 병이 나은 남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곳을 떠나셨고, 그곳은 붐볐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그 남자를 만나 말씀하셨다. “보아라! 너는 이제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러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남자는 가서 자기를 낫게 해준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일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런 일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38년만에 중풍병이 해결된 이 날은 부득이하게도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쉬는 날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 사람들은 고침받은 병자도 일어서서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8년간 자신을 짓누르던 중풍병에서 갓 구출받은 그를 다시 베데스다에 앉혀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법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말합니다. 이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먼저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부터 생각해봅시다. 유대 사람들이 이집트 포로였을 때입니다. 그들은 쉼없는 피지배의 삶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얻었고, 그들에게 자유케 한 창조주는 그 자유의 증표로 안식일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여섯날을 일하고 일곱째날 쉬도록 한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쉽니다. 

  다른 민족들은 생존을 위하여 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존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은, 생존이 보장된 민족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안에서 쉬는 일입니다. 그럼 이 날 무엇을 합니까? 엿새 동안의 생명을 풍성히 하기 위해 노동하고, 일곱째 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꼐서 그리 하셨듯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위대한 증표에서 역사를 끊어냈습니다. 창조와 상관없는 안식, 무조건 쉬어야 하는 안식, 쉬지 않는 자를 경멸하는 안식, 인간다움과 상관없는 안식. 생명을 소멸하는 안식. 그들은 그렇게 지금은 쉬어야 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일곱째날 쉬는 것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유대인들만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이 유니크함은 열방을 섬기기 위한 유니크함이었으나, 그들은 이 구별되는 정체성을 로마의 압제 아래서 더욱더 결집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로마를 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기에 전혀 다른 시간을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일합니다. 그는 왜 안식일에 일하는 것입니까?(아니, 안식일만 골라서, 명절만 골라서 일하는 것입니까?) 그는 마치 이제 쉬어야 할 때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쉬는 날이 끝나고, 새로운 7일이 시작되듯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고, 나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유대 사람들은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안달했다. 그가 안식일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해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유대인에게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하나는 그 날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일해야 할 때라고 말한 것, 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이제 이 사람을 통해 일을 벌이려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 안식을 마치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에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 빛이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새롭게, 땅을 새롭게, 하늘과 땅의 피조물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사람도 새롭게 창조 합니다. 그렇게 타락을 소멸시킨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일합니다. 그 일을 이렇게 부릅시다.

  따라서 지금 예수의 시간은, 새창조의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옛 시간표를 붙들고 예수를 핍박하던지, 아니면, 예수의 새로운 시간표를 받아들이던지. 그러나 오히려 유대인들은 예수에게서 두 가지 위험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곧 인자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새로운 시간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그들은 예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가히 혁명적이기 때문입니다.






3. 그가 인자이기 때문에, 지금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다.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아들도 그래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자기가 하는 일을 전부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여 주실 것이고, 너희는 놀랄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주시듯이, 아들도 자기가 택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전부 아들에게 맡기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죽음에서 나와 생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듯이, 아들에게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질 권리를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권한까지 아들에게 주셨다.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들을 그 때가 오고 있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예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것도 내 권한대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것에 바탕하여 심판한다. 또 내 심판은 공정하니,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에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맡기는 일이 등장합니다. 그 일은 '아들이 택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고, 이것을 가리켜 '심판'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낌이 딱 오지 않을 수 있지만, 유대인이라면 이 이야기의 배경을 모를리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인자 이야기'입니다. 그 인자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옛적부터 계신이가, 인자와 같은 이를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시청률 40%에 육박하는 드라마와 같이, 유대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고, 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짓누르는 거대한 짐승들, 그러나 그 짐승들은 마침내 심판 받고 하나님의 백성은 구출됩니다. 그리고 인자는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승계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자는 곧 심판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자 이야기의 짐승은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짐승을 처단하시고, 자신들을 옳다 인정해주실 날을 고대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인자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이 인자를 그들은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이자, 인자로부터 구출받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자신들에게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랜 포로기동안 이스라엘을 버티도록 한 힘이었습니다. 사실 버텼다기 보다는, 그들은 자신들을 복수심으로 채웠습니다. 짐승의 파멸, 곧 로마의 파멸을 고대하며, 그들은 점점 진리에서 멀어져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그 인자 이야기의 인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모든 권한을 이양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자신은 심판자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움직이는 사람은 옳다 인정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틀렸습니다. 그는 심판자, 곧,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십니다. 이 이야기를 안식일을 어긴 자가 말합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옳음은 커녕, 이스라엘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자 이야기의 새로운 해석을 듣는 사람들은 피가 거꾸로 쏟아질 지경이었습니다. "당신이 인자라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게다가 우리가 틀렸다고?"


  그렇다면, 

  짐승은 어떻게 심판받게 될까요? 

  백성들은 어디로 구출될까요?

  인자가 아버지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는 때는 언제일까요?


  이러한 사실들은 요한복음 속에서 아직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이 인자 이야기의 인자이고, 그가 심판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를 죽이려는 이스라엘의 명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전체 맥락을 훑어보고 참된 의미를 찾아 봅시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쳐준 것 때문에, 예수는 유대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하면 안되기 때문에, 예수는 안식일을 어긴 범법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지금이 일할 때이며, 지금이 일할 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인자, 곧 창조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심판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지금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어떠한 시간일까요? 


그렇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여 주실 것이고, 너희는 놀랄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주시듯이, 아들도 자기가 택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고 있다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미래가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다. 


  사람들을 앞에두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이 바로 그 때'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는 언제입니까? 인자가 심판할 때, 악이 심판받고, 백성들이 구출받을 때, 인자의 심판이 이뤄질 때. 왜 지금이 그 때입니까?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듯이, 아들에게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질 권리를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권한까지 아들에게 주셨다.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금은 안식일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사람은 지금이 다른 시간이라 말합니다. 안식이 아니라 일할때 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일은 아버지와 아들이 일입니다.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인자 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이 일은 바로 아버지의 권한으로 아들이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그는 인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을 끝내고 새로운 시간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자.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의 심판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그 심판은 죽은 사람들을 향해 이뤄집니다. 죽은 사람들을 향해 인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 사람이 이전에 어떠한 잘못을 했던,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던 상관없이, 인자의 말을 듣고 믿으면, 그는 옳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옳다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들을 그 때가 오고 있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부활입니다. 그것도 생명의 부활입니다.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그 옳음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부활은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이 땅에서 사는 것이기에 악인도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부활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합당한 댓가를 치루기 위해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우리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봤던 것과 같이, 새창조입니다. 즉, 부활은 심판이자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시간개념과 다르게, 예수께서는 지금 심판하고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일을 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요, 인자이신 예수를 통해 새롭게 이 땅에 돌입한 시간입니다. 지금이 그러한 시간입니다.



4. 근거는 무엇인가? 


  이 주장은 어마어마한 주장입니다. 감히 어떠한 인간이 새로운 역사,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감히 어떠한 인간이 여섯 항아리 이후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하늘에도 속하고 땅에 속한 한 사람, 새로운 물질의 몸을 가진 한 사람, 하나님께 심판의 권한을 위임받은 인자 뿐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인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 어떠한 시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에게 있어 말씀을 들었던 그 시간은 곧 심판의 시간이고, 그 심판 속에서 인자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그는 옳다 인정을 받습니다. 이 옳다는 인정은 부활에 대한 약속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부활이 보장된, 즉, 옳다고 인정받는 판결이 약속된 현재가 되는 것이고, 그의 현재로 미래의 새로운 시간이 흘러들어옵니다. 그 시간은 이전의 낡은 시절의 나를 벗어내고, 예수의 말씀에 따라 새로워지는 새창조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유대인과는 다른 인자의 시간표였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십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에 대해 증언하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않다. 나에 대해 증언해 주시는 다른 분이 계시니, 나는 그분이 나에 대해 하시는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자를 보냈고, 그는 진리에 대해 증언했다. 나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은 환하게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너희는 잠시나마 그의 빛을 기뻐하였다. 하지만 요한의 증언보다 더 중요한 증언이 내게 있다. 아버지께서 완성하라고 내게 주신 일들, 곧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들이 나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언이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셨다. 너희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분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너희는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게 하지 않았다. 너희가 그분이 보내신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나에 대해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없음을 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는 나를 맞이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맞이할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따로 있다. 그는 바로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다! 만약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에 대해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너희가 내 말을 믿겠느냐?”

  예수께서 정녕 이러한 분이심을 세례요한이 증언했습니다. 또한 요한보다 더 중요한 증언은 바로 예수께서 하시는 일, 표적입니다. 이 표적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들입니다. 곧 드러내기에 영광이요, 역사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적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성서라는 텍스트 전체가 증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한, 표적, 성서. 이 세 가지는, 예수가 새로운 시간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인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서를 연구하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좋아하면서도 그 요한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는 티메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고발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예수의 심판의 의미는 고발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이 연구하고 있는 모세오경이, 이들이 말하는 출애굽이 전혀 창조와 상관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을 억누르는 안식일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로마 사람들을 죽여서 얻으려는 자유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출애굽의 역사를 왜곡했으면서도, 자신들의 혁명을, 하나님의 출애굽으로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면 혀를 찰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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