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을 시작합니다. <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 <모든 사람을 위한 요한계시록>,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석 무엇이 문제인가?>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목차는 <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에 나오는 구성을 따라, 성경본문은 제가 번역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2018.3.15입니다. David. L. Barr의 <Tales of the End: A Narrative Commentary on the Book of Revelation>을 읽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을 추가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 구성

1주. 1:1~20 프롤로그
2주. 2~3장 일곱 에클레시아에 보내는 편지
3주. 4~5장 하나님과 메시아의 영광
4주. 6~8:5 일곱 인 심판
5주. 8:6~11장 일곱 나팔 심판
6주. 12~15:4 격화된 싸움 : 일곱 환상 또는 표징
7주. 15:5~16장 일곱 대접 심판
8주. 17~19장 바벨론과 짐승에 대한 최후의 심판
9주. 20장 천년왕국
10주. 21~22:5 새 창조와 영광 속에 들어간 완전한 에클레시아
11주. 22:6~21 에필로그

 

1. 프롤로그(요한계시록 1:1~20)

  본문은 노란색 칸으로, '인유'는 회색 칸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앞으로 '인유(allusion)'라는 말이 자주 나올테니 미리 어떤 뜻인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문학자 마이너는 "인유는 저자나 과거가 동시대의 본문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요소를 자신의 작품에 의도적으로 도입하는 서술기법"이라 정의했습니다. 즉 요한은 계시록을 동시대에 읽히던 구약성경 여러 책들을 의도적으로 도입시키며 저술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입에는 '의도'가 있으니, '요한이 왜 이 대목을 본문에 인용했을까?'를 염두하며 계시록을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본문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줄줄이 달린 구약 인용문들을 볼게 될 겁니다. 따라서 계시록 연구는 구약 전반을 다루는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어찌되었든 일단 본문부터.

  데이비드 바는 구둣점도 없이 쓰인, 읽기도 버거운 두루마리를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초 낭독자는 곧 최초 해석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낭독자들과 청중들을 위해 내용을 식별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합니다. 데이비드 바가 제시하는 장치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복, 병행, 키아즘, 상징 공식, 숫자 매기기, 제목달기, 틀짜기.

 

요한계시록 1:1~8

  메시아 예수의 계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이에게 주신 것으로,
그것은 그이의 종들에게 속히 일어나야만 하는 것들을 보이신 것(inf.),


그리고 그이는 그의 천사를 통해 명하시어, 그의 종 요한에게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의 로고스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증언을 그가 본(아는) 만큼 증언했습니다. 이 예언의 로고스를 다시 깨닫는(읽는) 자와 귀기울여 듣는 이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제목이 달려있고(메시아 예수의 계시), 낭독자와 청중들("위로부터 깨닫는 자, 귀 기울여 듣는 이들 곧 지키는 이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계시"가 초대교회 예배의 자연스러운 구성요소였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26처럼. 감춰졌던 신의 마음/의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기는 2016년 7월 4일, 난지 12163일째입니다. 여기 쓰인 본문해설을 가지고 아침마다 요한계시록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말하다가 생각난 것과 듣고 깨달은 것들을 다시금 써둡니다.

 

  저 첫 마디부터 제대로 넘어가지 못해서, 계시록에 대한 숱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계시. 계시는 현실을 읽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결정론적 시각에서 쓰여진 '미래의 정해진 일'도 아니고, 세계 전쟁의 은유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일상은,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깊이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는 그 삶의 베일을 걷어내시어, 참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계시(revelation)입니다. 이 계시의 주체가 메시아 예수요, 이 계시의 내용이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즉 그는 우리의 삶 이면에 늘 계신, 삶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계시'역시 '(메시아께서 보여주시는) 삶의 진실한 이면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2017년 8월 25일, 난지 12580일째입니다. 
  요한이 "메시아 예수의 계시"에 관해 무어라 말하는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아 예수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께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의 계시는 "그이의 종들에게" 속히 일어나야만 하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속히 일어나야만 하는 것들"이 현시대 위로 오는시대가 돌입하는 것을 가리키고, 예수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곧 "그이의 종들"이 됩니다. 따라서 종들은 사도들을 포함합니다. 요한만이 독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메시아 예수의 계시"가 아니라, 이미 사도들이 알고 있고, 다만 요한은 자신만의 방법(천사들을 통한 상징σημαιον의 방법)으로 기술하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2:1
정녕 자랑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을 말하리라.

  바울 자신도 환상들과 계시들을 경험했으나, 그가 전달하는 방식은 환상과 계시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애써 배제하는 방식입니다.

  번역을 다소 수정했습니다. 
*계시가 무엇인지 말하는 infinitive구문을 분리시켰고,
*ἐσήμανεν ἀποστείλας를 "명하시어...표적을 보이셨습니다"로 번역했습니다.
*"아는 바대로"를 "본(아는) 만큼"으로 수정했습니다.

  요한의 인지과정도 생각해봅시다. 

  그이가 요한에게 천사들을 통해서 상징을 주어 알게 하셨습니다. 그냥 말씀하시지 않고, '천사를 통해', 그것도 '상징'이라는 방법으로 알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의 만연'이라는 말이 식상할 만큼, 오늘날은 모든 것이 개인으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납니다. 그런 시대적 조류에 휩쓸려 교회와 예배마저도 공동체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천사'라는 단어의 의미도 희미해져버렸습니다.

  월터윙크는 개인의 영성을 넘어선 공동체적 영성이 존재하고, 이것을 <성경>이 '천사'라는 어휘를 통해서 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월터윙크의 견해에 따라, 계시록에 나오는 '천사'를 차차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지금은 '공동체적 영성'이라는 잘 잡히지 않는 단어을 일단 가지고 갑시다. 개인의 정신활동에 의미를 전달해주는 매개를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헤르메스와 같습니다. 천사와 성령의 차이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습니다. 천사도 성령도 우리가 무언가를 아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만, 그 역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천사는 우리에게 상징을 던져주고, 성령은 그 천사를 하나님과 맘 맞추어 읽어내도록 합니다. 의미 전달의 매개로서의 천사는 갈라디아서 3:19절도 관련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9

그러면 토라(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토라는 약속을 받으신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천사를 통해 주어진 토라만 가지고는 토라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성령은 토라의 제의미를 발견하도록 밝혀주시는 빛이십니다.

 

  의미를 전달해주는 천상적 실재가 메시아 예수와 요한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메시아 예수 외에는 어떠한 매개도 필요없다는 종교개혁 정신에 익숙합니다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천사들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중보자는 아니지만, 중간자로서 오늘도 기능하고 있습니다.(이 '천사'에 대해서는 2장에 들어서면서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천사들은 상징을 전했고, 요한은 상징을 해석했습니다. '계시'라고 말할 때, 계시는 그저 받아쓰기 하듯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상징과 해석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 자신도 "자신이 아는 바 대로" 썼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아는 것과 무관한 내용을 베껴쓴 것도 아니고, 먼 미래의 내용을 자신도 모르면서 기계처럼 옮겨적은 것도 아닙니다. 요한은 천사를 통해 주어진 상징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을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말한 "아는 바 대로"의 의미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노라고 주장하는 사이비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계시록에 대한 건강한 이해가 부재하기 때문이겠습니다. 받아쓰기 하듯이, 하나님 말씀을 적어왔다고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이 한반도에만 50명도 넘게 있습니다.(그리고 그런 인간들은 유독 한반도에 많이 밀집해있는듯 합니다.)

 

  앞으로 계시록 연구를 하면서, 요한이 철저하게 구약에 있는 상징과 이야기들을 가져와서 의미를 표현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를 '인유'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배경을 모르면, 결코 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간 구약의 배경 없이 계시록을 이해하려다 보니, 전쟁이니 베리칩이니 다른 문맥들을 가져와서 요한의 글자들을 읽어왔으나, 요한은 전혀 그런 것을 말한 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그가 아는 바대로" 증언했다고 써있는데, 이 말은 우리가 '요한의 앎'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요한이 구약의 상징들을 어찌 해석했는지가 계시록 이해의 관건입니다. 니 맘대로 읽는 게 아니고요, 이만희씨. 네?


  우리는 계시록 첫 마디를 들여다 보기 위해서 청계산에 올라갈 게 아니라, 다니엘 2장을 펴야 합니다.

다니엘 2:28~30

 

비밀을 알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꿈, 곧 임금님께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 머리 속에 나타난 환상은 이러합니다.
임금님, 임금님이 잠자리에 드셔서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비밀을 밝히시는 분께서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저에게 이 비밀을 드러내신 것은, 제가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더 있어서가 아니라,
임금님께 그 꿈을 해석해 드려서, 임금님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을 임금님께서 아시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니엘 2:45~47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들어 와서 쇠와 놋쇠와 진흙과 은과 금을 으깨는 것을 임금님이 보신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꿈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 해석도 틀림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서 다니엘에게 절하고,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도록 명령을 내렸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 가운데서 으뜸가는 신이시요, 모든 왕 가운데서 으뜸가는 군주이시다. 그대가 이 비밀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비밀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다니엘 2장에 반복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계시록에는 "속히 일어나야만 하는 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즉 다니엘에게는 먼 미래의 일이, 요한에게는 현실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예전에 예언했기 때문에, 요한의 현실 속에서 그 일은 일어나야할 당위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 사이에 무언가 충격적인 전환이 벌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 되어 있어, 이것을 곧이 곧대로 읽으면 계시록을 무슨 미래를 점쳐보는 책으로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미래시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시재가 쓰여서, '현재 일어나야 할 당위'의 의미만을 갖습니다.

  게다가 다니엘의 '계시'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상징을 해석했지, 황홀경에 취해서 무언가 받아적고 주문을 외듯이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보냅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계신 이, 계셨던 이, 오실 이로부터, 그의 보좌 앞 일곱 숨들로부터, 그리고 메시아 예수로부터 (있습니다.), 그이는 신실한 증인, 죽은 이들로부터 처음 나신 이, 땅의 왕들을 지배하는 이이십니다.  우리들을 인(仁)으로 대하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들을 비뚤어짐들로부터 풀어주시는 이에게, (심지어 우리를 나라와 하나님 곧 그이의 아빠를 향한 제사장들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한) 그이에게 뚜렷과 힘이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있을 것입니다). 아멘.

 

  '일곱'은 특정 에클레시아들을 가리키면서도 '보편'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천지에서는 이 일곱을 신천지의 전신인 장막성전의 '일곱 별'이라 불리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만,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이 일곱 에클레시아들이 부르는 노래가 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데, 신천지 말대로라면, 이 노래를 장막 성전의 지도자들이 불렀단 말입니까?('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란 곡이 계시록 5장 내용으로 만든 곡입니다.)

  일곱이 가지고 있는 '보편'의 성격은 성경 전체를 지배합니다. 창조세계가 지어지고, 일곱째 안식하신 것, 안식일, 안식년, 칠칠절, 70년 포로기간, 490년 유배생활. 성경은 7이라는 숫자를 '전체'를 상징는 표현으로 줄곧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일곱 에클레시아는, 뒤에 목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 끼어있는 시대(현시대와 오는시대가 중첩된)를 살고 있는 모든 에클레시아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아시아에 살지 않은 우리 역시 계시록을 봅니다.

  따라서 그 뒤에 나오는 '일곱 숨'의 일곱 역시, '전체로서의 숨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령이 일곱 분이신 게 아니라 말입니다.

  또한 요한은 에클레시아들에게 인사말을 전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에서도 볼 수 있는 "은혜와 평화"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와 평화"의 출처가,

  계신 이, 계셨던 이, 오실 이
  그의 보좌 앞 일곱 숨들
  메시아 예수.

  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조차 없었고, 이것이 교리로 정리되기 이전인데도 이미 삼위일체의 개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를 나중에 교회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신천지의 주장에 기가 찰 노릇입니다.)
 
  "계신 이, 계셨던 이, 오실 이"는 모든 시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그레고리 빌은 '삼중 표현'이란 말을 씁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이사야서와 출애굽기의 인유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만났던 하나님은 "나는 나"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셨고, 그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다스리십니다. 요한의 머리 속에 분명 다음의 구절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사야 48:12

 

야곱아, 내가 불러낸 이스라엘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내가 바로 그다. 내가 곧 시작이요 마감이다.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이스라엘의 속량자이신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다.

 

이사야 43:10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오직 나만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

 

이사야 41:4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질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다 정해놨으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라고 묻는 사람의 오해는,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시간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내가 매일 운동하기로 계획했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계획이 있고 실천이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 시간 안에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이지, 하나님께 대입할 수 있는 공식이 될 수 없습니다(그런 류의 공식이 있을리도 없고). 그 분은 시간을 넘어서 계획하십니다. 말은 이렇게 써놨는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나도 잘 모릅니다. 다만 부정문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시간과 별개로 계신 것도 아니라는 점이 신비입니다. "계신 이, 계셨던 이, 오실 이." 라는 요한의 표현 속에서, 하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가둬놓을 수 없는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보좌 앞 일곱 숨들"이라는 말은 스가랴 4:2~9의 인유입니다.

 

스가랴 4:2~9

 

그가 나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였다.
"순금으로 만든 등잔대를 봅니다. 등잔대 꼭대기에는 기름을 담는 그릇이 있고,
그 그릇 가장자리에는 일곱 대롱에 연결된 등잔 일곱 개가 놓여 있습니다.
등잔대 곁에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하나는 등잔대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등잔대 왼쪽에 있습니다."

나는 다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었다.
"천사님,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에게,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느냐고 묻기에,
천사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숨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고 외칠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내러티브에서 스가랴는 금 촛대의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이 금촛대가 상징하는 바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페르시아 포로기 때 이스라엘 본토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 스룹바벨이 기초를 놓은 이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숨으로만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보좌 앞 일곱 숨들'은 성전을 재건하는 힘, 즉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새롭게 일어선 일곱 에클레시아를 세우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불붙은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 그 자체를 표상합니다. 비워낸 마음에 성령이 들어차고, 그 성령은 마음을 넘어 몸을 닦아 건전한 신체활동을 하게 합니다. 그 끝에 피워낸 것이 생각이라는 불꽃입니다. 마치 성전처럼,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려, 하나님께 생각의 연기를 피워드리는 것이 참 사람이고, 이 사람을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몸을 성하게 하는 것도, 바른 생각이 위로 올라가는 것도. 류영모 선생은 이것을 "맘놓이-몸성히-뜻태우"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것 역시 인유입니다. 요한은 시편 89편을 예수에게 적용합니다.

시편 89:27~37

 

나도 그를 맏아들로 삼아서, 세상의 왕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왕으로 삼겠다.
그에게 내 신의를 영원토록 지키며,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성실히 지키겠다.
그의 자손을 길이길이 이어 주며, 그의 왕위를 하늘이 다할 때까지 지켜 주겠다.
그러나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내버리고 내 규례를 따라서 살지 않고,
내 율례를 깨뜨리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그 죄를 물어 채찍으로 치고 그 죄악을 물어 매질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약속한 나의 진실함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않으며, 내 입으로 말한 것은 결코 번복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거룩함을 두고 한 번 맹세하였는데, 어찌 다윗을 속이겠느냐?
그 자손이 영원토록 이어지고, 그 왕위는 내 앞에서 태양처럼 있을 것이니,
저 달처럼, 구름 속에 있는 진실한 증인처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 (셀라)

 

  요한은 시편 89편의 맏아들을 '예수'라 읽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부르며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혹은 신성모독적인) 해석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증언 때문에 지금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요한은 분명하게, 예수를 '땅의 다스림들을 지배하는 이'로, 또한 '신실한 증인'으로 증언합니다. 그리고 시편 89편에 없는 "죽은 이들로부터 처음 나신 이"를 한 가운데 위치시킵니다.

  그리고 요한은 출애굽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 맏아들이 우리를 인(仁)으로 대하시고(고린도전서 13장), 그 정도로도 모자라 자신의 피로 우리들을 비뚤어짐에서 '출애굽'시키셨다고 말합니다.(이로서 그 맏아들이 출애굽 안에서 어떠한 역할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문장들은 그 정도를 더해가는데 출애굽기 19:6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씨알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씨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요한에게는 "창조하셨습니다"가 되는, 대전환이 벌어졌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나라라면, 모든 나라의 죄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씨알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그 죄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죄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간구했던,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의 용서를 간청했던, 동족 유대인들이 메시아 예수를 믿기를 기도했던 이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타인의 비뚤어짐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그들은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단연,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제사장 직을 수행하신, 대제사장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제사장 나라가 에클레시아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씨알입니다.


  여기서 '나라'라는 말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신 왕이신 메시아의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메시아의 권한과 능력으로 하는 실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그이가) 구름들과 함께 가십니다, 모든 눈이 그이를 볼 것이며, 심지어 그이를 찔렀던 이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지파들은 그이를 향해 애곡할 것입니다. 네, 아멘. "바로 내가 ㄱ이고 ㅎ이다." 주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계시고, 계셨으며, 오실 분이며, 전능자이신 그 분이.


  이번에 요한이 다니엘서를 가져옵니다. "구름들과 함께 가십니다"는 표현은 다니엘서 7장을 가리킵니다. 흔히 재림으로 번역되지만, 본문의 '에르코마이'는 '오다'와 '가다' 둘 다 해석이 가능하며, '구름과 함께 간다는 말'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이양받아, 온 우주의 통치자로 인정받는 승천 장면을 가리킵니다. 즉 앞에서 시편 89편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은 메시아의 왕권'을 말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메시아의 왕권이 인정받는 장면인 다니엘서 7장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모든 눈이 그이를 볼 것이며, 심지어 그이를  찔렀던 이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지파들은 그이를 향해 애곡할 것입니다"는 다시 스가랴를 통해 들여다본 메시아 예수에 대한 진술입니다. 아래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12:10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


  본문에서 보듯 '그를 찔렀던 사람들'이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슬피 울고, '맏아들'을 잃은 것처럼 슬퍼합니다. 스가랴는 '그를 찔렀던 사람들'를 '이스라엘'로 읽고, 요한은 그 이스라엘을 '에클레시아'로 읽습니다. 즉 이 사람들은 자신이 메시아 예수를 찔렀음을 깨닫는 영을 받아, 뉘우치는 자들인 것입니다. 스가랴 12:10이 요한복음에서도 인용되는데(19:37), 그때는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그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백부장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합니다. (마가복음 15:39)


  신천지에서는 이 계시록 본문을 이만희에게 적용해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행하는 목자를 찌르는 것은 재림 예수님을 찌르는 자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스가랴 인유를 꿈에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요, '그를 찔렀던 사람들'이 맏아들을 죽였음을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요한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89편과 스가랴 12:10은 '맏아들'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됩니다.

  예수의 승천 장면을 보여주는 다니엘 7장의 인유가 현재시제로 표현되었습니다. 요한은 다니엘 7장을, 승천이라는 과거 사건을 말하려는 의도보다, 승천을 '통해' 현재를 다스리시는 메시아 예수의 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찌른 자들과 이스라엘 온 지파가 죽임당한 맏아들을 위해 애곡하는 장'은 미래시제로 쓰였습니다. 즉 요한에게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의 천상적 다스림은 현재적이요, 요한 자신의 시대 이후에도 은혜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받은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를 애곡하게 될 것을 의미하고자 미래시제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다니엘서 7장은 단회적 승천이 아니라, 승천으로 시작된 메시아 예수의 우주적 통치를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같은 방식으로 다니엘서 7장이 인용됩니다.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께서 지금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그 발 아래 바로 잡으십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이 땅에 나타나시는 날에, 그이는 자신이 받은 나라와 권세를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으로 다니엘서 7장 이야기를 이루십니다.

-여기는 12624일 입니다. 거저 받음으로 시작하는 기쁜 날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사야를 가져온 삼중표현으로 요한은 이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ㄱ이고 ㅎ이다"라는 표현으로 역사의 처음과 끝, 양 끝을 언급한 뒤, 그 사이를 "계신" "전능자"의 통치로 채웁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 양식들을 살펴봅시다. 먼저는 '존재사(영어에서는 be)'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방식이 있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3:14에서 나타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be) 자니라." 이렇듯 '있다'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히브리 전통입니다.
  그리고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가지고 나타내는 전통도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철학에서 지고신을 표현하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필로는 히브리어 네 글자로 이뤄진 '야훼(이 단어 역시 존재사로부터 형성되었습니다)'를 희랍어 글자에 대응시켜 IAW로 표현하기도 합니다.(희랍어에는 H가 없기 때문에 세 글자가 됩니다).
  훈민정음으로 만든다면, 자음으로는 'ㄱ과 ㅎ'이 되고, 모음으로는 'ㅏ와 아래아(.)'가 됩니다. 'ㅏ'와 '아래아(.)'를 더하면 '야'가 됩니다. 마치 '야훼'의 '야'처럼.


요한계시록 1:9~20

  나 요한, 여러분의 가족이며, 예수 안에서 (우리의 것인) 그 '압제와 다스림과 견딤'에 (여러분과) 함께 코이노니아 했던 나는, 하나님의 로고스와 예수에 대한 (법정)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 불리는 섬에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의 날에 숨으로 있게 되어, 내 뒤에서 마치 나팔이 말하는 것 같은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라'라는 말이 오해가 많습니다. 흔히 국가 개념으로 오해되지만,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왕권 행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왕은 승천으로 지금을 다스리고 계시는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계셨고, 계시며, 계실 하나님께서 그이를 자신의 형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이의 형상을 따라 우리도 그의 왕권에 참여합니다. 즉 우리도 성령을 부음받아 메시아가 됩니다. 즉 메시아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 정체성을 가지고 행사하는 왕권은 현시대의 왕권과 다릅니다. '지배'와 '자유'가 아니라, '압제'와 '견딤'이 그 왕권 행사의 방법입니다. 요한은 이 왕권에 코이노니아 했습니다. 즉 메시아의 일부가 되어, 세포와 세포가 물질을 서로 교환하듯, 메시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말 뿐이지 않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로고스를 말하고, 예수에 대해서 법정 증언을 한 이유로, 지금 '팥모스' 섬에 유배를 와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압제를 견딥니다. 견디는 와중에, 지배세력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 에클레시아의 이김을 위한 책이 저술된 것입니다.

  요한이 "주의 날"이라는 말을 쓰는 용례를 보고 놀랐습니다. 저는 그간 "주의 날"을 현시대가 종식되는 중첩된 시대의 끝점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마지막 날'과 대조를 이루어, 마지막 날은 이 기이한 시절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주의 날은 끝이 아니라 현재였습니다. 즉 메시아 예수의 부활 이후, 그에게는 모든 날이 주의 날입니다. 저 역시 요한을 따라서 저의 그간 해석을 수정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곧 '주의 날'입니다. 다만 그 날들을 바라보는 기준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시대의 입장에서 오늘을 바라보면, 오늘은 현시대가 끝장나는 마지막 날입니다. 오는시대의 입장에서 오늘을 바라보면, 오늘도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께서 왕권을 행사하시는 '주께서 다스리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지금을 '현시대이자 오는시대'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오늘 죽으면서도 새로이 태어납니다. 생장입니다. 껍질은 날마다 죽고, 새로운 세포가 그 위를 덮습니다. 삶은 그렇게 나이테를 그려가는 거대한 나무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숨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건을 에스겔도 겪습니다.

 

에스겔 2:2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


  요한 속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와,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입 없는 입으로, 귀로는 들을 수 없는 큰 소리로.

 

  "네가 보는 것을 책으로 기록하고, 일곱 에클레시아에 보내라, 곧 에페소스, 스뮈르나, 페르가모스, 튀아테이라, 사르데이스, 필라델피아, 라오디키아에."


  '무언가를 기록하라'는 내용이 나오는 구약 본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17:14


그 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오늘의 승리를 책에 기록하여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하고, 여호수아에게는, '내가 아말렉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서 아무도 아말렉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한 나의 결심을 일러주어라."

 

이사야 30:7,8


"이집트가 너희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이집트는 '맥 못쓰는 라합'일 뿐이다."  이제 너는 가서, 유다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를 백성 앞에 있는 서판에 새기고, 책에 기록하여서, 오고오는 날에 영원한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예레미야 36:1~3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유다 왕이 된 지 사 년째 되는 해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내가 너에게 말한 날로부터 곧 요시야의 시대부터 이 날까지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와 세계 만민을 두고 너에게 말한 모든 말을, 그 두루마리에 기록하여라.  내가 유다 백성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모든 재앙을 그들이 듣고, 혹시 저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나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세 본문 모두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내용을 언급할 때 '기록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아말렉에 대한 심판이,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이집트를 의지하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예레미야에는 유다 백성이 돌아서면 용서하시겠다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여기는 11265째 하루입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문과 연결된 기둥에 "붙잡지 마세요."라고 쓰인 것을 봤습니다. 붙잡을 것을 붙잡고, 붙잡지 말아야 할 것을 붙잡지 말아야겠습니다. 붙잡지 말아야할 것은 그림자입니다. 애시당초 그림자는 붙잡을 수도 없을 뿐더러, 붙잡으려해도 허할 뿐입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숨입니다. 숨을 붙잡을 수 있는 건 나의 몸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누가 내 곁에서 소리를 말한 것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섰더니 일곱 금 촛대를 보았고, 촛대들 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가,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이의 머리와 머리카락이 양털같이, 눈 같이 하얬고, 그이의 두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으며, 그이의 두 발이 용광로에서 타오르는 금같이 빛나는 주석같았고, 그이의 소리가 많은 물소리 같았고, 그이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들을 들고, 그이의 입으로부터 예리한 양날검이 밖으로 나왔고, 그이의 뵘이 그이의 힘 안에서 빛나는 해 같았습니다.

 

  등 뒤에서 나팔같은 소리를 들은 요한은 뒤를 돌아봅니다. 삼년 반동안 자신과 동거동락했던, 부활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셨던 그 인자가 거기에 계십니다. 반가워서 끌어안고 반가워해야 마땅할 그이인데, 요한은 그 앞에서 죽은듯이 엎드립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인자의 모습을 통해서, 그이가 지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서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니엘과 이사야를 통해서 요한이 지금 자신의 뒤에 서 계셨던 인자의 형상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약 환상의 일반적인 패턴인, 1) 장면, 2) 반응, 3) 해석을 따라 요한의 사고를 이해해봅시다.

1) 장면

-금 촛대
  요한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장면은 금 촛대입니다. 다시금 스가랴 4:2~6이 인유됩니다. 스가랴에서 촛대는 성전이었는데, 이 성전은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로서, 부활하신 메시아와 그 메시아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곧 그들이 이 땅에 손으로 짓지 않은 새성전입니다. 곧 '온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리고 그 새성전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힘인 숨님이 등잔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스가랴의 환상 속에서 촛대는 하나였지만, 요한의 환상 속에서는 일곱입니다. 스가랴가 예언을 전달해야 할 대상은 한 민족이었지만, 요한에게는 어느 민족도 배제하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의 건설이 사명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7이 '보편'을 의미한다는 점이 다시금 분명해집니다.

-인자
  우리가 인자 이야기로만 들었던 인자가, 요한의 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다니엘 7:13,14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가시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 10:5,6


그 때에 내가 눈을 떠서 보니, 한 사람이 모시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으로 만든 띠로 허리를 동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녹주석 같이 빛나고, 그의 얼굴은 번갯불 같이 환하고,
눈은 횃불 같이 이글거리고, 팔과 발은 빛나는 놋쇠처럼 뻔쩍였으며,
목소리는 큰 무리가 지르는 소리와도 같았다.


  요한이 묘사하는 인자에 대한 진술은 다니엘서의 인유입니다. "두 눈이 불꽃같이 타올랐으며"는 다니엘 10:6의 "횃불같은 눈"과 연결되고, 다니엘이 목격한 인자는, 요한이 목격한 인자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광로에서 금처럼 빛나는 주석은 3:18에 나오는 "불에 정제된 금을 내게 사가라"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즉 용광로 안에 있는 주석은, 어떠한 불순물도 범접할 수 없는 인자의 도덕적 순결함을 상징합니다. 그이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은 그이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에스겔 1:24, 43:2에 등장하는 '많은 물소리'가 나오고, 이사야 11:4, 49:2에는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5:31을 보면 이기는 용사를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묘사합니다. 즉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 구약을 거꾸로 읽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이 구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염두하며 읽어가다보면, 구약의 물줄기들이 계시록을 통해 메시아 예수 한 사람에게 모여, 많은 물이 되어 흐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반응

 

내가 그이를 보았을 때, 그이의 발 앞에 죽은 사람처럼 엎드렸습니다.


  그이의 오른손을 나에게 얹으시며 말씀하시길,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끝이고, 산 이고, 죽어 있었으나, 바로 나는 산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그리고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네가 본 것들과 그것들과 함께 곧 될 것들을 기록하라.


  요한의 반응은 이사야 6장의 이사야와 같고,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의 베드로와 같습니다. 인자를 목격한 그이의 발 앞 에 죽은 사람처럼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입에서 다시금 이사야가 인용됩니다. "나는 처음이요 끝". 그리고 현재 살아있다는 진술이 추가됩니다. 그러나 그가 줄곧 살아있던 것이 아니라, 죽었던 적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분이라는 사실이 계시록 1장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그 가운데 죽었다가 산 존재가 되었다는 부활 사건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이라는 표현의 인유를 살펴봅시다.

신명기 32:39,40


그러나 이제는 알아라. 나, 오직 나만이 하나님이다. 나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나는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한다. 나는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한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막지 못한다.  내가 하늘로 손을 들고, 내가 나의 영원한 삶을 두고 맹세한다.

 

다니엘 12:7


내가 들으니, 모시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사람이, 그의 오른손과 왼손을 하늘로 쳐들고, 영원히 살아 계신 분에게 맹세하면서 말하였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지나야 한다. 거룩한 백성이 받는 핍박이 끝날 때에,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영원한'이라고 번역된 말은, 고무줄을 양쪽으로 주욱 늘린 것같은 '영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환적 시간관도 아닙니다. 직역을 하면,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이라 할 수 있는데, 저는 이 말이 현시대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시대를 넘어서는 오는시대에 대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신명기와 다니엘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실 때, 그리고 다니엘의 환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환상 속에서 인자는 그러한 표현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라는 표현은 이사야 22:22와 계시록 3:7에 나옵니다.

이사야 22: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둘 것이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인간을 필멸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필멸한 존재들은 망각의 강인 '레테'를 지나 '하데스'라는 망자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영역은 그 어떠한 힘도 침범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가지, 죽음과 하데스는 모든 힘에서 벗어난 범위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앞에 나타나신 인자의 힘은 인간이 제한해두었던 그 두 가지를 넘어섭니다. 죽음과 하데스마저도 그에게 '권한'이 있습니다(그는 죽이기도하고 살리기도 하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 권한이 '열쇠'로 표현되었고, 이 열쇠의 심상은 3, 6, 9, 20장에 걸쳐 계속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열쇠는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천국의 열쇠"와 관련이 있을까요?

 

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열쇠를 '권한(엑수시아)'으로 읽는다면, 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인도하는 임무가 베드로에게 주어졌음을 표현하기 위해 "천국의 열쇠"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는 인자에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권한(열쇠)이 하나인 것인지 별개인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계시록 뒤에 이어지는 열쇠 심상들이 나올 때마다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봅시다.


3) 해석

 

네가 내 오른손에서 보았던 일곱 별들로부터 뮈스테리온이 (있다), 그리고 일곱 금 촛대들도 (네가 보았다). 일곱 별들은 일곱 에클레시아들의 천사들이고, 일곱 촛대들은 일곱 에클레시아들이다."


  구약의 환상에 대한 내용처럼, 1) 장면 2) 반응 을 지나 이제 그 환상의 3) 해석 으로 이어집니다. 인자께서 요한이 보았던 환상의 뜻을 풀어주십니다.

  뮈스테리온이란 말은, 고대 이교의 입문 의식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일상의 새로운 차원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데, 개역성경에는 "비밀"이라 번역되었습니다.

다니엘 2:29


임금님, 임금님이 잠자리에 드셔서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비밀을 밝히시는 분께서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앞에서 스가랴 인유를 살피며, 금 촛대가 숨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선 성전, 에클레시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오른손에 있던 일곱 별은, 그 에클레시아마다 있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계시록 2장에서,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모두 그 천사들을 통해 주어질 것입니다. 계시록 전체의 프롤로그격인 1장에서도 천사는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고, 요한에 의해 기록되어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보내진 인자의 편지 역시 일곱 에클레시아의 각 천사들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사'의 의미에 대해서 새로이 이해해야함을 뜻합니다. 날개 달린 상상의 무언가가 아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실체로서, 또한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체적 정신으로서 천사를 새로이 읽어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1:1~8

  메시아 예수의 계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이에게 주신 것으로, 
그것은 그이의 종들에게 속히 일어나야만 하는 것들을 보이신 것(inf.),


그리고 그이는 그의 천사를 통해 명하시어, 그의 종 요한에게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의 로고스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증언을 그가 본(아는) 만큼 증언했습니다. 위로부터 깨닫는 자와 이 예언의 로고스를 귀기울여 듣는 이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보냅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계신 이, 계셨던 이, 오실 이로부터, 그의 보좌 앞 일곱 숨들로부터, 그리고 메시아 예수로부터 (있습니다.), 그이는 신실한 증인, 죽은 이들로부터 처음 나신 이, 땅의 왕들을 지배하는 이이십니다.  우리들을 인(仁)으로 대하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들을 비뚤어짐들로부터 풀어주시는 이에게, (심지어 우리를 나라와 하나님 곧 그이의 아빠를 향한 제사장들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한) 그이에게 뚜렷과 힘이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있을 것입니다). 아멘.

  보십시오, (그이가) 구름들과 함께 가십니다, 모든 눈이 그이를 볼 것이며, 심지어 그이를 찔렀던 이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지파들은 그이를 향해 애곡할 것입니다. 네, 아멘. "바로 내가 ㄱ이고 ㅎ이다." 주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계시고, 계셨으며, 오실 분이며, 전능자이신 그 분이.

  나 요한, 여러분의 가족이며,  예수 안에서 (우리의 것인) 그 '압제와 다스림과 견딤'에 (여러분과) 함께 코이노니아 했던 나는, 하나님의 로고스와 예수에 대한 (법정)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 불리는 섬에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의 날에 숨으로 있게 되어, 내 뒤에서 마치 나팔이 말하는 것 같은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으로 기록하고, 일곱 에클레시아에 보내라,

  곧 에페소스, 스뮈르나, 페르가모스, 튀아테이라, 사르데이스, 필라델피아, 라오디키아에."

 

  그리고 나는 누가 내 곁에서 소리를 말한 것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섰더니 일곱 금 촛대를 보았고, 촛대들 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가,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이의 머리와 머리카락이 양털같이, 눈 같이 하얬고, 그이의 두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으며, 그이의 두 발이 용광로에서 타오르는 금같이 빛나는 주석같았고, 그이의 소리가 많은 물소리 같았고, 그이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들을 들고, 그이의 입으로부터 예리한 양날검이 밖으로 나왔고, 그이의 뵘이 그이의 힘 안에서 빛나는 해 같았습니다. 내가 그이를 보았을 때, 그이의 발 앞에 죽은 사람처럼 엎드렸습니다.

  그이의 오른손을 나에게 얹으시며 말씀하시길,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끝이고, 산 이고, 죽어 있었으나, 바로 나는 산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그리고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네가 본 것들과 있는 것들과 그것들과 함께 곧 될 것들을 기록하라. 네가 내 오른손에서 보았던 일곱 별들로부터 뮈스테리온이 (있다), 그리고 일곱 금 촛대들도 (네가 보았다). 일곱 별들은 일곱 에클레시아들의 천사들이고, 일곱 촛대들은 일곱 에클레시아들이다."


  메시아는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나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기로는 에클레시아는 약하기만 한 것 같고, 현시대로 오는시대가 돌입했다는 충격적인 진술은, 우리의 일상 차원에서 다 무의미로 소멸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계신 메시아는 어려움을 견디는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고, 그의 왕권에 참여하는 에클레시아는 같은 방식으로 이 땅을 고쳐 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새 성전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 성전을 메시아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진실을, 계시록은 선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그 다스림의 결말을, 온 에클레시아가 기다리고 있고, 그 기다림은 우리가 계시록 2장을 넘겨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응형

'요한계시록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3:1~6  (2) 2016.03.03
요한계시록 2:18~29  (2) 2016.03.02
요한계시록 2:12~17  (4) 2016.02.29
요한계시록 2:8~11  (5) 2016.02.29
요한계시록 2:1~7  (5) 2016.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