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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를 봅시다. 바울이 로마에 보냈던 편지, 바울신학의 정수, 종교개혁의 모태. 위대한 신학자들이 붙잡았던 것은, 늘 <로마서>였습니다. 폭발적인 복음의 메시지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지엽적인 내용까지 다루며 로마서를 분해해놓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공동체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고작 3주간 강론을 들었을 뿐인데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충분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바울이 전달했던 교육이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성경과 세상을 읽어내는 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세계관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스스로 로마서를 읽고, 읽어서 깨달은 내용을 삶으로 구현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읽기입니다. 그 정도면 됩니다. 그 정도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로마서> 전체를 그림으로 그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홀로 읽어나가더라도, 내가 어디쯤 있다는 것을 알면,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앞으로 지나갈 길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단어의 숲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고, 길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4장/5~8장/9~11장/12~16장 입니다.
1~4장에 대해서 훑어봅시다. 1:1~17에서 바울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미리 밝히며 편지를 시작합니다. 그 주제란 '복음'과 '하나님의 의'입니다. 압축된 언어로 이 내용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 내용만 봐서는 우리는 무슨 내용인지 바울의 생각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뒷 내용을 알고서 이 내용들을 보면, 이 <로마서> 첫 부분의 내용이, 바울의 고심 끝에 나온 탁월한 요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 첫 부분은 한 번 스윽 읽고, 뒷 부분부터 하나하나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주제를 밝히는 내용 이후에는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됩니다. 1:18 부터인데, 창세기 3장이후 이어지고 있는 인간 타락의 실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이 심판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모든 인류에 대한 심판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4장에 들어서면,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닥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힙니다.
5~8장에서는 타락과 아브라함 이야기를, 더 큰 이야기 즉 아담 이야기로 시작해서, 홍새를 건너고, 시내산에서 토라를 수여받는 그림 위에 놓습니다. 그리고 이 구약의 이야기가, 결국 메시아 예수 안에서 인간과 우주가 새로워지는 내용이라는 감격스러운 결론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야기 안에는, '숨님'이 계셨고, 이 숨님이 그 새로움의 원동력이었음이 드러나고, 이 숨 곧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어서 9:1에서 11:36에서는, '그럼 언약이 이뤄짐에 있어서, 본래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유대인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그리고 '온 이스라엘' 구원이라는 로마서의 결론을 제시합니다.
12:1부터 16:27은 앞에서 바울이 풀어놓은 내용을 믿는 이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즉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할 것없이, 예수의 이름 안에서 연합하는 '숨생활', 그리고 '예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정도 설명으로는 로마서의 진가를 밝히기에 한없이 부족합니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1. 1:1~17에서의 질문
1:1~17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일단 다음의 키워드들을 던져놓습니다. 바울이 서론에 던져놓은 단어들은,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체 내용을 짧은 단락에 요약하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들을 밀집시켜 문단을 구성합니다. 따라서, 이 문단부터 파고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은, 이 주제를 나타내는 문단을 건너 뛰고, 그 다음 문단부터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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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해놓고서 1:18절부터 시작하는 로마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33일이 걸려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확인했고,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1~17이 주제를 담은, 압축된 단어로 구성된 서론이라면, 우리는 그 주제를 이미 확인하고 왔으므로, 이 서론을 통해서 바울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1:1~7
메시아이신 예수의 노예, 나 바울은 사도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분리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자기 아들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 아들은 살몸으로는 다윗의 씨로부터 나셨고, 거룩한 숨으로는 죽은 이들로부터 다시 일어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올곧게 세워졌으니, 이 분이 곧 예수, 메시아,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믿음의 잘 들음이 나타나게 하려고, 예수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도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앞에서 말한 민족 중 하나입니다. 즉 메시아 예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라는 장대한 이야기를 펼쳐놓기에 앞서, 그 시작을 얼마나 고민했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고민은 이 첫 다섯절의 구조에도 드러납니다. 메시아 예수로 시작해서, 자신의 부르심을 지나, 복음 즉 하나님 아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우리의 부르심을 지나 다시 메시아 예수에 대한 언급으로 끝납니다.
이 구조 속에서, 바울은 앞으로 길게 이어질 로마서에서 다룰 키워드들을 미리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서론에서 제시한 단어들을, 뒤에 이어지는 로마서 내용에 비추어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메시아, 노예, 사도, 복음, 구별, 아들, 살몸, 다윗의 씨, 거룩한 숨, 일어나시어, 주, 모든 민족, 믿음의 순종...
-메시아이신 예수
대개 '그리스도'라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굳이 '메시아'라는 히브리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낯설어야 그 의미에 대해서 궁금해하게 됩니다. 낯설지 않은 언어는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황 성도님만이 이 단어를 해설하고 있는데,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로 풀었습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세상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자(시편 72:8~11, 89:27, 이사야 11:1~4)'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본래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말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예수를 메시아가 되게 하셨다(사도행전 2:36)"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로마서는 '비참하게 죽임당했던 인간 예수가 세상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분이다'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노예
다른 황 성도님은 이 단어를 "꼬봉"이라 번역합니다. 그러나 "꼬봉"이라고 하면 다소 비하하는 의미가 들어있지만, 당시 노예는 비하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의 노예는 단지 어떤 권리, 재산, 미래도 없이 그저 단순히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메시아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그 분께 자신의 권리, 재산, 미래가 모두 걸려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부름받은 사도
'사도'는 직역하면 '보냄받은 사람'이 됩니다. 즉 예수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사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사도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1). 황 성도님은 "적통 제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를 직접 만났으니 '적통'인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이는 '사도'는 아니지만 부름은 받을 수 있습니다. '부름받다'를 흔히 '소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소명'은 루터의 직업소명설을 따라 직업으로 설교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부르심, 곧 소명은 직업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16, 17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화로 부르셨습니다.
아내여! 어찌 알겠습니까, 남편을 건져낼지 아닐지.
남편이여! 어찌 알겠습니까, 아내를 건져낼지 아닐지.
우리는 누구나 주님이 경계 지어주신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자신의 삶을 꾸려가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단호히 말한 바 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경우를 언급하며, 이 구절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두 부부가 살다가 어느 한 쪽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혼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름받음은 자신의 처지나 타인과 맺고 있던 관계가 끊어져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경계 지어주신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생활이 하나님께서 지어준 경계일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주어진 경계 안에서 신실할 뿐입니다. 그 경계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문제이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경계를 그으려고 했던 것이 유대인의 문제, 곧 남을 판단하는 문제였습니다.
긍휼 그릇인 에클레시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경계를 넘지 않으며, 선하신 그 계명을 준수해나갑니다. 그리고 신의 경계를 염두하며 사는 것만이, 모든 인간적인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바울이 강조하던 바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분리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르신 이 경계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리"라 번역한 말은, '바리새인'이라고 말할 때, '바리새(아람어 perish)'와 같습니다. 즉 '바리새인'은 '분리된 사람'입니다(빌립보서 3:5). 더러운 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메시아 예수를 만난 이후, 자신의 분리를 새롭게 읽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분리되었고, 이것이 바울의 경계입니다. 경계 안에서 신실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어주신 새로운 경계는 죄인들로부터의 분리가 아닌 죄로부터의 분리, 죄인들을 또 그 죄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 '분리'를 '택정'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탈굼들이 '선택'의 의미로 번역하셨음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선택해야 분리도 하겠지만, 단순 선택과는 달리, '분리'는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었는가'를 묻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분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두면 좋을 듯 합니다.
갈라디아서 1:15, 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분리시키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이 본문에서도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분리시키시고" 입니다. 즉 자신이 출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분리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사실 분리는 출애굽입니다. 나를 얽매고 있던 것으로부터의 분리이니 말입니다.
*2017.3.3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들>에서 본 내용을 정리해둡니다.
-분리된
제가 "구별된"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아포리조(aphorizomenos)"인데, 아감벤은 분리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강경하게
대처했던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분리를 말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갈라디아서 2:14). 그것도 이사야 52:11을
인용하면서까지.
아포리조는 히브리어로는
'파르쉐'인데, 이 단어에서 '바리새인'이 나왔습니다. 즉 바리새인은 구별된 사람이고,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빌3:5). 바리새인은 율법을 모르는 "암-하아레쯔(땅의 백성들)"로부터 구별되며, 바리새인 자체가 율법의 경계를
나타내는 인격으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자신을 분리된 자라고 말하는 것은, 분리를 분리시켜버리는 새로운 분리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2:14의 막힌 담을 헌다는 말과 같습니다.
노모스는 분할합니다. 백성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임'도 언약 백성인 '암'과 그 밖의 민족들인 '고임'이 더해진 말입니다.
LXX에서는 '암'을 라오스로, 고임을 에쓰네로 번역합니다. 노모스가 만들어내는 이러한 분할이 메시아를 통해 다시 분할됨으로
소멸되고, 사도는 그 분할의 경계에서 분할 무효를 주장하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서 있습니다.
카발라학자들은 토라를 옛창조의 법인 베리아Beriah 토라와 메시아가 일으키는 법인 아칠루트Atzilut 토라로 구분합니다.
전자가 민족들과 언약백성을 구분한다면, 후자는 분리 속에서 메시아께서 행하신 분리를 통해, 자아의 분리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합니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사륵스/프뉴마의 절단면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그냥 복음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식", "복된 소식", "좋은 소식" 이란 번역어들이 눈에 띕니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왕위 등극의 소식입니다. 악한 왕이 다스리던 곳에서,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야 말로 "복된 소식"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일루리곤까지 최선을 다해 전했던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왕(메시아)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오르니, 악한 압제자는 심판 받고, 포로생활은 종결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얻은 이들이 새로운 시간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로마서 5~8장에 이르는 이야기는 왕이 바뀌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장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끝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시온)으로 돌아오실 것이고, 악을 심판하실 것이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약 예언들의 성취로서, 에수께서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개시하셨다는 천국복음의 선언인 것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던 것입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자기 아들에 대한 소식입니다."
사도행전 3: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살몸과 거룩한 숨
살몸은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 짓는 일에 너무 취약한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더불어 '혈통'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적으로"라고 번역했는데, NIV도 같은 용례로 번역했습니다("as to his human nature"). 그러나 사륵스는 "한편으로는 타락하기 쉽고 부패하고 죽어야 할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반항하고 속이고 괴를 짓는 건으로 간주되는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인간성이 아닙니다.
여기서 살몸과 거룩한 숨의 관계는 대비가 아닙니다. 살몸은 인간적인 것이고, 거룩한 숨은 신적인 것이란 말이 아니라, 살몸은 좌표설정이고 거룩한 숨에 의한 부활은, 그 좌표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곧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로 올곧게 세워진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별시킨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는 나무에 달려 율법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죽었으나, 성령에 의한 부활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저주의 판결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1
유대인들에게는 단체부활이, 오는시대(올람하바)를 가져올 것이란 소망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 홀로 다시 일어났고, 이것은 올람하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신실함의 잘 들음
개역성경은 "믿어 순종하게 함"으로 번역하지만, 라이트는 '신실함을 구성하는 순종(the obedience which consists in fauth)'로 읽는다. 또한 휘포쿠오는 신명기 6:4,5의 쉐마를 반영하고 있습내다. "이스라엘은 들으라!" 모든 민족들이 이제 단 하나 뿐인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부름을 받고 있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민족적 혈통과 상관없이, 신의 말을 잘 듣는 신실한 삶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하나의 사랑하심을 입은 로마의 모든 사람,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왕이신 주 예수를 '힘입는 삶(χάρις)', 그리고 평화(εἰρήνη)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앞에서 자신은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받는 로마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을 가리켜 '에클레시아'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는 메시아 예수로부터 힘입고 이 땅에 평화를 구현합니다.
로마서 1:8~13
먼저 내가 왕이신 예수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 대해서 내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은,
전체 코스모스가 여러분의 신실함에 관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면 언제나 쉬지 않고 여러분을 말합니다.
(이 일의 증인은 그 아들의 좋은소식 안에서
내가 나의 그 프뉴마로/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하나님 뜻 안에서 어떻게든 여러분에게 갈 수 있게 해갈라고
계속해서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숨에 속한 카리스마를 여러분에게 나누며,
여러분을 건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여러분들 안에서 나와 여러분들이 가진 신실함으로
위안을 얻습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여!
내가 몇 번이고 여러분에게 갈 계획을 세웠지만,
(내가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열매를 거둔 것과 같이,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까지 항상 무슨 일이 벌어져 길이 막혔음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로마서 15장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스파니아로 가겠다는 자신의 선교계획을 밝히고, 또 로마 공동체를 방문하겠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것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을, 이방인 공동체들이 돕는 '연보 프로젝트'였습니다. 바울은 '열매'를 거두고자 합니다. 이 열매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돕기 위한 모금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방인 공동체들이 돕는다' 이 내용은,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인지 하지 않고서는 당대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희랍 사람 기준으로는 '지혜있는 사람'과 '지혜없는 사람(야만인)', 유대인을 기준으로는 '토라 있는 사람'과 '토라 없는 사람'으로 세계 전체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종을 초월하는 공동체가 출범했고, 그 공동체 안에서 '거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은, 제국조차 엄두를 내지 않던 일입니다.
로마서 1:14~17
지혜 있는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에게 다 빚진 자입니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좋은 소식 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은 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신실한 사람에게
구원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그리고 희랍 사람에게도.
왜냐하면 좋은 소식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폭로되어,
신실함으로부터 신실함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말입니다
"의인은 신실함으로부터 살 것이다.”
바울은 세계를 양분하는 희랍인들의 구분을 언급합니다. "희랍 사람이나 희랍 아닌 사람이나" 그렇다면 전세계 모든 사람입니다. 희랍인들은 자신들은 지혜있는 사람으로, 그 밖에 사람들은 지혜 없는 야만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러한 구분이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져 있는,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빚"과 "할 수 있음"에 대해 바울은 15장에서 언급했습니다.
로마서 15:1~13
우리 '할 수 있는 이들'은 '할 수 없는 이들'의 굳건히 서지 못한 면들을 짊어져야 할 빚이 있습니다.
바울은 할 수 있기에,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왕의 소식입니다. 새로운 왕이 등극했기 때문에, 현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죽음을 공리로 받아들이는 희랍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나무에 달려 죽은 자를 율법에 저주 받았다고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을 돌파합니다. 진실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린도전서 1:18, 개인번역
십자가의 로고스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신실한'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나 희랍 사람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순서는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 분이 유대에서 나셨기 때문에, 복음이 시작되는 좌표는 유대입니다. 그 복음이 분명해지는 순간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는 모든 민족의 주가 되십니다.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폭로되어, 신실함으로부터 신실함에 이르게 한다" 톰 라이트는 전자의 신실함을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후자의 신실함을 인간의 신실함으로 읽습니다. 타락을 해결하는 언약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 신실하셨던 예수, 그 예수의 신실함으로 살아가는 에클레시아,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성령.
'하나님의 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법정적 의미와, 오는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종말론적 의미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언약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의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 폭로(계시)되었고, 사람이 예수의 신실함을 닮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의 서문을 하박국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 짓습니다.
"의인은 신실함으로부터 살 것이다."
하박국 2:2~4,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전령이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박국 2장은 이것이 '묵시'라고 말합니다. 정해진 때가 되면 이뤄지는 말입니다. 갈대아인들의 침략 앞에서 유다는 여전히 교만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하박국의 이어지는 구절은 왜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했는지의 의도를 더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박국 2:5, 새번역
부유한 재산은 사람을 속일 뿐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거만하고,
탐욕을 채우느라고 쉴 날이 없다.
그러나 탐욕은 무덤과도 같아서,
그들이 스올처럼 목구멍을 넓게 벌려도,
죽음처럼 성이 차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모든 민족을 사로잡지만...
바울은 하박국의 묵시대로 끝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베드로가 말하는 "끝날들"입니다. 그리고 끝날들 속에서, 여전히 비뚤어진 인간성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박국의 묘사는 바울과 유사합니다.
로마서 3:10~18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모두가 한 쪽에 치우쳐 쓸데없는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그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에는 속임이 있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심한 말이 가득하고,
그 발걸음은 피 나게 하는 일에 바쁜지라.
부서짐과, 비참함이 그 길에 있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 채로,
그들의 눈 앞에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으로"를 "믿음으로부터"로 의도적으로 수정합니다. 즉 삶의 방식으로서의 신실함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작점으로서 신실함이 강조점을 갖게 됩니다. 그 신실함으로부터 (새) 삶을 시작하는 이들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서 그러한 의인들이 생겨나는 새로운 시절이, 곧 끝날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인들의 탄생은 진노의 그릇들 마저도 구원하시기 위한(유대인을 포함하여), 끝날들 속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법이라는 사실도 바울이 뒤에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출처: http://jaeduggi.tistory.com/821 [아, 우주는 겁나 우아하
- <로마서>, 톰 라이트, p. 45, 에클레시아북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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