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단락(2:17~29)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토라를 지키는 것'에서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바울의 방식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토라를 지키는 일에 완전히 실패했음에도, 민족적 자부심의 '자랑'은 붙들고 있어서,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도록 하는 일의 선봉에 언약백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이 에스겔 36장의 포로기의 맥락과 일치한다는 사실도 보여주었고, 토라를 지키는 것없이 할례를 받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실패이후,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내용입니다.
로마서 3:1~8
그렇다면 유대사람에게는 무엇이 좋습니까? 진정 할례의 취지는 무엇입니까? 매우 많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이 알리고자 하시는 이야기를 맡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실패한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아,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로 임명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임무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서사의 전달'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알리고자 하시는 이야기'를 개역성경에서는 '계시'라 번역했습니다. 원어로는 로기타로 '신탁'이라는 의미입니다. 델포이에서 소크라테스가 받았다는 신탁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다만 경구나 문장이 아니라, 토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우편 배달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의 서사를 모든 민족에게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패했을지언정, 아직 실패한 이들이 전달한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을지언정, 그 이야기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말할 참입니다(9:6) 그러나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얘기는 잠시 뒤에 하도록 하고, 일단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 뒤에 이어지는 질문들을 먼저 처리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 일부가 그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신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며, 모든 사람은 거짓됩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당신이 당신의 말씀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당신이 법정에 서실 때에 승리를 얻으시리라!"
그 이야기 안에서 이스라엘은 중요한 배역을 맡았습니다. 온 우주와 인간의 창조, 그러나 사람이 저지른 타락과 세계의 망가짐,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맺으신 언약. 그리고 그 언약의 후손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하나님이 등판시킨 구원투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토라를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빠르게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시편 51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나서 회개하는 유명한 내용입니다. 죄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다윗의 고백을 바울이 인용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앞서 봐왔듯, 그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단편적인 근거로 이용해 먹자고 가져오는 것이 아닌, 그 뒤의 깔린 서사 전체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절 뒤에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십시오" 하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앞서 '기이한 사람'이라 표현했던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게다가 반역하는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포로기 해방의 그림 또한 뒤에 등장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러한 내용의 흐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밝히지 않은채(어쩌면 우리에게는 감춘 것으로 보이지만, 구약성경에 능통했던 유대인들이라면 대번에 알아챘을 내용일 것입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의 불의함으로 뚜렷해진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할 것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참되심이 나의 거짓 속에서 더 풍성하게 드러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내가 죄인으로 판단 받는 것입니까? 혹은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비방하듯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 고 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세한 설명 없이, 시편 51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판결은 옳다'는 결론만을 제시하고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왔습니다. 이어지는 문장들은 법정에서 다루는 세밀한 문장들이니 정신 차리고 읽어나가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해,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하나님은 사람과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
는 반론입니다. 오히려 더욱 실패하고 악을 행해서, 하나님의 옳으심을 더하도록 하자는 비아냥 또한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시 또 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잘 들여다 봐야 할 문장이 등장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참되심이 나의 거짓 속에서 더 풍성하게 드러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내가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바울 자신의 옛모습이기도 한 실패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같은 수사적 방식을 로마서 7장에서도 사용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참되심이 이스라엘의 토라를 지키지 못하는 실패 때문에 더 풍성하게 드러났다면서(이 말은 사실이면서도 참으로 기이한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곧 밝혀질 것입니다), 왜 여전히 이스라엘이 죄인 취급 당하느냐는 것입니다(바로 앞 본문에서처럼). 여기서 '죄인'이라는 단어는 '하마르톨로스'로서 토라의 도움을 전혀 얻지 못한 이방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입니다. 그들의 실패가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냈는데도 왜 토라를 소유한 유대인이 열등한 이방인 취급당하고 있냐는 물음입니다.
저 굵은 글씨로 표시한 말은, 예수 공동체가 실제로 주장하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는 반응은, 저 예수 공동체의 주장을 오해한 이들이 하던 비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문장 사이에는 분명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문장을 만족시키면서도, 두번째 문장을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바울은 이제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오늘 본문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찜찜한 질문들만을 남기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에는 바울의 전략이 숨겨 있습니다. 이 3:1~8의 질문들은, 앞으로 진행될 로마서 내용의 논리적인 틀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기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의 의미는 무엇인가? -9:1~5
이스라엘의 실패는 언약 이야기의 실패인가? -9:6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9:14
어째서 내(이스라엘)가 여전히 심판을 받는 것인가? - 9:19
같은 질문들이 로마서 9장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이 질문들의 해결을 위해서 로마서 나머지 내용들을 준비했습니다. 7장은 9장으로 이어지는 논리들을 준비하고, 9장 이후 11장까지 바울은 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그러니 당장 답답하더라도, 일단은 질문들을 기억해두고, 인내를 가지고 다음 장을 읽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기까지, 바울은 '그 기이한 일'이 어떠한 일인지를 밝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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