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1:18부터 이어지던 내용의 절정에 해당하는 단락에 들어섰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앞에서 창세기 타락의 모습을 분석했습니다. 창조주와 단절된 사고방식을 지혜라 여기고, 피조물을 숭배하는 그릇된 행동 속에서 뒤집힌 가치들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인간화의 삶의 정점은 남을 판단하는데 있었고, 이 모든 비인간화는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락에 들어와 확인하는 충격적인 진실은, 이 모든 고발의 내용들이 이스라엘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로마서 2:17~29
그러나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대사람'이라 칭한다면 말입니다. 즉 당신이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자랑하고, 그 미래에 이뤄질 바를 알며, 율법에 의해 지시된 것들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스스로를 가리켜 믿기를, "나는 율법 안에 있는 앎과 진리가 구현된 자라서, 눈먼 사람의 인도자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야" 라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들은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토라'를 수여받았습니다. 그들은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자랑'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뽐냄이 아닙니다. '드러남'입니다. 즉 하나님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 곧 자랑이고, 창조주와 연결되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랑'하는 것을 자랑(여기서는 부정적 의미로)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먹게 만드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발생했습니다. 즉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전적인 실패. 이것이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자택일의 곤경 속에서, 토라을 실천하는 제 3의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그러한 토라의 구현(모르포시스), 곧 살아있는 토라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은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 뜻따라 사는 창조의 인간됨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언약백성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잃어버린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도둑질합니까?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간음합니까? 우상을 몹시 싫어하면서도 자신은 이교도들의 신전을 텁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어겨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구나!''
그들의 문제는 이미 바울이 앞서 지적했던 타락의 징후들 그대로 입니다. 자신들은 토라를 행할 수 없으면서도, 그 토라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언약백성이 가장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질, 간음, 자신들이 토라의 원리를 가르쳐야 할 이교도들에게, 오히려 악행으로 맞서는 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어기는 가치 전복의 문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끊어진 징후들이, 언약백성이라 자랑하던 이스라엘의 삶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든 유대인들이 죄인이다'라는 반유대주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지금 세상의 빛이 되는 데에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그렇다면 다시금 바울은 사람 사이에 금을 긋고, 남을 판단하는 죄를 짓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어떠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를 설명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곤경, 즉 타락의 문제가 언약백성 마저도 집어삼켰다는 역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구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어찌 되었는가?' 이것이 바울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줄에 인용된 구절은 이사야 52:5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52장의 서사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의 저러한 모습은 그들이 아직도 포로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토라를 가지고 언약 백성이 벌인 일이 가장 치명적인 비뚤어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악의 노예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내용이 나오는 에스겔 36:20~23의 맥락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본문에서 인용했던 "마음에 새긴"의 앞 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즉 포로로 붙잡혀 있는 언약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쓰라린 내용이 나오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출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렇듯 바울은 성경 구절들을 구체적인 설명없이 던져놓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맥락을 모두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구약성경의 맥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글자로 써있지는 않아도 놓칠 수 없는 의미의 층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이사야 52:5 이후의 내용 역시 포로기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왕이 오신다는 '복음을 전하는 복된 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 내용은 뒤에 로마서 10:15에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단편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절들 뒤에 놓인 서사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대한 이야기의 맥락 위에서 현실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행한다면 할례는 유익하겠지만, 만일 율법을 어긴다면, 할례는 소용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할례받지 않은 이방사람이 율법이 선언하는 바를 올곧게 지키면, 그 무할례자를 할례받은 사람처럼 여겨야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태어났을 때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 규정과 할례를 근거로 율법을 어기는 이스라엘을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것과 할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행할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것에 의해 언약백성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곧 할례입니다. 즉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기로 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행하는 것이 먼저요, 할례는 나중입니다. 마치 원산지 표시와 같습니다. 그 원산지에서 나면 스티커를 붙여주듯,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할례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것이 뒤집혔습니다. 원산지가 다른데도 언약백성의 스티커를 붙여놨습니다. 그리고는 스티커가 붙었으니, 나는 언약백성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율법을 어기는 것의 핑계가 될 수 없고, 더군다나 할례 자체가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이들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표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기이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입니다. 그런데 토라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고 있지만, 실상 따져보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정체성의 근원이므로, 만일 이방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면, 오히려 그가 이스라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잘못이란 다름 아닌,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토라를 스스로 어기고 있다는 점이 될 것입니다.
즉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성경 전체 이야기를 다시금 생각해볼 것을 요구합니다.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이, 이 거룩한 숨결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어떤 결말을 이루게 될 것인가?' 바울은 그림을 다시 그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사람은 눈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할례는 살가죽에 보이게 해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사람은 비밀스럽게 감춰져있으며, 할례는 규정이 아닌, 하나님의 숨결 속에서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사람으로부터 있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그 기이한 사람이란 바로 이방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을 '유대인'이라 부릅니다. 눈에 보이는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그가 진정으로 유대인입니다.(빌립보서 3:3) 유대인은 율법을 지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랑이라는 유대인의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린 이유가 이 단순한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유대인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새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지 않고, 토라를 소유한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인지, 마음이 새로워졌고, 율법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마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할례와 같이, 새로운 정체성의 표지를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숨결, 성령입니다. 그 숨결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므로, '비밀스럽게 감춰져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다루었던 여러 내용들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자신의 현재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즉 율법을 지킬 것을 추구하는 이의 정체성이 곧 성령이 주시는 새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유대인이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람이 타락을 뒤집을 수 있는 하나님의 카드입니다. 창조주와 숨으로 연결되어, 그 지혜와 생명의 풍성함을 가지고 고난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중요한 질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행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편지들 > 로마서 연구 v.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3:9~20 (4) | 2015.05.21 |
---|---|
로마서 3:1~8 (2) | 2015.05.21 |
로마서 2:1~16 (2) | 2015.05.21 |
로마서 1:18~32 (2) | 2015.05.21 |
로마서 1:1~17 (2) | 2015.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