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서론(1:1~17)은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면서도, 주제를 제시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지면에 모든 내용이 오밀조밀 배치되다보니 여러 의미의 층위들이 압축되있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내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론을 제외한 로마서의 나머지 내용들을 모두 살펴본 뒤, 가장 마지막에 서론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론을 건너 뛰어, 1:18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로마서 1:18~32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옳지않음과 불경함에 대하여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다운 것이 그들 속알에 있습니다. 질서잡힌 창조세계부터 그의 행하신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보이지 않는 성스러움이 인지되었고, 또한 그 끝없는 힘과 하나님다움도 알려졌으니, 그들이 무시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드러내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의 생각이 공허해지고, 미련함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기에 어리석게 되어서 썩지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의 꼴들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바울은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났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떨수록 오히려 말 뿐이고, 별 일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만, 성경에서 '하늘'을 언급할 때는 과장하기 위해 으레 쓰는 수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의 주제가 '하늘'과 '땅'의 하나됨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드러났다는 표현은 하늘과 땅이 만났다는 말이고, 하늘의 감춰져있던 진실이 마침내 땅에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계시(revelation)입니다. 베일에 감추어진 것이 마침내 폭로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뚜렷이 이 땅에 드러났단 말입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십자가에서 확인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었던 예수를 거룩한 숨으로 일으키셨고, 예수는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인자 이야기의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자 이야기에서 인자는 이 땅을 괴롭히던 짐승들이 심판받은 후, 하늘로 올라, 우주의 심판자로 선언되는 존재입니다. 즉 예수는 인자입니다. 인자 이야기는 정말 현실로 이뤄진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자이신 예수는 온 우주의 심판자로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맡은 대리자입니다. 예수의 판단은 현재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올 최후의 심판의 주재자도 곧 그이 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심판은, "사람의 은밀한 것까지 다루는" 심판입니다(2:16). 누군가로부터 판단받기를 싫어하는 현대인은 학을 떼겠지만, 이 문제를 정의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심판은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은 인정받고, 그른 것은 처치되는 순간이 곧 예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서 하늘의 일이 밝히 땅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으면서도, 그릇된 생각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경탄합니다. 그 속에서 창조주를 닮은 깊고 오묘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조주께로 향하지 않고 막혀있습니다. 창조주께 이르지 못하는 그들로 인해, 하늘과 땅은 막혀있습니다. 그들이 붙잡은 지혜는, 근원이신 한 분으로부터 끊어진 지혜입니다. 마치 창세기 3장의 뱀이 말하는 지혜와도 같습니다. 창조주 없이, 선악을 분별해보려는 타락의 단초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도 밀어냅니다.
그렇게 창조주를 밀어낸 사람에게 발생하는 타락은 행동 이전에, 사고방식의 문제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을 알면서도 드러낼 수가 없고,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생각은 공허해지고,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릇된 사고방식은, 피조물을 숭배하게 만듭니다. 마치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에게 절하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예수가 심판자로 드러난 상황 속에서, 예수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예수 아닌 다른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심판자 예수의 존재가, 비뚤어진 우상숭배자들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거절 자체가 현재에서 이뤄지는 심판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의 유죄판결이 미리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셔서,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욱 경배하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곧 영원히 찬송할이십니다. 아멘.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세 가지의 내버려두심이 등장합니다. 이 내버려두심은 현재적 심판을 표현하는 성경의 용어입니다. 이것은 가장 끔찍한 일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그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된 사고방식은 그릇된 행동을 낳고,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사람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채 비인간화로 나아가게 됩니다. 창조주와 끊어진 인간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피조물 숭배 곧 우상숭배입니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그들의 몸을 질적으로 저하시키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은 오히려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섬기기를 거절한 인간은, 자신을 피조물 숭배자로 스스로 전락시킵니다. 바울은 이러한 진술을 하다가, 갑작스레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충성을 고백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으니, 여자들마저 순리적인 성관계를 역리로 바꾸었으며, 남자들도 여자와의 순리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했습니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스스로 받았습니다.
두번째 내버려두심입니다. 창조주를 알면서도 거절했던 사람은 그릇된 사고방식 속에서 피조물 숭배자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성애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동성애에 대해서 자주 논의되는 구절입니다. 어떤 이는 이 본문이 이교도의 부도덕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선천적인 동성애자들이 아닌, 고의로 동성애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말하지만, "그러므로", "이 때문에"로 연결되는 본문의 논리적인 구성은, 그러한 해석을 지지해주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피조물 숭배의 일반적인 형태로서 동성애가 등장합니다. 즉 창세기 3장의 창조주를 거절하고서 붙잡은 지혜가, 이제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원리 마저도 왜곡시키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이 본문이, 동성애자들을 우상숭배자로 매도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 그러한지는 내일 다룰 로마서 2장 떄문입니다. 그릇된 사고 방식과 피조물 숭배와 동성애를 언급한 바울은, 가장 강도 높은 비판을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것을 내일 확인해봅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한 분 모시는 것을 적합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그 한 분은 그들을 부적합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부적합하게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거만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분별없고, 신의 없고, 인정 없고, 자비 없는 자입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한 분께서 정하셨음을 알고서도 그런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옳다고까지 합니다.
세번째 내버려두심입니다. 첫번째 문장에서 바울은 워드 플레이를 통해서, 창조주를 거절한 이들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한 분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기를 거절했을 때, 생각도 행동도 부적합해집니다. 즉 첫번째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비인간화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비뚤어짐으로 푼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윤리 목록들을 던져놓고, 그대로 살지 않아면 처벌하겠다는 고약한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는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비인간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특정 행위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비인간화로부터 자유로운 생각과 삶이 없다는 것이, 인간 전체의 실패입니다.
바울은 이 비인간화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저 묘사가 내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릇된 사고방식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바울의 말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예수의 심판은 바로 그것을 물으실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은밀한 것, 마음의 문제도 예수의 심판을 비껴나갈 수 없습니다.
비인간화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알고서도.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은, 이제 비뚤어진 자신을 정당화하고, 진리 자체를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인류가 처한 곤경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입니다. 그릇된 사고 방식이 온전해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객관적 관찰과 추론으로 얻은 앎도 아니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거짓도 아닌, 진리와의 만남, 사고의 새로워짐. 인간에게 이러한 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16
성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 식별되는 것이므로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께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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