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보았던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남(1:18)" 의 내용을 마무리 하는 단락입니다. 어제 비인간화의 현재적 심판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오늘은 미래적 심판 곧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다룹니다.


로마서 2:1~16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누구이든지 남을 판단할 때에는,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심판자 행세하는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공명정대하게 이뤄지는줄 압니다. 남을 판단하면서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제 동성애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가장 비판받을 사람은 따로 남겨두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비인간화의 정점에 등장합니다. 즉 남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비인간화가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는 것이라면, 남을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고, 스스로 심판주가 되려는 가치 전도가 가장 큰 질서의 전복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비뚤어짐에서 벗어난 이는 없는데도, 자신은 그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쓰고 남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 비뚤어짐이 더 합니다.


  그렇다고 반대의 경우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옳다고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느끼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를, 교만과 겸손의 윤리적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드러내느냐 감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판단자로 두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자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지혜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분리된 지혜인지가 관건인 것입니다. 


  만일 '심판'이 부정적인 말로만 들린다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그 분의 판단 역시 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선하신 한 분의 판단과 역사 아래서 이뤄집니다. 따라서 악의 문제 속에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곧 광복의 소식일 것입니다. 더불어 습관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소식일 것입니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그 선하신 심판을, 이 땅으로 가져오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 선하신 심판을 미래로 밀어내는 것은, 기독교를 종교 따위로, 민중을 위한 복음을 아편으로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당신의 회개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입니까? 완고한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드러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분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아직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인자하십니다. 비인간화의 길을 돌려, 한 분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람이 새롭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 날'을 말합니다. '그 날'이란 '야훼의 날', '주의 날'로 불리는 최후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 날에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 심판의 기준은 각각의 '행한 대로'가 될 것입니다.(시편 62:12; 잠언 24:12)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둘 사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말은, 행위를 배제한 신념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고 따름'입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따르지 않은 사람의 죄가 믿지 않고서 따르지 않은 사람의 죄보다 더 큽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뒤에서 상술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지점 역시, 토라를 이루지도 못하면서, 토라를 부적처럼 소유하고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라 크게 오해한데 있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성령으로 인한 마음의 새창조, 그 새창조로 살몸을 굴복시켜 올바른 행실의 열매를 맺음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새로워진 마음과 행실로 칭찬을 받을 것이고, 누군가는 구원 주신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추잡한 삶으로 치욕을 당하게 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참을성 있게 선을 행하므로,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할 때, 한 분은 그들에게 '오는 시대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편을 나누고, 진리를 따르지 않으며,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따를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인격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니니,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희랍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고, 그에 걸맞게 가치롭게 여겨지며, 싸움없이 하나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또한 희랍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공통점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에 의해 자신이 누구인지가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얻지는 못했으나 추구할 때' 그는 마침내 그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의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비인간화를 추구한 이가 얻는 것이라곤 진노와 격분 뿐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율법 밖에서 비뚤어진 사람은 율법 밖에서 심판 받을 것이고, 율법 안에서 비뚤어진 사람은 율법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율법을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롭다고 선언되는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지 못한 이방인은 율법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은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족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이루는 삶 없이, 특별하게 더 이쁨 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이루는 삶이 없다면, 기독교인이라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앞 문단에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은 유대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동적으로는 믿어 순종에, 정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새창조의 결과물인지 아닌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모두 그 중심에는 숨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앞에서 바울이 말한 비인간화의 모습으로는 상상할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이루는 것은, 언약백성 이스라엘에게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넌지시 언급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실천에 이르기까지 율법을 실천할 수 있는, 심지어 토라가 없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에 대해 던져 놓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바울이 앞으로 써내려갈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이방사람은 날 때부터 율법이 없지만,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행할 때마다, 율법이 없더라도 자신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고 때로는 변명하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포하는 복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는 그 날에 말입니다.


  본문의 '날 때부터'는 개역개정에서 "본성으로(14절)"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어디를 수식하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는데, 톰 라이트는 "율법이 없는"으로 수식합니다. 이것은 2:27의 용례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의미는 이러합니다. 태어날 떄부터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율법을 이루는 기이한 경우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메시아로부터 얻는 생명의 풍성함'이 목적인데, 율법 없이도 그 생명력을 이미 얻어버렸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율법을 이루는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없이 율법을 이루는 이러한 사람 역시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서, 생각이 혼돈 속에서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 길을 계획할지라도" 숨님의 이끄심을 따라, 올바르게 나아갑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길을 걷는 기이한 사람'에 대해 숨기듯 묘사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던지는 힌트가 "마음에 새긴"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 31:33에서 가져온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려서, 성령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는 '새언약'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6:26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숨결로) 마음에 새겨진 것". 곧 숨 쉬는 그리스도인의 암시입니다. 이 내용들은 8장과 10장, 그리고 13장에서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날"에 대한 결론적인 문장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주의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든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날이 기쁨이 될지, 아니면 손사래 치는 날이 될지는, 당신이 저 기이한 사람의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심판의 날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에 따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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