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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로고스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겠다.
어디에 지혜자가 있습니까? 어디에 문법학자가 있습니까? 어디에 현시대를 대변할 논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 현시대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을 알지 못합니까? 즉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현시대는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 유명한 본문이 나오기까지 고린도전서의 맥락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온갖 언변, 지식, 영적 은사로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분열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따라 편을 나누고, 각 편은 저 언변, 지식, 영적 은사를 자신들의 정당성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는 말 잘하는 '유명인'을 배출하고, 너도 나도 그렇게 되고자 했던 고린도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메시아의 하나됨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이란 말로 하나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에 말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렇다고 에클레시아가 말을 중심으로 모이는 철학학파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고린도 사람들은 오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말로서 전하고자 한 것은 복음이고, 이것은 말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메시아 십자가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메시아 십자가의 힘'에 대한 자세한 내용입니다.
-십자가의 로고스와 토기장이
바울은 십자가의 '로고스'('말씀'이라 번역되었습니다)가 이 '지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며, 말로 구성하는 지혜라기 보다는 '생명력'입니다. 분열하는 집단의 한복판에서도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끝내 화해를 이루는 힘입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 말은 화해의 말이요, 몸은 그 말을 쓰기 위해 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암시하는 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합니다.
이사야 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던 언약백성 이스라엘은 눈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눈이 있어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10)을 부어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전이 14절입니다.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이 등장합니다. 지혜를 주장하던 자들의 눈은 감기고, 그가 눈을 감은 동안 말로 떠드는 지혜자의 지혜가 무색하게 되고, 명철자의 총명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이러한 일이 언제 벌어졌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대 최고라 자부하던 국가 둘이 부딪쳤습니다. 한쪽은 유대요, 다른 한쪽은 로마입니다. 유대든 로마든 당대 문화의 정점에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자부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요, 한쪽은 그리스 문화를 이어받은 철학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국가가 손잡고 한 일이라곤, 죄 없는 한 사람을 살해한 일입니다. 유대 안을 들여다 보면 어떻습니까?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개인과 헤롯을 따르는 이들,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받던 바리새인들은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성질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던 지혜는,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데 서로 공모하는데 이릅니다.
이사야서의 내용은, 지혜자의 지혜가 결국 생명을 살해하는데 이르는 충격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미 다른 편지에서 이사야 29장을 인용한적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9장입니다. 저 지혜자와 명철자에 대한 언급 뒤에는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저는 로마서 9장과 고린도전서 1장이 같은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2) 그 기이한 일 속에서는 지혜자들의 소경이 되고 지혜가 쓰잘데기 없어집니다. 3) 그리고 토기장이 비유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예레미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8: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이렇듯 예레미야에서도 2) 멸망당하는 지혜자들이 나오고, 뒤로 넘겨서 18장부터는 3) 토기장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기이한 일에 대해서는 31장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토기장이 비유'에 대해서는 이전에 '로마서 연구 2.0'에서 썼던 글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흔히 토기장이 비유를 '하나님 마음대로 한다'로 읽지만, 그 비유는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쪽에서 확인)
지혜자들의 지혜도, 물 속에서만 살았던 어폐류들의 흔적입니다. 그들의 말은 물 밖을 가리켜주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무엇이냐. 분열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음을, 하나님의 아드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보여주신 '사건' 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이, '지혜자들의 지혜를 무색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고 바울은 표현합니다.
-케리그마와 인자 이야기
하나님은 케리그마의
어리석음으로 신실한 이들 구원하시기를 좋게 생각하십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메시아를 전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메시아는 하나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전도'로 번역되는 말입니다만, '케리그마'의 본래 의미는, 전령이 전하는 소식입니다. 즉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고, 그 왕이 다스리는 지역 구석구석으로 가서 알리는 것을 케리그마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분명 인자 이야기와 함께 울립니다. 승천을 통해 인자 이야기가 이뤄졌습니다. 즉 예수께서 진정 인자이셨고, 그 인자는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이양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하늘에서 모든 땅의 신실한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땅과 하늘의 주, 만왕의 왕이십니다. 십자가의 예수께서, 인자 이야기의 인자이셨음을, 그를 믿어 성령 받음으로 현시대로부터 출애굽하여 오는시대를 살 수 있음을 전하는 것이 곧 케리그마인 것입니다. 지혜자들의 지식 전달이 아닌, 우리의 실존을 통째로 뒤집어놓는 승리의 소식입니다. 결코 이길 수 없을 것같은, 심지어 너무 간교해서 그 정체를 인간 뒤에 숨기고 인간끼리 싸우게 만들었던 반창조에 대한 결정적 승리 소식입니다.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신명기 13장의 거짓 예언자의 혐의로 유대인들에 의해 기소되었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을 배신하게 하는 사기꾼의 오명을 쓰신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지칭한,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요? 이 질문은 지혜자들의 지혜의 한계를 보여줄 것입니다.
길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일단 유대는 눈에 보이는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임당하는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만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구성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둘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 쪽 모두 이것을 포기했다간, 망할 것이라, 죽을 것이라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대표, 대제사장의 말입니다.
요한복음 11:48
만일 예수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따라서 케리그마는, 전도는, 거짓 중심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요, 진정한 중심을 선언하는 일입니다. 중심이 제대로 서야, 생존을 목적으로 쌓아올린 지혜의 바벨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중심은 무엇입니까? 강력한 하나의 중심. 그러나 그 중심은 다채로운 모든 것을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오히려 모두에게 내어줍니다. 그렇게 중심은 생명력이 되어 구성하고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그럼 그가 죽은 것입니까? 우리는 과거의 유물을 붙잡고, 그에 대한 추억팔이나 하며 정신적 연대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참으로 메시아 예수와 구성된 이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 단단한 결속력. 결코 그와 떨어질 수 없음. 이제는 그가 나에게 '자신과 같아질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움직입니다. 그와 같아지겠습니다. 그렇게 움직인 '나'들이 모여 '우리'를 이룹니다. 그렇게 부름받은 에클레시아가 그 이름을 소리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화답합니다.
예수! 온 우주의 중심!
가장 높으신 이가, 우리에게 숨결로 오시어 소리도 냄새도 없이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안다
현시대의 지혜로는 그를 모를 것입니다. 물 속에서만 살아서는 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이는 물 속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삶이 우리의 역사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비슷한 내용을 전혀 다를 필치로 써낸 C.S.루이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여성이 지하 감옥에 갇혔다고 합시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낳아 기릅니다. 아이는 지하 감옥의 벽, 바닥의 지푸라기, 그리고 창살을 통해 보이는 작은 하늘만 보고 자라납니다. 창이 너무 높아서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불행한 여인은 미술가였고, 투옥되었을 때 간신히 그림판과 연필 세트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구출될 희망을 절대 버리지 않기 때문에, 교육 방법은 주로 그림을 그려 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연필로 그림을 그려 들판, 강, 산, 도시, 해변의 파도가 어떤 것인지 아들에게 보여주려 합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바깥세상이 지하 감옥 안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영광스럽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믿으려고 애씁니다. 때때로 아이는 정말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럭저럭 잘 지내던 어느 날,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어머니는 깜짝 놀랍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동문서답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는 아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오해를 하고 살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하지만 진짜 세상에 연필로 그려진 선들이 가득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소년이 대답합니다. "예? 거기엔 연필 자국이 없다고요?" 갑자기 바깥세상에 대한 그의 생각 전체가 멍해집니다. 그와 바깥세상을 연결해 준 유일한 매개물이었던 선들이 방금 부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요일 3:2)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보다 더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연적 (감각, 감정, 상상을 통한) 경험들은 그림에 불과합니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선들과 같습니다. 부활한 삶에서 우리의 자연적 경험들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연필 선이 사라지고 진짜 경치가 드러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변환 (영광의 무게 중), C.S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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