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3:1~6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들을 함께 세우기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부터나 우리를 향해서 어떤 추천하는 편지같은 것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습니까?
제가 "함께 세우기"라고 번역한 것이 개역성경에는 "자천하기"로 되어 있고, 새번역에는 "우리 자신을 치켜올리는"으로 되어 있습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이 사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보내는 편지들을 자신의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편지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중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처럼, 많은 이들이 말씀을 "팔아먹으며(2:17)"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의 자격은 전혀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이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고, 움직이지 않는 글자로부터 자격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어떠한 자격을 얻으려면 그 자격을 보증해주는 '확인증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확인증서를 따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달음질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에게 이러한 확인증서 따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 자격은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일까요? 이 자격 논쟁은, 오늘날 에클레시아의 일원으로서 얻는 자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우리의 편지는 여러분이고, 그 편지는 우리의 가온들에 새겨졌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알게 되고 읽힙니다.
여기서 '편지'는 추천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에게도 추천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추천서는 바로 임재범씨가 노래하듯 '여러분'입니다. 이들이 바울의 자격을 보증해주는 추천서입니다. 추천서답게 모든 사람들에게 바울의 자격을 알려주며, 또 읽힙니다. 그런데 이 추천서는 바울의 가온에도 쓰여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추천서는 몸 밖에 쓰인 글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 자체가 편지이고, 그 편지에는 무언가 쓰여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쓰이는 순간, 그 인간존재는 공인(公人)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정 자격을 알리기 위해 알려지고 읽히는 존재가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이 우리에 의해 섬김을 받은 메시아의 편지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잉크가 아니라 삶의 하나님의 숨결로 새겨졌습니다, 돌판들에가 아니라 살몸의 가온 판들에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확신을 우리가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간 추천서의 특징이 나열됩니다. 이 인간 추천서를 쓰는 도구는 잉크가 아니라 "삶의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쓰여지는 공간은 "돌판들"이 아니라 "살몸의 가온 판들"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반영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명백히 대비되고 있는 잉크(먹)와 하나님 숨결, 돌판과 살몸의 가온 판은 우리를 에스겔서와 예레미야로 데려갑니다.
에스겔 11:19,20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돌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던 제사장 에스겔은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에서도 오늘 본문에서처럼 두 가지가 대조됩니다. 바로 '돌'과 '살'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몸에서 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대로 생활하고 실천하게 만들고, 하나님과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재정립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씨알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이 메시지가 어찌 들렸을까요?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떄문에,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은 떠나시고, 자신들은 땅 잃고 실향민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됨'은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는, 자신들의 문제를 본질부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때가 오느냐? 방법을 말하긴 쉽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이 문제입니다. 이 방법을 이룰 수 있는 그 "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간과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그때에"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입니다. 즉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훗날에 이뤄질 내용이었습니다. 돌 마음이 사라지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은, 포로기의 에스겔에게는 희망일순 있어도, 현실의 상황을 봤을 땐 분명 요원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오지 않고서야, 이러한 사람들은 이 땅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예언에서 말하는 표상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자신의 삶에 적용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추천서에 대해서, 그것은 에스겔 예언의 "돌"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에스겔에서 언급된 "돌"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규범인 '토라'로, 더 넓게는 몸 밖에 자격을 쓰기 위해 고정해놓은 글자류 전부를 의미하는 표현(곧 "법"입니다)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격은 '돌'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새 마음, 새로운 영,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주어진다는 예언을, 자신에 대한 변호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입장에서 이 에스겔의 예언은 더 이상 예언이 아닙니다. 성취되기 시작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자기 자신이 겪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포로들과는 완전히 다른 타임라인 속을 살고 있습니다.
같은 예언이 에스겔 36장에도 등장합니다.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에스겔 36:24~28이 보여주는 일련의 그림은, 출애굽이자 포로해방입니다. 이방 나라들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을 하나님은 모으시고(따라서 이 모인 사람들은 이전에 살던 국적과 무관한 정체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정체성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적 질서에 참여하던 더러움을 씻어주고, 이들에게 "새로운 마음" 곧 "새로운 영"을 넣어주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은 이어일상hendyon으로 취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사용한 대조가 등장합니다. 돌과 같은 굳은 마음이 아닌,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 그리고 실천. 하나님과의 관계 갱신.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영", "부드러운 마음"을 이미 받은 사람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없는 희안한 문제로 신음하던"(고린도전서 5:1) 코린코스 에클레시아 역시도 같은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돌이 아니라 영으로 주어지는 자격부여'는 에스겔 예언의 성취이자, 인간 역사 위에서 새로운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는 종말론적 표지입니다. 즉 마음으로부터 백주대낮의 판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탄생입니다. 깨끗한 사람, 즉 현시대를 '깨'서 '끝'내버린 사람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가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면, 몸 밖에 기록된 무언가를 통해 자격여부를 따지는 것은, 성령을 통해 자격을 얻은 에클레시아에 걸맞는 방식은 아닌 것입니다.
본문의 "살몸의 가온판들"이란 표현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살몸"은 바울의 편지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비뚤어진 인간성"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돌"에 대비되는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였고, 이것은 새로워질 인간 자체를 가리킵니다. 즉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것을 "박동하는(pulsat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본문에서의 '살몸'은 몸을 가진 인간이 새로워진다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어를 한 가지 의미로 고정시키는 것이, 본문 맥락을 읽어낼 수 없게 만드는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입니다. 여기서의 "살몸"은 말 그대로 살같으로 덮인 인간 자체를 가리키고, 이 부드러운 인간은, 성령을 받으면 그 스스로가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을 보증하는 물건과 자격의 대상을 나눌 필요도 없이, 존재 자체가 자격의 대상이면서도, 자격을 보증하게 됩니다. 이처럼 '살몸'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자신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산정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충분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새 언약의 섬김이들로서 문자로가 아니라 숨결로 충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충분(`ικανος)"을 다시 꺼내옵니다. 이 충분은 앞에서 메시아의 승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개선행진의 향내음으로 설명하던 장면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즉 메시아의 십자가 승리에 대한 두 가시 상이한 반응, "삶으로부터 삶으로"와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를 갈라놓으며, 바울이 붙여놓은 말이 "누가 이것에 충분하겠습니까?(2:16c)"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현재 이러한 종말론적 삶에 충분하지 않은 코린토 에클레시아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충분하기 위한 추구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이 독려하기 위해 썼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충분의 근거에 대해서 이제 밝힙니다. 만일 이 종말론적 삶에 충분할 수 있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따져보고 계산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스스로 종말론적 에클레시아의 자격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종말론적 삶의 충분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 대목에서 성령은 단순히 자격을 인정해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자격으로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의 동인(動因)으로 제시됩니다. 즉 성령은 자격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살게 하십니다. 최종적인 역사의 판결이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통해 이뤄질 것인데, 에클레시아가 그 심판주를 현실로 소환하여 자신이 그 앞에 서게 되는 모든 과정은 성령을 통해 이뤄집니다.
성령수여로 얻은 자격은 성경 전체 이야기를 아우릅니다. 즉 타락을 뒤집는 아브라함 후손으로서의 인정이고, 이스라엘 포로기의 끝에 나타난 사람이라는 인정이자, 메시아 십자가를 통해 출애굽 했음의 인정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살다가, 마침내 부활하게 될 사람으로서 인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에서 이 성령을 가리켜 "보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성이 성령으로부터 비롯되고, 새로운 인간성은 몸 밖에 있는 법체계를 의지하려는 마음을 지워버리고, 오히려 그 법을 이루는 삶을 풍성히 살게 됨을 뜻합니다.
오늘 내용은 로마서와도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돌에 쓰여있는 것을 지키는데 실패했을 때, 그래서 '하나님의 타락을 뒤집는 언약 프로젝트'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했을 때(로마서 3장), 예언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방식을 준비해두셨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로마서 4~8장). 돌에 쓰인 것을 이루는 것은, 돌 자체가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 돌은 우상이 됩니다(로마서 7장). 오직 성령을 통해 새로이 태어난 새로운 존재를 통해서만(로마서 8장), 토라가 지향하던 것은 이뤄집니다.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토라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새 언약"이란 말을 꺼냅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31:30~34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우리는 이 "새 언약"의 내용이 우리가 앞에서 에스겔을 통해 봤던 예언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즉 "새 언약"은 "그 때가 오면" 체결될 것인데, 그 새 언약은 '성령'을 통해 자격얻는 사람들의 탄생과, 그들의 실천과,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갱신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에스겔, 예레미야가 예언하던 새 언약은, 바울 시대에 이미 이뤄졌고, 그 이뤄짐으로 에클레시아가 이 땅에 나타난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성령을 받아 새로워진 존재 자체가 자격이 되며(고린도후서 5:17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성령은 에클레시아 실천의 동력이 됩니다. 그 실천이란, 메시아의 개선행진에 동참하는 것이고, 이것은 마침내 이뤄질 하나님의 최종판단을 현실로 가져오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즉 메시아의 십자가의 승리 방식이, 망하자는 말이 아니라(가야바의 말처럼, 요한복음 11:50), "삶으로부터 삶에 이르는" 방식임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 곧 에클레시아가 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8).
그리고 바울은 자신들이 이러한 "새 언약의 일꾼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새 언약 체결을 위해(새 존재 탄생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언약서를 쓰시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격을 얻게 합니다. 또 그 자격에 걸맞게 살게 합니다. 성령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요, 바울이 줄곧 주장했던 파라클레시스는, 바로 보혜사를 따라 새 언약의 공동체를 위해 섬기는 일이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을 압축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시대가 종식되는 끝날의 판결이, 오늘 나의 판단의 준거점으로 소환됩니다. 이때 최후의 심판과 나의 현실은 아무 간격없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고, 성령은 그 지점에 나를 가져다 둡니다. 그 지점의 다른 이름은 "오는시대"요, 바울이 연속적으로 겪어나가고 있는 "지금들(χαιρος, 가온찍기)"입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죽이지만, 숨결은 살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합니다. 여기서 '문자'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성령 외에, 즉 인간 밖에 둔 자격입니다. 인간 밖에 둔 자격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계속 문자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러한 통찰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로마서 7:6, 개인번역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붙들어 놓았던 것 속에서 죽어버렸으니, 그 법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의 새로움 속에서 섬길 것이요, 글과 문법의 낡음 속에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그런데 이제는"이라고 말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승천하신 메시아가 새로운 존재를 임명하고 살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던 오순절부터입니다. 이 날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50일만에 시내산에 당도했던 날, 곧 토라를 받았던 날입니다. 토라는 광야 공동체의 생활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같은 오순절에, 토라와 방향은 같지만, 전혀 다른 무언가가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토라를 이룬다"는 최초 목적은 흔들린 바 없으나, 그 토라를 이루기 위해 토라 이상의 것이 필요했고, 그것이 마침내 주어지는, 인류 역사의 최대 분수령이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 31:32가 역전되고, 예레미야 31:33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3:1~6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들을 함께 세우기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부터나 우리를 향해서 어떤 추천하는 편지같은 것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편지는 여러분이고, 그 편지는 우리의 가온들에 새겨졌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알게 되고 읽힙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의해 섬김을 받은 메시아의 편지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먹이 아니라 편지가 아니라 삶의 하나님의 숨결로 새겨졌습니다, 돌판들에가 아니라 살몸의 가온 판들에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확신을 우리가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자신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산정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충분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새 언약의 섬김이들로서 문자로가 아니라 숨결로 충분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죽이지만, 숨결은 살게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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