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이전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계획의 정당성이 하나님의 신실함이라 말했습니다. 그 신실함이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 프로젝트'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프로젝트 성취를 보장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양한 구약성경의 반영을 보여주며(기름 부음, 인 찍힘, 숨님의 보증),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선교계획을 코린토 에클레시아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었을 것입니다. 편지 전달을 맡은 디모데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호소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고에서만이 아닌 이 호소를 통해서도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3~2:4

  그런데 바로 저는 증인으로 그 하나님을 요청합니다, 바로 나의 호흡에,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을 아끼기에 코린토스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심정을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심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증인으로는 하나님만이 적합하십니다. 증인이 요청되는 자리는 바로 바울의 호흡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프쉬케(ψυχη)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것을 개역성경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단어인 '영혼'이라 번역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인간을 구성적으로 사유했습니다. 쪼개어 사유하는 것은 자연을 관찰하던 그들의 방식입니다. 즉 인간은 많은 부분이 모여 조립된 완전체입니다. 그리고 그 구성요소에는 몸뚱이가 있고, 그 몸뚱이를 관할하는 프쉬케가 있습니다. member라는 단어 역시, 본래 몸의 구성요소인 '사지'에서 파생단 단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인간에 대해서 구성적 사고가 아닌 관점적 사고를 합니다. 즉 인간을 구성요소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예컨데 '살몸(σαρξ)'이라는 단어를 놓고 살펴본다면, 희랍인은 그것을 영혼(ψυχη)과 대비되는 구성요소로서의 몸뚱이라 생각할테지만, 히브리인인 영혼과 몸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들에게 프쉬케(ψυχη)를 쓰는 것은, 자신들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된 번역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따라서 프쉬케(ψυχη)를 희랍인들이 어찌 사용하는지보다, 히브리인들이 저 프쉬케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습니다.

  히브리인에게 살몸은 몸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인간성 전체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살몸은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호흡'역시 몸의 구성요소로 오해되기 십상인 '영혼'보다는 '삶', '호흡', '목숨'으로 번역하는 게 좋겠습니다.

  즉 하나님은 바울은 자신의 삶 전체를 들어 하나님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증인으로 요청되는 그 사안은 바로 '바울이 코린토스로 가지 않은 이유가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다'입니다. 지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의 수정된 선교계획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바울을 이랬다 저랬다하는 사람이라며 그의 사도직 자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곧장 에게해를 건너 코린토로 건너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의심들을 얼굴을 마주하고서 해명하고, 다시금 모든 것을 '정상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속한 모두를 아끼기 때문입니다. 그 '아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여러분의 신실함을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쁨과 함께하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이미 신실함으로 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신실함을 명목으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배해서"라고 번역한 단어는 '퀴리에우오(κυριεύω)'인데, 이것은 '주(主)로서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주'는 당시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에클레시아는 이 '주'라는 단어를 '예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혁명적인 의미전도을 지켜나갔습니다.(이 "주"는 당대 주권들이 제시하는 피규라(figura)를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주"는 메시아이시고, 다른 무엇도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세운 사람이고, 이들에게 '아버지'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울은 이들의 "주"가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신실하기 위해선 내 말을 무조건 들어야해"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러한 위치에 설 수는 없습니다. 주는 한 분 뿐이십니다.

  그리고 주가 한 분이라는 사실은, 그 주를 고백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역자'로서 관계맺는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즉 바울도 코린토 에클레시아의 "주"가 아니라 수평적 입장의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평관계로의 진입하기 위한 자격은, 신실함 뿐입니다. "신실함으로 섰다"는 말은 부활을 향한 종말론적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종말론적 공동체 안에서 주는 한 분 뿐이십니다. 심지어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아무리 막장으로 치닫는다 할지라도, 바울은 코린토스 공동체의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서로에 대한 "주"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코린토스 내부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묻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각각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메시아 편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을 심판(판단)했습니다, 다시는 슬픔으로는 여러분에게 가지 않겠다고.

  희랍어 크리노(κρίνω)는 '판단하다'로도 '심판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신적 판단'이 곧 심판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심판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저 바울이 결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종말론적 공동체의 특징을 담아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는 현시대의 모든 문제들이 최종적으로 최후의 심판대에서 해결될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심판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 바른 문설주와 상인방을 보고 지나치듯, 이들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물론 어린양의 '대속' 때문이지만, 자신이 이 '대속'의 수혜자임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펼쳐집니다. 곧 자신을 최후의 심판 앞에 스스로 세우는 현실성입니다. 즉 이들은 현실을 심판받은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대에는 이들의 자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현실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미래에는 최후의 심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말론의 의미하는 바입니다. 미래에 이뤄질 것이 분명한 공명정대한 신적 판결이, 오늘 우리의 현재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이미 종말(말세)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유대인은 유대인들만의 단체 부활을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최후의 심판에서 유대인은 승소하고, 이방인은 패소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부활이 이뤄집니다. 따라서 부활 자체는 최후의 심판 맥락 위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유대인들의 단체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단독부활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부활이 벌어졌으니 최후의 심판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최후의 심판은 모든 가능성과 기대가 박탈된 역사의 종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에게 자신을 스스로 심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놓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단독 부활로 시작된 이 최후의 심판은 모두의 부활로 마무리 될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은, '타집단에 대항하는 승리'를 추구할 이유를 모조리 종식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고, 그 판단의 준거점은 하나님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은, 에클레시아에 의해 끊엄없이 현실로 소환되십니다. 즉 심판받듯 사는 삶이 에클레시아의 현재요, 심판 받듯 사는 삶은 결국 그들을 심판받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영광의 부활(요한복음 5:29)'이라는 승소 판결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말론에 관한 내용은 바울이 이미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앞선 편지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1,32, 개인번역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에 의해 심판받는 우리가 훈육도 받는 것은, 우리가 현시대와 함께 유죄판결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스스로에게 심판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최후의 심판대에 서신 하나님께 비추어보아, 바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슬픔으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방문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내가 여러분을 슬프게 만든다면,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나로 인해 슬픈 사람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을 썼습니다, 가지 않고서 내가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슬픔을 갖고자, 하지만 나는 여러분 모두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속해있다고.

  아마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디모데를 통해서 "바울 때문에 우리가 슬프다"는 말을 바울에게 전한듯 싶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되묻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 때문에 슬픈 사람은 없습니까? 그 사람이야 말로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함께 고쳐나갈 사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은듯 합니다. 바울과 함께 '파라클레시스'하다면, 바울의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문제를 고쳐나갈 것인데, 지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와 바울 사이에는 파라클레시스로 연대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쁨을 가지고 그들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기로 했습니다.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마땅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스스로 심판하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확신을 밝힙니다. 바울의 기쁨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모든 사람에게 속해있다고.

즉 나는 많은 어려움과 가온의 눌림으로부터 많은 눈물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만드려고 그런게 아니고, 다름 아닌 이 사랑을 여러분이 알게 하려고 말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향해 더 넘치도록 가진 그것을.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바울에 대한 우리의 인상들을 고치게 됩니다. 바울은 희랍세계가 꿈꾸던 인간상인 고대의 지혜를 담지한 현인도 아니었고, 현실을 극복하는 예외를 설파하는 유대적 인간상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에 초연하며, 남다른 사유와 실천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초인을 우리 머리 속에서 지워야 합니다.

  오히려 굵은 눈물방울들을 떨어뜨리며 글쓰는 사람을 상상해봅니다. 그는 바다 건너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을 견디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 그는 에클레시아를 향한 격동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에클레시아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의 일원은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밝히고, 그 사랑에 걸맞는 실천을 고민하고 실천해왔습니다. 그는 이 사랑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걸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증인으로 출두시킵니다.

  그래서 그의 인격을 표현하는 말은 지혜로도 부족하고, 예언으로도 모자릅니다. 당대 가장 강력했던 두 개의 지배권력이 제시한 인간상은 바울(로마식 이름)도 사울(유대식 이름)도 그렇게 만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준 그 두 세계로부터 타의로 버림받고, 자의로 더욱 버림받고자 했을 때, 그 견딤 속에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발현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고백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23~2:4

  그런데 바로 저는 증인으로 그 하나님을 요청합니다, 바로 나의 호흡에,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을 아끼기에 코린토스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신실함을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쁨과 함께하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이미 신실함으로 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을 심판(판단)했습니다, 다시는 슬픔으로는 여러분에게 가지 않겠다고. 즉 내가 여러분을 슬프게 만든다면,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나로 인해 슬픈 사람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을 썼습니다, 가지 않고서 내가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슬픔을 갖고자, 하지만 나는 여러분 모두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속해있다고. 즉 나는 많은 어려움과 가온의 눌림으로부터 많은 눈물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만드려고 그런게 아니고, 다름 아닌 이 사랑을 여러분이 알게 하려고 말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향해 더 넘치도록 가진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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