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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12~18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파레시아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베일을 (덮어) 놓았던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아들들이 그 폐지된 것의 끝을 향해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포문을 여는 "이러한 소망"은 '새 언약의 영광 안에서 머묾'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성령이 이루시는 존재의 변화에 참여함'입니다. 이 변화가 옛 언약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옛 언약은 "죽음의 섬김", 즉 하나님의 법 앞에서 그 법을 위반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드러냅니다. 인간의 몸 밖에 쓰여진 어떤 기준은(예컨데 십계명, 혹은 바울이 요구받고 있는 사역 자격증), 타락한 인간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그 타락한 인간성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한 존재에 함께 기능해야 합니다. 옛 언약이 드러낸 것을 새 언약이 해결해야 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드러났다면, 그 존재를 살려놓는 것이 새 언약이요, 곧 성령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 새롭게 된 존재는, 법 앞에서도 죽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도 죽지 않습니다. 이는 법을 어길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봐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성령 때문에, 법을 위반할 가능성에 묶일 수 없는 사람, 즉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파레시아"를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파레시아(παρρησια)'는 '모든 것(παν)'을 '말한다(ρησια)'는 의미입니다. 어떤 주제든 공론화 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담대히 말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옛 언약 옹호자들과의 대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 옹호자란 법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입니다. 위반하면 안되는 목록들을 제시하면, 사람이 그 목록대로 지켜서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목록들은 인간이 빠져있는 수렁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을 폭로하는 일에는 당연하게도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법의 한계 상황을 밝히고, 그것이 인간다움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파레시아입니다.
바울은 다시 출애굽기 34장의 모세를 말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던 영광에는 베일을 드리워놓았습니다. 바울은 그 베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 폐지된 것의 끝을 향해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옛 언약의 결말은 그것의 폐지이고,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베일은 이것을 감추고, 법을 통해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그 자리에서 말리지 않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 얼굴을 빛나게 하는 그 영광이 사라질 영광임을 알았더라면, 이스라엘 역사는 이후로 진행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일은, 법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는 순간을 이후 특정 시간으로 유보시켰습니다.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이, 법의 한계 상황 속에서 비참하게 죽임당하는 일이, 역사 위에서 벌어졌을 때 모두는 이 법의 무능함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들은 굳었습니다. 즉 바로 이 날까지 바로 그 베일이 옛 언약의 읽음에 머물러 벗겨지지 않은 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메시아 안에서 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모세가 읽혀질 때마다 베일이 그들의 가온 위에 덮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생각들은 굳었습니다. 여기서의 '굳음'은 앞에서 바울이 말했던 '돌'의 심상과도 일치합니다. 이 '마음굳음'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가 '포로시스(πωρωσις)입니다. "완악함"으로 번역됩니다. 법조문은 그 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예상하며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에 대한 정당성 자체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완악함이란, 이 법의 정당성을 고집하며 법의 한계 상황에 서 있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법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을 돕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죄인, 장애인, 여자, 어린이들은 당시 유대 율법으로 구축된 사회 안에서 법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내몰림을 해결하지 않고, 법을 고집하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이 굳은 것이고,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인간적인 '읽기'가 바울의 시대에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여전합니다.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들은 법으로 따지자면, 광야에서 심판받고 망하는 것이 정당한 판결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판단은 법을 뛰어넘은 것이었고, 이 '법을 초월함'이 "거저"(개역성경에서는 "은총")라는 말로 언표되었습니다. 이 "거저"로 언약백성의 지위가 유지되었고, 약속의 땅으로의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은 법에 대한 완고함으로 굳어져, 자신들의 과거를 잊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새로운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옛 언약이 '지금' 메시아 안에서 폐지되고 있습니다. 영의 섬김을 하는 바울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를 향해 몸을 돌리기만 하면, 그 베일은 반드시 벗겨집니다. 그런데 그 주는 숨님이십니다. 그런데 주의 숨결 (계신) 곳에 자유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모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모세가 그 빛나는 얼굴을 베일로 덮고서, 그 미완의 언약이 갖는 한계를 보지 못하게 했지만, 그랬던 그가 베일을 걷어낼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휘장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본체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진 옛 언약의 광휘는 더 이상 빛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의 섬김은, 그 영광의 본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이에게 옛 언약은 더 이상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령께 이르도록 주어진 시간동안 제 역할을 했던 사다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위의 구절에서 "그"는 모세일 수도 있고, "아무나"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주어를 분명하게 꼬집어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말하는 술어부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휘장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 그 베일을 벗어버렸듯, 오늘날도 하나님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람은 그 베일을 벗어버립니다. 법의 한계를 인식합니다.
여기서 "몸을 돌리다"라는 말은 '트레포(τρηφω)'입니다. 베드로는 '아나스트레포(αναστρηφω)'라는 말을 쓰면서 '생활방식의 변화'를 말했고, 바울에게 이 말은 '회심'을 의미하는 전문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세가 몸을 돌렸던,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 몸을 돌려야 하는 그 "주"가 바로 '성령'이라 말합니다. 즉 모세와 같은 주를 마주합니다. 베일이 벗겨지는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법의 한계 상황 속에서, 무의도로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 존재의 변화가 바로 그 성령을 통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법을 위반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했던 간구가 이와 공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류는, 이러한 모습의 인류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이러한 인류를 낳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먼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의 숨결 (계신) 곳에 자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은, 교회에서 예전과 관련해서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만, 오늘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맥락은 이 구절의 새로운 의미를 드러냅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법의 한계 상황 속에서도 망설이지 않을 자유이고, 사람 사랑하는 일을 제한하는 그 어떤 정당성도 무력화시키는 자유입니다. 앞에 등장했던 '파레시스'와 연결되는 자유입니다. 법이 배제한 이들을 사랑할 자격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지고, 이 자격은 법의 제한을 넘어서게 합니다. 마치 토라법과 로마법을 가지고 예수를 고소했던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그 법의 제한을 넘어버린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베일이 벗겨진 얼굴로 주의 영광을 (거울보듯) 마주하며 바로 그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신되고 있습니다, 마치 지배자이신 숨님에서부터 그러한 것 같이.
이 구절에서 "우리 모두"는 영의 섬김으로 사역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킬 수도 있고, 말 그대로 모든 에클레시아의 일원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의 방점은 '누구'에 찍히지 않고, '상태 변화'에 찍혀있습니다. 즉 법의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성령으로부터 사람을 사랑하는 최종 정당성을 얻은 이들은 주의 영광을 마주합니다. 여기서 "주의 영광"의 "주"에는 정관사가 없으므로, 야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야훼 하나님이 뚜렷하게 드러내신 영광이 곧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따라서 베일이 벗겨진 모두가 마주하는 것은 메시아 예수입니다. 법을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신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거울보듯 마주한다"는 말은 이전 편지인 고린도전서와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해설을 인용하겠습니다.
즉 우리가
아직은 거울을 통해 어른대는 것을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볼 것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분으로부터 깨닫지만,
그때에는 하나님 나를 아시듯 꿰뚫어 알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거울 비유도 오해가 있었습니다. 청동거울로 보는 것은 어른거림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동거울은 당시 고린도 지역의 특산물이었고, 그러한 청동 거울을 무시하는 발언은 지극히 현대인의 입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동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중첩된 시대에서의 앎'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울이 후져서 참되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시대인 것입니다. 고든 피는 "본질상 간접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즉 바울은 거울이라는 심상을 다시 사용해서, 우리가 지금 메시아의 영광을 거울 들여다보듯 '탁월하게' 마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거울은 현시대 속에서 메시아를 들여다보게 하는 오는시대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일을 걷고 성령을 받은 이는 메시아의 형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형상(εικονα)'은 플라톤 철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시하는, 현실에 구현된 무언가'입니다. 맨눈으로 빛을 볼 수는 없지만, 그 빛이 만들어낸 그늘을 통해서 빛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 그늘이 창세기 1:26, 인간창조에 등장하는 '형상(히브리어, '체렘')'입니다. 희랍의 '에이코나(εικονα)로 번역한 것은 이런 의미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역사 위에서 구체적 인간으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주의 영광이신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그 예수의 형상을 마주하게 된 사람은, 사랑을 외치다가 법으로부터 배제되어 비참하게 죽임당한 한 사람을 왕으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가 그이를 왕으로 맞아들이자 그에게는 새로운 시간이 펼쳐집니다. 형상을 마주하며, 그 형상을 따라 몸이 변하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 것입니다. 곧 오는시대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변신'이라 번역한 것은 희랍어 '메타모르포시스(μεταμορφοσις)'입니다. 거칠게 번역하면, 형체가 달라짐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 법의 한계 상황을 사랑으로 극복하려는 에클레시아는 당연히 그 일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법으로 한계 그어놓는 도시 안에서, 그 법을 넘어선 사랑을 몸으로 구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몸의 변화의 결말은 부활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이 메타모르포시스의 궁극인 부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해도 죽지 않는, 새로운 인간을 기대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여주듯, '거저'의 증빙은 몸 밖에 쓰인 확인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빛난 얼굴의 영광은 이제 성령을 따르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 변한 몸적 생활만이 우리가 '거저' 위에 서 있음을 알게 하는 유일한 증빙입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이 난점이었습니다. "마치 주님이신 숨님에서부터 그러하듯이." '주'라는 말과 '성령'이란 말이 동격으로 놓여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예수가 곧 영이라는 과격한 주장을 폈습니다. 이 과격한 주장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은 "주의 영"이라 번역하며 동격 관계를 소유격 관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저의 해석은, 여기서의 "주"는 삼위일체의 2격이신 예수가 아니라, 카이사르로 대표되는 '지배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주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1:24). 그런데 아버지의 첩과 살림을 차렸던 남자가 회개하고 돌아오자, 그를 '사랑으로 지배'하라고 말했습니다(2:8). 즉 지배의 주체(κυροις)는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지배로부터 나온 이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몸이 변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시작되는 새창조를 반영합니다. 바울은 이미 프쉬케를 받은 아담과, 프뉴마(성령)를 받은 마지막 아담의 대조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대조한 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개인번역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본성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리는 숨결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토라에서 인간창조의 대목인 창세기 2장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프쉬케적인 인간은 살게 되었지만, 프뉴마적인 인간은 살리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프뉴마를 통한 새 인간 창조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지배자이신 숨님에서부터" 입니다. 그런데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새롭게 지어가는 중이지, 모든 것이 이뤄진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이 이 구절의 맨 앞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 같이(καθαπερ)".
이러한 구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가능성 위에 놓인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완성되지 않았지만, 완성되어가고 있는 공동체. 우리가 논하는 모든 성경의 개념들은, 이 새로운 가능성 위에서 사유되어야 할 것입니다.(예컨데, 아빠 하나님을 헤아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순종'.)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3:12~18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파레시아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베일을 (덮어) 놓았던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아들들이 그 폐지된 것의 끝을 향해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들은 굳었습니다. 즉 바로 이 날까지 바로 그 베일이 옛 언약의 읽음에 머물러 벗겨지지 않은 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메시아 안에서 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모세가 읽혀질 때마다 베일이 그들의 가온 위에 덮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를 향해 몸을 돌리기만 하면, 그 베일은 반드시 벗겨집니다. 그런데 그 주는 숨님이십니다. 그런데 주의 숨결 (계신) 곳에 자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베일이 벗겨진 얼굴로 주의 영광을 (거울보듯) 마주하며 바로 그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신되고 있습니다, 마치 지배자이신 숨님에서부터 그러한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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