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2:5~11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슬프게 했다면, 그가 나를 슬프게 했던게 아니라, 부분으로부터는(내가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슬프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특정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깊은 슬픔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슬픔은 바울을 덮쳤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전체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전체와 관련된 그 슬픔을 말하면서도, 그 특정인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흔적을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1~13
모두가 여러분의 에클레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포르네이아'에 대해 듣는데, 여러분에게 이러한 포르네이아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내와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쭐댈 뿐 도리어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가운데서 그런 (없던) 일을 한 자를 내쫓지 않는 것입니까?
내 자신이 실은 비록 몸은 떠나 있으나, 그래도 숨으로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처럼, 이미 판단을 내렸으되,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한자를 이미 판단했습니다. 여러분과 내 숨이 함께 모일 때, 우리 주 예수의 힘도 함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사탄에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 살몸을 멸함으로써 주의 날에 그의 숨이 건져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온전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작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오랜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새로운 반죽, 누룩 없는 반죽이 되십시오. 즉 우리의 유월절, 희생당한 메시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랜 누룩으로가 아닌, 썩고 '포르네이아'한 누룩으로도 아닌, 오직 빛나는 판결과 '참' 안에 있는 누룩없는 빵입니다.
앞서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에게 포르네이아하는 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 현시대의 넘쳐나는 포르노이아의 사람들, 또는 탐욕스런 사람들, 또는 그림자를 따르는 이들 모두를 뜻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피하려면 현시대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포르네이아하거나, 탐욕스럽거나 그림자를 따르거나, 악담하거나, 뭐에 빠졌거나, 강요하고 빼앗는 동료 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 마십시오.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무엇을 판단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그 악인을 우리로부터 내쫓으십시오.
코린코스 에클레시아가 슬퍼하지 않았던 그 일에 대해서, 적어도 그들은 바울의 권고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부분으로부터는"이란 말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언급한 '누룩'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 누룩처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전체를 망가뜨렸던 그 일은, 이제 모두의 슬픈 일이 되었고, 바로 이 때문에 이제 해결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에 의한 그 처벌이 그러한 자에게 충분합니다, 그 결과 이와 반대로 더욱 여러분이 기꺼이 파라클레시스 하십시오, 넘치는 슬픔에 그러한 이가 취하지 않도록. 이런 이유로, 나는 여러분이 그를 향해 사랑으로 지배하길 파라클레시스 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을 처벌했습니다. 그 처벌은 에클레시아로부터 내쫓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아버지의 처와 살림을 차린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육체적 삶을 지향하며, 육체적 삶이란 아무래도 좋다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었고, 이 점은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금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고 에클레시아로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사탄에게 내어줘야 한다"고 말했던 이 마저도 돌아올 수 있는 에클레시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칙의 턱을 낮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삶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에클레시아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하기 전에는 이 사람은 에클레시아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점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계승하는 장면입니다. 형제가 잘못했을 경우, 1) 먼저는 당사자가 찾아가고,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2) 두 세 사람을 증인으로 데려가고,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3) 공동체 전체가 잘못을 공론화하고,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공동체 식구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잘못을 바로 잡고 돌아오려고 한다면,
마태복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는 잘못 인정 이후에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처벌을 받아들이고, 다시금 에클레시아로 돌아오길 바라는 이에게 바울은 이제 사랑으로 그를 다스려줄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의 "다스리다"도 앞서 나온 퀴리오스(κυριος)와 관련된 동사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주'가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고의적으로 "지배하라"고 씁니다. 그러나 그 "지배" 앞에 "사랑으로"가 붙습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들을 온전하게 한다고, 이전 편지에서 말했던 바울입니다. '사랑'이 붙은 '지배'는 어떠한 것일까요? 자칭 '주'라고 말하는 로마황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을 위해 내가 썼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여러분의 시험, 모든 일에 헤아리는 이들인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언급하는듯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 이들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포르네이아를 저지른 사람을 치리한 것만큼은 그들을 칭찬해줄만 합니다. 그들은 잘 내쫓았고, 잘 받아주었습니다. 이제 잘 용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구절에서 현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굴종'의 느낌이 있지요. 그러나 순종은 무언가를 알게 되어서 고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길 바라고, 그 맘 알아서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마치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이 '헤아려 실천함'이 곧 순종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기꺼이 고쳐 삶'입니다.
이 '헤아림'이 있어야, 메시아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주'로 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오히려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스러워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타율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기꺼움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은 아들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떤 이에게 거저 살게한다면, 나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즉 거저 살게했던 내가, 만일 내가 누군가 거저 살게 했다면, 여러분 때문에 메시아의 얼굴 앞에서, 그 사탄이 많은 것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생각들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저 살게함"이라 번역한 말은 '카리스조마이(χαρισζομαι)'를 씁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용서'라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파자해서 '카리스(χαρις, "거저")'와 '조에(ζωη, "삶")'으로 나누어봤습니다. 즉 용서는 '거저 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 카리스조마이 안에 '카리스'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용서는 거저입니다. 댓가를 바란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공동체를 슬프게 할만한 큰 사건을 저질렀을 때, 그리고 그가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요? 처벌도 좋습니다. 따끔한 훈계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결국 그를 다시 살게 하기 위해서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클레시아는 이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에클레시아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용서를 자신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용서 때문에 바울이 만일 누군가를 용서했다면, 그것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배운 것이고, 또한 메시아의 얼굴 앞에서 한 것입니다. 철장 권세를 가진 메시아의 얼굴 앞에 선 것은, 최후의 심판을 현재로 끌어와사는 종말론적 에클레시아의 모습입니다. 즉 우리의 용서는 최후의 심판을 미리사는 삶으로서 용서입니다.
더불어 이 종말론적 삶은 사탄이 많은 것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에클레시아가 용서하지 않을 때, 사탄이 많이 갖게 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기생해야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사탄이 얻고자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 뿐이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싸우게 하는 것은(용서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그 뒤에 숨어서, 하나님께 맞서게 만드는 거대한 세력화를 꾀하기 위함입니다. 유대도 로마도 같은 방식으로 넘어졌음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확인합니다. 이 사탄적 사고를 아는 우리에게 용서는, 타인을 거저 살게 하는 것은 현시대를 이기는 힘입니다.
요한일서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2:5~11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슬프게 했다면, 그가 나를 슬프게 했던게 아니라, 부분으로부터는(내가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슬프게 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에 의한 그
처벌이 그러한 자에게 충분합니다, 그 결과 이와 반대로 더욱 여러분이 기꺼이 파라클레시스 하십시오, 넘치는 슬픔에 그러한 이가
취하지 않도록. 이런 이유로, 나는 여러분이 그를 향해 사랑으로 지배하길 파라클레시스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을 위해 내가 썼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여러분의 시험, 모든 일에 헤아리는 이들인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떤 이에게 거저 살게한다면, 나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즉 거저 살게했던 내가, 만일 내가 누군가 거저 살게 했다면, 여러분 때문에 메시아의 얼굴 앞에서, 그 사탄이 많은 것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생각들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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