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3:7~11
그런데 만일 돌들에 기록된 문자들 안에서 죽음의 섬김이 영광으로 되었다면, (그 결과 이스라엘 아들들도 모세의 그 얼굴을 향해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의 폐지된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숨결의 섬김은 얼마나 더 영광 안에 있게 되겠습니까?
바울의 대적자 중에는 '옛언약 옹호자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바울일행이 전하고 다니는 새 언약을 비판하고, 다시금 옛언약의 안전한 토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빌립보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에서 모두 이러한 옛언약 옹호자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옛언약 옹호자들은 당연히 옛언약인 토라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해 나갔을 것입니다. "토라에 이렇게 써있으니까, 이 부분을 꼭 지켜야하고, 지키기만 하면 확실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안정성'일 것입니다. 즉 몸 밖에 써있는 글자들을 확실히 붙잡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고 확고한 '인간성의 길'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처하는 가장 간편한 자세는, '토라는 폐지되었으니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논조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에는 좀 더 복잡한 논의들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게 하는 핵심 키워드는 "섬김"과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섬김과 영광이 거의 모든 절마다 반복됩니다.(개역성경에는 "직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 문장씩 살펴봅시다.
-죽음의 섬김
바울은 옛언약인 토라가 '죽음의 섬김'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섬김'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구절은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7
그러면 우리가 율법이 비뚤어졌다 말하겠습니까? 일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뚤어짐이 기회를 붙잡아 계명을 타고서 내 속에 온갖 탐심을 만들어냈습니다.
...
로마서 7:13
그래서 하나님 닮은 것이 나에게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일 없습니다. 다만 죄가 정말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 닮은 것을 사용해서 나를 죽음의 영향 아래 두신 것입니다. 이는 죄를 (핑계를 댈수 없는) 더한 죄에 빠뜨리기 위함입니다.
즉 옛언약인 율법은 오히려 그 법대로 살 수 없는 망가진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망가진 인간성은 공명정대한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삶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입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도덕적 죽음도 뜻합니다. 즉 '나'라는 존재가 '법' 앞에서 도덕적 사망상태로 서 있습니다. 옳은 것을 알면서도 지킬 수 없는 딜레마를 매번 겪고 있고, 이것을 극복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 '율법'은 이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옛언약인 토라가 주는 '죽음의 섬김'입니다.
-죽음의 섬김은 영광으로 되었다
바울은 '영광'을 추상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 위에서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영광입니다. 바울은 출애굽기 34장의 문맥에서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략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모세의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50일만에 시내산에 당도했고, 그 산에서 옛언약인 토라를 받았습니다. 구출된 노예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토라에는 성막 설계도가 들어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이 땅에 구현하는 계획이 포함된 토라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 두 돌판은 하나님과의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증명하는 '몸 밖 증서'였습니다. 그러나 확고하게 돌에 쓰여진 이 '몸 밖 증서'는 언약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전혀 보장해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드러낼 뿐이었습니다.(십계명의 제 1계명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모세의 손으로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계약서가 지시하는 삶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심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31,32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이 기도 끝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패한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한 언약을 갱신하십니다(이때 이미 하나님의 선택 속에서 법은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갱신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저'였습니다.(출애굽기 33:17) 하나님의 초법적인 결정이 이뤄졌을 때, 모세는 자신들이 이 '거저로 구별된 씨알'인지 어찌 아느냐고 하나님께 되물었습니다. 즉 거저를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은 것입니다.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에 굳게 계약서를 새겨주셨지만, 이 돌판으로는 부패한 이스라엘의 인간성에 대해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돌판 계약서가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다른 것. 그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모세가 살아있을 수 없으므로, 그를 바위틈에 두고 손으로 덮은 다음 뒷모습만 살짝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계약서를 쓰게 됩니다.(출애굽기 34:1)
모세는 그 돌판을 들고서 내려왔습니다. 이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이 났습니다. 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이 빛 때문에 모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의 회막에 들어갈 때만, 그 수건을 거두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돌들에 기록된 문자들 안에서 죽음의 섬김이 영광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바울이 '몸 밖에 쓰이는 자격증'을 염두하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큰 그림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몸 밖의 돌에 쓴 옛언약도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미완의 영광, 하나님을 온전히 마주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존재라는 진실을 드러내지만("죽음의 섬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살려놓을 수 는 없는 영광입니다.
-숨결의 섬김
그런데 바울은 또다른 섬김을 말합니다. 바로 "숨결의 섬김"입니다. 이 숨결의 섬김에 대해서 우리는 고린도후서 앞의 내용을 통해 줄곧 확인해왔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31:31이 말하는 "새 언약"입니다. 에스겔 11장과 36장이 보여주듯,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인간성 자체가 새로워짐을 뜻합니다. 그리고 숨결로 새로워진 인간은 토라를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숨결의 섬김"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사람을, 토라를 이루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이 변화의 끝이 부활입니다.)
"숨결의 섬김을 받은 사람이 토라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말은 토라에 얽매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토라를 극복한다는 말입니다. 흔히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 말하는 사람이 바로 숨결의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숨결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을 이루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 산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에게는 토라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토라 없어도 토라의 뜻을 위배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토라 자체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다워진 이 사람은 토라를 어길래야 어길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했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3:8~10
서로를 향한 사랑외에는 아무 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남을 사랑하는 자가 토라를 다 이뤘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만일 어떤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바로 이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토라의 이룸입니다.
즉 숨결의 섬김을 받는 새 언약의 당사자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몸 밖에 있는 여타의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사랑할 자격과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받음은 그의 인간성이 새로워진다는 말이고, 그 새로워진 인간성은 법을 넘치도록 만족시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줄 아는 사람에게, 법은 그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습니다.
'에클레시아' 식구가 되는 자격이 바로 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에클레시아가 성령받은 이들의 모임이라면, 이 모임은 사랑할 수 있게 된(적어도 그 방향으로 나아지고 있는) 새로운 존재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은 달라진 자신 외에 다른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성이 새로워지는 것 외에, 어떤 몸 밖 기준도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옛언약을 통해 확인하는 사람들이고, 그 한계를 새언약으로 넘어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몸 밖에 있는 무언가를 의지하는 "안전한 옛언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초창기 에클레시아를 계속 공격해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러한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갈라디아서 3: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토라를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실함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
갈라디아서 4:8~11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모세가 받아온 첫번째 계약서가 파기되고, 하나님의 거저에 의해서 두번째 계약서가 다시 쓰여진 것은,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옛언약인 법체계 준수로는 법체계를 정말로 준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그의 숨결로만, 법을 지키고도 남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이 창조된 인간은 옛언약 때문에 죽고, 새언약 때문에 살아난 사람입니다. 법에 한 번 죽었고, 숨에 한 번 살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판결의 섬김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섬김은 더욱 많은 영광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즉 바로 그 부분 안에서 영광스러웠던 것은 영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압도하는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태양이 뜨면, 더 이상 호롱불은 밝지 않습니다. 숨결의 섬김으로 사는 이들이 나타났을 때, 법조문으로 사는 삶은 더 이상 추구할만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토라도 하나님의 영광이었으나, 그것을 압도하는 더 큰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제는 토라 지킴이 아닌 성령으로 사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사는 삶은 자연스럽게 토라 지킴의 결과를 낳는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지 않고 토라를 지키게 됩니다. 즉 그의 사랑은 의도가 없는 순수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랑에 사랑 아닌 다른 의도가 있다면, 그 사랑은 순수성을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이루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사랑이야 말로 세상 모든 일이 이뤄야하는 최종 결과입니다.
그러나 옛언약은 그저 파기해버리면 그만인 부정적이기만 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영광이 있습니다. 새언약 전까지 옛언약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유지합니다. 고쳐서 새롭게 할 수는 없으나, 완전히 패망하는 속도를 늦출순 있습니다. 그러나 옛언약은 결국 패망으로 귀결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영광으로부터 (새)영광에 이르러야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몸 밖의 어떤 기준들의 한계를 분명히 인지하고, 그것에 의지하기를 거절해야 합니다.(그러니 사도에 대한 자격증 논란은 그쳐야 합니다. 오히려 성령받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법체계로 구성된 바벨도시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께서 써주신 글자라도, 돌과 같은 마음이 성령을 통해 살갗처럼 되기 전에는 몸 밖
기준들은 부패한 인간성에 의해 악용될 뿐입니다.
만일 폐지되었던 것도 영광을 통해 있었다면,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은 훨씬 더 한 것으로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승천 이후, 숨결의 섬김을 받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법 앞에서도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산 존재로서 살아있습니다. 옛 언약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는 사람들이 마침내 나타났는데, 어찌 다시 법 체계에 자신을 옭아매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은, 법을 극복하는 삶이지, 법에 안주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렇듯 숨결의 섬김은 대단한 것입니다. 옛언약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귀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주어졌으니 생명으로 넘치고, 토라를 이뤄버리니 정죄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이 옛언약의 영광으로 얼굴이 빛나던 모세는 존경하면서도, 더 한 영광을 전하고 있는 바울은 지금 그 자격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옛언약이 가시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다면, 새언약의 영광은 겉으로 보기엔 전혀 눈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허름하고, 고생하고, 약해보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이 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거저'로, '성령'을 통해, '새 언약'으로, 토라를 이루는 새인간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마찬가지로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고린도후서 5장의 맥락을 미리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 5:7, 새번역(볼드체는 수정한 단어)
우리는 신실함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
고린도후서 5:17, 새번역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창조의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무언가 몸 밖에 있는 기준들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벽돌로 지은 도시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자 했던 이들의 도시 건축을 하나님은 중단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불안으로 내몰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광야를 유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몸 밖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변화를 통해 안정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존재의 변화를 주도하시는 새창조의 하나님임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삶이 유대인이라는 계보를 통해 내려왔습니다. 물론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고 험한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그 계보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힘겹게 버티던 옛언약을 붙들고 있던 이들은,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을 그 옛언약으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성의 파탄을 보여주었습니다.
법으로 정초한 인간의 모든 희망이, 결국 절망으로 드러나버린 날, 그리고 3일 후,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죽을 수 없는 온전한 육체로 살아났고, 그 토라 없이도 토라를 이뤄낸 그이는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성령을 부어주기 위해 떠났습니다.(즉,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오늘날 성령 받은 이들, 곧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요엘 2:32)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벨도시 안에서 숨결의 섬김을 받는 이들의 탄생은, 새로운 존재의 새로운 출생이요, 법 앞에 죽어버린 사람들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과 삶을 후대에 전달해야 하는, 역사의 전달자들입니다. 바벨을 역전시키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7~11
그런데 만일 돌들에 기록된 문자들 안에서 죽음의 섬김이 영광 안에서 되었더라면, (그 결과 이스라엘
아들들도 모세의 그 얼굴을 향해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의 폐지된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숨결의 섬김은 얼마나 더 영광
안에 있게 되겠습니까? 판결의 섬김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섬김은 더욱 많은 영광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즉 바로 그 부분 안에서
영광스러웠던 것은 영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압도하는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만일 폐지되었던 것도 영광을 통해
있었다면,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은 훨씬 더 한 것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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