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그런데 나는 트로아스를 향해, 메시아의 복음을 향해 갔고, 그리고 문이 나에게 주 안에서 열렸는데, 나는 나의 가족 디도를 발견하지 못한 나의 숨결로 (인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떨어져 마케도니아를 향해 나갔습니다.

  바울은 다시 자신의 '겪음'에 대해서 술회합니다. 바울은 트로아스(드로아)로 갔습니다. 바울은 트로아스를 향해 간 것을, 메시아의 복음을 향해 갔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복음은 지면과 떨어져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왕명'이기 떄문입니다. 폭군이 지배하던 시절은 이 땅의 씨알들에게 무척이나 지치고 괴로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왕이 폐위되고, 사랑과 정의의 올바른 왕이 등극했다는 소식은,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이 왕명을 전하는 전령들을 가리켜 '천사'라 부릅니다. 천사라는 말을 가지고는 날개 없는 사람이냐, 그와 다른 존재냐를 가를 수 없습니다. 천사는 '보냄받은 존재' 즉 전령이라는데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는 그 왕으로부터 직접 보냄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새로운 왕이 이제 온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소식을, 그 왕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트로아스에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들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도움을 받아 마케도니아로 가겠다는 당초 계획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아끼기 때문에, 에클레시아가 스스로, 기꺼이 정상화되기 전까지는, 슬픔을 가지고 그곳에 방문하지 않기로 스스로를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은채, 바울은 위태로운 여행을 떠났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트로아스에서 만나기로한 동료 디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로마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곳곳에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바울 뿐만 아니라, 디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나기로 정한 시간과 장소에 디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최악의 상상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새로운 왕에 대해서 말하고, 그 왕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말하자, 그 이질적인 통치, 새로운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트로아스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문이라 표현합니다. 문은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입니다. 메시아의 통치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트로아스에 생긴 새로운 공동체는, 로마 통치 영역 안에 메시아의 통치를 새로이 가져왔을 것입니다. 즉 바울은 트로아스 지역에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였습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오는시대가, 트로아스 지역에 현실화됩니다.


  이렇듯 바울은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이 이땅에 돌입하는 것을, 트로아스의 문들을 통해 봤습니다(그는 더욱 자신이 전하는 왕의 소식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디도의 행방에 대해서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그는 마케도니아로 향합니다.(그리고 우리는 디도와의 조우를 7:6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때에 우리를 개선행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가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그이 앎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가)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바울은 '문'이미지를 이어나갑니다. 바울은 동사가 없는 특이한 형태로 위의 구절을 기록했습니다. 구조가 드러나도록 띄어쓰기를 해봤습니다. 바울의 주어는 "하나님께로의 거저"입니다. 이 하나님을 수식하는 것이 1) "모든 때에 우리를 개선행진 하게 하시는" 과 2) "그이 앎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로의 거저는 두 가지 대상을 갖는데, a)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 과 b) "우리를 통해 모든 곳" 이 그것입니다. 즉 아래와 같이 재배치해볼 수 있습니다.

1) "모든 때에 우리를 개선행진하게 하시는"
2) "그이 앎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

a)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
b) "우리를 통해 모든 곳"

1)
  개역성경에서 "이기게 하시고"로 번역된 단어는, 뜨리암베뷰오(θριαμβευω)인데, 이 단어는 전쟁을 종식시킨 군대가 포로를 이끌고,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개선행진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이 개선행진의 이미지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9~13
  내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도들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개선행진의 끄트머리에 두셨습니다. 우리는 현시대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똑같이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메시아로 인해 우리는 바보입니다. 여러분은 메시아 안에서 지혜가 있다지요? 우리는 약합니다. 여러분은 강하다지요? 여러분은 칭찬받지만,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지요?

  맞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각까지도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우리는 제대로 입지 못하고, 가혹한 대접을 받고, 우리 소유라 할 만한 집고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밤새 육체노동을 하면서 고되게 일합니다. 욕을 먹으면 우리는 복으로 되돌려 줍니다. 핍박을 받으면 우리는 견딥니다. 중상모략을 당하면 우리는 온유한 말로 대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는 그저 접시에서 쓸려나와 버려지는 현시대의 쓰레기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선행진의 이미지는 뒤집힙니다.

골로새서 2:15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벗겨진 그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시고,
오히려 그이 안에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즉 끌려가는 줄로만 알았던 현시대의 쓰레기들이, 사실은 이긴 사람들이고, 그 이긴 사람들의 선두에는 전쟁을 종식시킨 개선장군으로서 예수가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요, 사실 예수를 끌고 온 이들이 전쟁 포로였다는 '관점의 역전'이 바로 여기서, 메시아의 개선문인 십자가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이 전쟁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2)
  이후 "냄새"가 등장합니다. 개선행진 때는 향을 피웁니다. 여러 개선행진을 경험해봤던 사람들은 그 향냄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예수가 개선장군으로 승리하셨다"(곧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인 '복음'입니다.)는 것에 대한 앎을 그 향냄새와 결부시킵니다. 이 냄새에 대해서는 아래 구절에서 상술하겠습니다. 이 메시아 예수를 아는 향내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a), b)
  개선행진은 향내음도 진동하지만, 이제는 전쟁의 전리품들을 나눌 시간입니다. 전리품은 팔지 않습니다. 거저 줍니다. 이 하나님께 속한 거저가 이제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집니다.(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앞 본문의 '카리스조마이'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거저가 주어지는 대상은 두 단계로 나뉩니다. 먼저는 a)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 입니다. 그리고 거저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b)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 이릅니다. 즉 '거저'는 새로 등극한 메시아의 통치(지배)입니다.(이 '통치'는 평화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거저'가 온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지금 그러고 있는 중입니다. 트로아스의 차원 포탈들이 생긴 것은 이 일의 과정인 것입니다.

  또한 [메시아의 승리], [메시아에 대한 앎], [거저의 주어짐], [에클레시아], [땅 끝] 의 개념들은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사람들을 통해 복과 저주가 흘러간다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이자, 포로 회복의 예언이 마침내 이뤄졌음을 보여줍니다.

  메시아의 향기가 우리입니다,
  구원받은 이들과 멸망당하는 이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이들은 한편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냄새요,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삶으로부터 삶으로 향하는 냄새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것들을 향해서 충분하겠습니까?

  현시대의 찌꺼기들, 그러나 이들은 오는시대의 승리자들입니다. 이들은 차원의 문들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돌입했음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랜드마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알기 때문에 전하는 개선장군 예수의 향내음이, 두 가지 반응으로 양분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냄새로 여겨지고, 또 누군가에게는 삶으로부터 삶으로 향하는 냄새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벌어진 사건은 하나일 뿐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벌어진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상이한 두 가지 인간인식이 나타난 것입니다.

  개선행진의 향내음이 죽기보다 싫은 이들은, 전쟁에서 패한 포로들 뿐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승리자는 홀로 이기셨고, 포로들에게 그 이김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식을 고집하는 이는, 꺾인 무릎을 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 향내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여기고 거부합니다. 이들은 이미 죽어있고, 또 자기 인생의 결과를 죽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의 추구를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함. 이것이 포로의 모습입니다.  

  삶으로부터 삶으로 향한다는 말은 이미 살았고, 마침내 완전히 살아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들은 메시아 예수의 부활을 믿었고, 또한 자신들의 부활 뿐만 아니라 모두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이 부활은 메시아의 승리로 얻어진 결과입니다. 이들은 이미 삶으로 넘칩니다. 비록 이들은 포로들에 의해 핍박받는 것으로 보이나, 이것은 인식의 오류입니다. 누가 이기고 있습니까? 핍박받으나, 죽음이 아닌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메시아를 따라 이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종말론을 살아가는 에클레시아의 모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둘로 깔끔하게 나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이김은 전쟁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미리 이뤄진 그 결과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을 열어재꼈기 때문입니다. 이 가능성의 시간은 기회가 될 수 있고, 이미 얻은 것을 놓칠 수도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것들에 충분하겠습니까?"

  완전히 충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충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절망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완전과 불완전의 경계를 가르자함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서는 '추구'가 지금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현재 충분하지 않음'은 더욱 충분해질 것인지, 충분하지 않으니 그만 둘 것인지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종말론적 삶으로의 초대는 거저 주어지는 자비로운 초대이며, 자비로운 초대는 현재의 분명한 추구를 요구합니다. 현재의 결과가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많은 이들과 같지 않고,
  오히려 백주대낮의 심판으로부터 (있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메시아로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추구를 말합니다. 곧 부름받은 이가 갖는 현실의 태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많은 이들과 다릅니다. 여기서 "팔아먹다"라고 번역한 것은 본래 "소매로 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예수파 등등 각각의 파당들이 난립해서, 마치 노점상처럼 거리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누가 이 거리를 장악할지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가 이 거리를 차지하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개선행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력 형성을 통한 자기 정당성, 생존이 아닙니다. 오히려 백주대낮의 심판으로부터 있는 것처럼 사는 종말론적 태도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제가 "백주대낮의 심판"이라 번역한 단어는 '에일리.크리네이아(ειλικρινεια)'로서, '헤일로스(태양)'과 '크리노스(심판)'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즉 밝음 아래서 벌어지는 판단이고, 저는 이 단어가 바울에게 이것이 역사의 끝날 벌어질 최후의 심판과 연관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21:25
그리고 밤이 더이상 없을 것이고, 그리고 등불과 햇빛이 더 이상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사라진 밝음 속에서 벌어지는 신적 판단의 미래가, 바울에게는 현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이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저를 받아 에클레시아로 살게 된 바울은 매순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새 왕의 통치가 가져온 새로운 시대 속으로 들어왔다는 말은 곧 매순간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심판받듯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오늘 맨 마지막에 "메시아로"라 써놓은 것이 있습니다. 희랍어 엔(εν)은 "~로" 또는 "~안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의 타임라인을 살아가는 에클레시아의 현재는 메시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소속'이라는 정적인 의미만을 뜻하지 않고, 메시아의 삶을 계속 자신의 삶의 도구로서 사용한다는 동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팔아먹는 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자신이 메시아로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로 말함"이 무엇일지를, 이제 고린도후서 3,4장에 걸쳐 그 전모를 밝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2:12~17

  그런데 나는 트로아스를 향해, 메시아의 복음을 향해 갔고, 그리고 문이 나에게 주 안에서 열렸는데, 나는 나의 가족 디도를 발견하지 못한 나의 숨결로 (인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떨어져 마케도니아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모든 때에 우리를 개선행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가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그이 앎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가)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메시아의 향기가 우리입니다,
  구원받은 이들과 멸망당하는 이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이들은 한편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냄새요,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삶으로부터 삶으로 향하는 냄새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것들을 향해서 충분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많은 이들과 같지 않고,
  오히려 백주대낮의 심판으로부터 (있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메시아로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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