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5~22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확신으로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두 번 기쁨을 갖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하여, 그리고 다시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여러분에서부터 유대로 보냄받기 위하여.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코린도스 에클레시아의 두 번 기쁨,
2)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도움을 받아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하여,
3) 마케도니아에서 다시 코린토스로 이동해서 이번에는 유대로 가기 위해서.

  "두 번 기쁨"이란 바울의 선교 여행의 후원자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번"이 되는 이유는, 그 계획에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바울을 '두 번' 파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바울의 선교 계획은 최초 고린도전서 16:5~7에서 제시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5~7, 개인번역

  나는 마케도니아를 지날 때면 언제든 여러분에게 가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곁에 잠시 머물거나 혹은 겨울을 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내가 가려는 어디든 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을 잠깐 보길 원치 않기에, 여러분과 오랜 시간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허락 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제시했던 이 선교여행 계획은 오늘 고린도후서 본문에 와서는 다소 달라집니다. 즉 없었던 유대로 가는 계획이 추가되고, 코린토스 지역에 오래 머물 것이라는 계획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제시된 선교계획에서는 코린토 에클레시아가 바울을 두 번 도와줘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계획 변경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에 대해서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래는 스파니아(스페인)으로 가려했으나, 마케도니아로 행선지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사연은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16:6~10, 새번역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가서, 무시아 가까이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마케도니아를 방문했고(사도행전 20장), 이후 유대에 이릅니다(사도행전 21장). 그리고 유대에는 바울을 붙잡아다가 로마에 넘겨주려는 유대인들로 가득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선교 계획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정녕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하지만(21:12),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했다고 말하고(21:13), 죽을 길에 오릅니다. 예상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힙니다. 거기서 최후 변론(사도행전 22~26장)을 마친 뒤, 로마로 압송되고 거기서 죽임당합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사형당한 일까지는 기록하지 않지만, 그가 죽기 전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디모데후서)를 통해 그의 마지막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바울이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말하고 있는 '마케도니아-고린도-유대'에 이르는 여행 길은, 이 땅에 에클레시아를 출범시키기 위한 여정이며, 하나님은 메시아의 남은 겪음들을 바울의 몸을 통해서 이뤄가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는 아직 이러한 선교여행이 이뤄지기 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획을 변경했고, 이 변경은 아마 바울이 정말 사도가 맞는지 의심하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불신을 더욱 부추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획하는데 내가 가벼움을 사용했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계획한 것들이 내가 살몸을 따라 계획한 것이겠습니까, "네"가 나와 함께 "네"가 되고, "아니오"가 나와 함께 "아니오"가 되게끔 하려고?

  바울은 자신의 계획변경에 대해서 항변합니다. "가벼움을 사용했겠습니까?"를 개역성경에서는 "경솔히 했겠습니까?"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살몸(σαρξ)"을 만납니다. "살몸"은 앞΄에서 "살몸의 지혜"라는 말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이 살몸의 지혜는 하나님의 거저와 반대되는 말로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살몸을 따라"는 부정적인 늬앙스를 갖습니다. 살몸이란 단어가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만(고린도후서 3장에서 우리는 긍정적으로 사용된 "살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로 바울에게 '비뚤어진 인간성'의 의미로 사용되며, 특히 앞서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살몸'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 변경에 대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있는 누군가는, 바울이 한 입으로 두 말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즉 바울은 네(yes)도 말하고, 아니오(no)도 말했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이런 주장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로고스는 여러분들을 향해 "네"도 "아니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여러분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아들인 그이는,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통해서, "네"와 "아니오"가 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이는 그 안에서 "네"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인 한, 그이 안에서 "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이를 통해서 그 "네"가 하나님께 우리를 통한 뚜렷을 향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여행을 하나님의 약속 지킴(신실함)과 결부시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말'을 가지고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바울의 로고스가 아닌 '우리'의 로고스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로고스'의 일환으로서 제시한 선교계획은 '네' 혹은 '아니오'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네'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의 로고스이기 때문입니다. 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은 따지고 반대할 수 있는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근거로서 로고스입니다.

  '신실함'은 '약속지킴'입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해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마침내 성취되기 시작한 시점이 에클레시아의 출범입니다. 즉 사멸하는 가는 세상의 끝에, 새로운 사람들이 출생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 새로운 종말론적 시간표 위에서 바울은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 오는시대 위에서 새로이 시작된 사람들과 함께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에 자신의 선교 계획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즉 사멸해가는 세상 위에서 새로운 사람을 불러내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일환임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코린토스가 에클레시아인한, 이 하나님의 언약 프로젝트에는 무조건 '예(yes)' 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이 언약 프로젝트의 수혜자이자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는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메시아를 향해 확고히 걷게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름부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 찍으시고 그 숨결의 보증을 우리의 가온들 안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말이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본문에서 '기름 부름'과 '인 찍음'과 '숨결의 보증'은 모두 같은 것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곧 성령받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프로젝트를 위해 에클레시아가 연합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설득도 동의도 동참도 성령 안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성령에 따라 이뤄진다는 말은, 인간의 기꺼움이 사라지는 노예의지를 뜻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은 각자의 가온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같은 성령을 공유하고 있다면, 해당 주제에 대한 공론화와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모두를 통해 결정하실 것입니다. 더불어 이것은 사람들의 결정이기도 합니다.


  "인이 찍혔다"는 말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이 "인 찍힘"은 에스겔 9장 이야기를 가져온 것입니다. 에스겔 9장은 잔혹한 심판 장면을 묘사합니다. 도시를 파괴할 다섯 사람과, 그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인을 찍을 세마포를 입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에스겔 9:4~6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성읍 가운데로 곧 예루살렘으로 두루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려 놓아라."

  또 그는,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성읍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쳐서 죽여라.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가엾게 여기지도 말아라.
노인과 젊은이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들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라.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성전의 장로들부터 어린 아이와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신음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 즉 고린도후서의 맥락에 따르면 도시 전체에 대해서 '파라클레시스(παρακλησις)'하는 사람들은 이마에 인이 찍힙니다.

  저는 여기서 요한계시록과 고린도후서의 연결을 봅니다. 바울과 요한이 같은 깨달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9장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 요한도 인유하는 본문이기 떄문입니다. 세차게 부는 네 가지 바람이 잠시 멈추었을 때,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이 찍힙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를 세어보니 144,000이었습니다. 즉 바울, 디모데, 실루아노와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비롯한 아카이아의 에클레시아는 요한이 계시록에서 말하는 이 144,000의 실제 주인공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숨결의 보증"이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숨결"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보증(αρραβων)"은 일종의 차용증 같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후에 그 성령을 매개로한 온전한 것을 받을 것이 보장됩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성령은 결혼을 위한 신부의 지참금, 집 입주를 위한 계약금, 결국 역사가 온전하게 이뤄질 것을 보장하는 우리의 새로운 인식입니다. 이 '보증'에 관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의 맥락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 대해서 의심하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바울 자신이 제시한 것은 선교계획이었고 그 선교계획의 정당성을 하나님의 언약 프로젝트와 성령에서 찾았습니다. 즉 종말론입니다.
예수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간표 위에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바로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시간 위에 에클레시아를 배치하시는 새창조의 숨결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15~22

  그리고 바로 이러한 확신으로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두번째 기쁨을 갖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하여, 그리고 다시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여러분에서부터 유대로 보냄받기 위하여. 그래서 이것을 계획하는데 내가 가벼움을 사용했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계획한 것들이 내가 살몸을 따라 계획한 것이겠습니까, "네"가 나와 함께 "네"가 되고, "아니오"가 나와 함께 "아니오"가 되게끔 하려고?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로고스는 여러분들을 향해 "네"도 "아니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여러분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아들인 그이는,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통해서, "네"와 "아니오"가 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이는 그 안에서 "네"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인 한, 그이 안에서 "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이를 통해서 그 "네"가 하나님께 우리를 통한 뚜렷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이는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메시아를 향해 확고히 걷게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름부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 찍으시고 그 숨결의 보증을 우리의 가온들 안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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