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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8~14

  즉 우리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족 여러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우리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결과 우리는 이 사는 것마저도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겪었던 어려움에 관해 말합니다. 바울이 '아시아'라고 말했지만, 바울은 에페소스 지역에서 코린토스로 편지를 보냈으므로, 아마 에페소스 지역에서 겪었던 일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혹은 그것을 포함하는 더 많은 사건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의 겪었던 어려움의 일부를 확인해봅시다.

사도행전 19:23~41
  그 무렵 그 돈 때문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인이 있었는데, 그의 일꾼들은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그가 일꾼들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말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가 그래도 잘 사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는 이 일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에베소만이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설득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떳떳한 우리 사업에 불명예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위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을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르테미스는 위엄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시아 전체가, 아니 온 세상이 그 여신을 숭배하지 않습니까!"

  이 은세공업자들이 주도해서, 도시 전체가 아르테미스를 지켜야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시위로 진동합니다.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라는 뜻모를 소리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성난 군중은 아르테미스가 아닌 메시아 예수를 전하는 이들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의 친구들은 바울이 나서지 못하도록 말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메시아 예수를 통한 거저와 평화를 많은 사람들이 거절했습니다. 모두가 거절하는 것을 해나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우리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란 다름 아닌 메시아의 복음일 것입니다. 메시아로부터 시작된 동일한 겪음. 그 겪음을 견딤으로 파라클레시스의 연대를 이뤄가는 삶은 바울의 말대로 사람의 능력을 넘어선 것입니다. 바울은 신경쇠약에 걸린듯 합니다. '사는 것마저도 낙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담담하게 겪음과 파라클레시스를 말하는 바울을 보며, 저는 그가 초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문제 투성이의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보며 '든든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하는 그는 제가 따라갈 수 없는 이상향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 와서야 저는 그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한결같이 강했던 게 아니라, 좌절과 낙담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기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우고 싶은 것 역시, 그 좌절과 낙담을 딛고 일어서는 그 힘입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 안에 그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신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낙담을 재해석합니다. 이것은 딛고 일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해석입니다. 낙담과 좌절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실함의 방향을 또렷하게 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힘에 부치는 일을 짊어진 자신들을 의지해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은 좌절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즉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새창조의 과정으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로 새롭게 빚어가고 계십니다.

  따라서 '좌절', '낙담'은 자신에게 내린 사형선고입니다. 만일 이 사형선고가 끝이라면 인생은 그야말로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을 죽였을 때, 그는 새로운 자신으로 일으켜집니다. 마치 메시아가 십자가로 자기 몸을 끌고 갔지만, 그이가 새로운 자신으로 빈 무덤에서 나타났듯이 말입니다. 즉 바울은 좌절과 그것에 대한 극복을 '십자가-부활'로 사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십자가-부활'스러워지는 것이 하나님께 신실해지는 길입니다.

  이는 좌절할만한 일에 거리를 두고 초연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평정심을 유지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편일률적인 한결같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메시아적인 삶의 리듬'이 필요합니다. 즉 마땅히 옳은 일에 몸을 던집니다. 옳은 일이 늘 그렇듯 어려움이 그 몸을 둘러쌉니다. 몸은 어려움의 상황에 무척이나 취약해서, 금세 출구가 보이지 않고 낙담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때가 '십자가-부활'이 필요한 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일어날 때입니다.

그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셨고 끌어내실 것입니다, 그분을 향해 그가 여전히 또 끌어내실 것이라고 우리는 바랐습니다, 여러분도 우리에 대해서 간구함으로 함께 도와야 합니다, 이는 거저 주신 것이 우리에게로 많은 얼굴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통하여 우리에 대해 감사드려지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신체가 정지하는 순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인간의 삶에 현전하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 죽음의 영향력에 우리의 간담이 녹아버린 상태입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과 진배없이 느껴집니다. 사람을 낙담시키는 근원적인 힘이 죽음에 있고, 우리가 그 힘에 짓눌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 속에 있는 누군가를 파라클레시스한다는 것은, 결국 이 죽음의 가능성 안으로 '몸'을 밀어넣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밀어넣어 누군가와 함께 기꺼이 견디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기대없이는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써놓고도 말이 이상합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것을...이길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신뢰하는 하나님은 "끌어내셨고, 끌어내실 분"입니다. 즉 그는 출애굽 전문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출애굽시키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악에 억눌려있는 이들을 그저 좌시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에 대한 신뢰는, 악에 억눌려있는 이들에게 자꾸만 들어가게 합니다. 들어가서 그 악을 함께 견디고 파라클레시스합니다. 그러면 끌어내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러한 신뢰없이는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아르테미스에 광분하는 에페소스 지역이 자신에게 위험할 것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갑니다.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이 들어갑니다. 거기서 어려움을 겪지만, 그 겪음들을 견딥니다. 그리고 그러한 견딤은 함께 견디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만듭니다. 그리고 죽는 줄 알았지만, 아직 안 죽고 빠져 나왔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부활', '들어감-끌어냄'으로 자신의 일을 설명합니다. 그가 겪은 어려움은 그가 들어갔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잘 하는 것은 들어가서 견디는 일 뿐입니다. 죽도록 견디다가 죽을 것 같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끌어내셨습니다. 즉 그는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 자리에는 바울과 같은 겪음을 견디는 사람들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고린도 에클레시아도 함께 간구함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거저'가 이뤄졌고, 이 '거저'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은 모든 에클레시아가 감사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일행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삶을 '거저'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일행만의 일이 아닙니다. '거저'로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 실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출애굽이자, 십자가와 부활로 살아가는 새 존재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마땅히 거저로 살아가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전치사입니다. "~로부터", "~통하여". 하나님의 거저에 대한 감사가 많은 얼굴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저에 대한 많은 일들을 통해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 얼굴들이 에클레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얼굴이고, 많은 일들이란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이루신 거저의 사건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부심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형상과 함께 하는 그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과 '대낮의 심판'으로, (즉) 살몸의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로, 우리는 코스모스 안에서 몸을 위로 하여 살아갑니다, 여러분을 향해서는 더 넘치도록 (그리 합니다).

  '거저에 대한 감사'가 에클레시아의 자부심입니다. 거저에 대한 감사는 형상과 함께 하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형상과 함께 하는"을 개역성경은 '양심'이라 번역했습니다. '쉬네이도스(συνειδος)'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서 '쉰(συν)'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에이도스(ειδος)'는 '형상'입니다. '에이도스'와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에이돌라(ειδολα)'입니다. 이것은 '우상'이라고 번역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차원을 드러내는 두 가지 표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 비현실을 언제나 마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현실이라 함은 '허구성'을 뜻하지 않고, 그것이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서의 비현실입니다. 현실 속의 사람은 두 가지 비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비현실을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구현하는 현실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맞대고 있는 비현실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이도스는 참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있습니다. 실체라는 철학 용어보다 분명한 표현은 '부활체(σομα πνευματικον, 고린도전서 15:44)'일 것입니다. 바울이 함께 한다고 말하는 그 형상은, 부활의 몸으로 지금 살아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이돌라는 그 의미처럼 그림자, 거짓입니다. 실체가 없는 추상입니다.

  삶을 거저 주시는 분께 돌리는 감사. 그 감사는 거저 주시는 형상과 함께 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뒤집어서 형상과 함께 하는 이들만이 그 거저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거저 주시는 삶(형상과 함께 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거룩과 깨끗으로 사는 삶입니다. "살몸의 지혜"가 "하나님의 거저"의 반댓말로 놓였습니다. '비뚤어진 인간성(살몸)'이 말하는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거저의 삶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현실을 댓가로만 이해하는 그림자들을 자기 위에 드리울 뿐입니다.(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진단하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상태입니다. 이미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를 이 '살몸'이란 말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현시대 안에서 몸을 위로 하고 사는 삶. 현시대가 나를 옭죄어도 다시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는 삶. 바로 이러한 삶을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이식하고 싶은 것이 바울의 심정입니다. 곧 이것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파라클레시스하기 위한 바울의 겪음입니다. 그가 형상과 함께 하기 때문에 사는 삶입니다. 거저의 삶을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삶입니다. 자부심이 넘치지 않을 수 없는 삶입니다.

  '자기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신마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자신을 사랑하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슬픈 말이지만, 옳은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사랑할 나는 어떤 나일지'가 문제가 됩니다. 이 지점이 '나'에 대한 비현실과 접하는 지점이고, 이 물음은 결국 '나다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다움'의 문제는 분명히 필요한 문제지만, 개체주의로 귀결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다움'이 타자와 소통될 수 없다면, 나다움을 추구하다가 홀로 섬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 다우면서도 타자와 소통 가능한 나이어야 합니다. 즉 나 다움은 연속과 불연속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바울은
자기애로 넘치는 사람이고, 그의 자기애는 형상과 함께 함으로 사는 삶에 근거한 자부심입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보고서 힘든 삶이라고 안쓰러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바울은 자신의 삶을 그 누구와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나다움은 예수를 통해 새롭게 이해된 이스라엘 이야기 위에서 이해된 자기 자신입니다. 거저의 삶을 이 땅에 구현하는 투사로서의 자신입니다. 그럼 이제 하나의 문제가 남습니다. 바울의 나다움은 개체주의를 넘어 타자와 소통할 수 있을까요? 그의 자부심은 타자를 배제하는 교만함과는 다른 것일까요?

즉 우리는 여러분이 위로부터 깨닫는 것들이나 알게 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랍니다, 텔로스까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여러분들도 메로스로부터 우리를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러분의 자부심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주 우리 예수의 날에 우리의 자부심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 및 아카이아에 있는 에클레시아들이 알만한 것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직 다 말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텔로스(끝)까지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끝에 이르도록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텔로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겪음'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앎은 일부에서부터, 부분(메로스)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완전한 앎으로 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바울은 다시 '자부심'을 말합니다. 앞에서 '자부심'은 '거저에 대한 감사로 사는 에클레시아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자부심이 바로 바울과 디모데라고 말합니다. 자칫 교만하게 들릴지도 모를 말입니다만, 이 말은 바울과 디모데가 '거저에 대한 감사로 사는 사람의 모범'이 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그리고 이러한 삶에 대해서 바울은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일행과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이의 합당한 관계는 서로를 자부심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너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갖는 자부심은 다른 사람을 찍어 눌러서 얻은 자부심이 아닙니다. 타자를 경쟁자로 이해하고서 얻은 승리에 도취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자부심은 올바른 삶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부심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 다울 수 있으면서도, 타자에게 열려있는 자부심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당당히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자부심이라고. 그리고 여러분도 어서 이 자부심으로 들어오라고. 

  그리고 바울은 서로가 서로를 자부심으로 여기는 그 날을 말합니다. "주 우리 예수의 날".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주 우리 예수의 날"을 예수의 재림 때로 이해하면, 고린도 에클레시아와 바울이 비참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떄에는 이런 날을 보지 못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주 우리 예수의 날"을 현실에 이루는 것이, 지금 바울과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공동 숙제입니다. 적어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날을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거저에 감사하는 에클레시아의 삶'을 사는 날로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에클레시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서로 진정으로 화합하는 날이, "주 우리 예수의 날"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에클레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하루 속히 "주 우리 예수의 날"을 보는 것이 바울의 소망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8~14

  즉 우리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족 여러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우리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결과 우리는 이 사는 것마저도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 안에 그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신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셨고 끌어내실 것입니다, 그분을 향해 그가 여전히 또 끌어내실 것이라고 우리는 바랐습니다, 여러분도 우리에 대해서 간구함으로 함께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로 거저 주신 것이 많은 얼굴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통하여 우리에 대해 감사드려지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부심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형상과 함께 하는 그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과 깨끗함(대낮의 심판)으로, (즉) 살몸의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로, 우리는 코스모스 안에서 몸을 위로 하여 살아갑니다, 여러분을 향해서는 더 넘치도록 (그리 합니다). 즉 우리는 여러분이 위로부터 깨닫는 것들이나 알게 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랍니다, 텔로스까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여러분들도 메로스로부터 우리를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러분의 자부심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주 우리 예수의 날에 우리를 그리 여기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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