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베드로전서 3:17~22


왜냐하면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의도하신다면, 좋음 만드는 이들이 당하는 게, 열악함 만드는 이들이 당하는 것보다 말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보다 나으니라"라고 번역한 단어는 크레이톤(κρεῖττον)입니다. 이 비교급 형용사의 본래 모습은 크라토스(χρατος). 이 단어의 용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은 누가복음 1:51입니다.


누가복음 1:51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그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크라토스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 새번역성경은 크라토스를 "권능(strength)"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4에서는 메시아와 천사를 비교하며, 천사들보다 메시아께서 "크레이톤"하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1:4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보다 나으니라"라는 번역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 말은 어떤 측면에서 나은지를 보여주지 않고, 또한 그렇게 낫다기 보단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고 말하는듯 합니다.


  그래서 "더 강력하다"는 말로 번역했는데, 이는 '크라토스'가 '힘'과 '통치', '권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힘이 바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땅에 효력을 발휘합니다. "좋음을 만드는 이들이 당하는 것"으로.

  여기서 "만드는"은 창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희랍어에서 만듦과 창조는 둘 다 '포이에오(ποιεω)'를 씁니다. 그리고 '좋음'이라는 말 역시 창세기로 소급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당함이,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것이 2:12부터 시작된, 신실한 자가 처하는 억울함이 갖는 의미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신실한 사람이 늘 억울함에 처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기원문의 조건절을 끼워넣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의도하신다면". 기원문을 조건절로 쓸 때는 희박한 가능성을 뜻합니다. 즉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만, 만에 하나 일어났을 땐, 그때야말로 좋음을 창조하는 이들의 당함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실현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제시한 신실한 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계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최악의 상황은 최선의 상황으로 역전된다. 하나님 통치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망치는 열악한 이들"을 처벌하는 것 역시 강력하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 정의를 세워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만 하자고 난민들은 에클레시아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언급했듯이, 인간의 제도들은 이 일을 성실히 수행해나가는 좋음의 섬김이들입니다. 더불어 에클레시아는 그 좋음을 창조해나가면서도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좋음(공공선)을 추구하는 한, 정부를 포함한 인간 제도와 에클레시아는 협력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들이 로마 사회의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하는 난민임을 기억해보세요. 사회 제도가 닿지 못하는 그 늪지대에서도 에클레시아는 꽃을 피웁니다. 오히려 억울한 당함 속에서 더욱 화려하게. 영원하게.


메시아도 한 번 비뚤어짐들에 대해 죽으셨기 때문에, 의롭지 않은 이들을 위한 의로운 이입니다, 이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함인데, 그이는 한편으로는 살몸으로는 죽임 당하셨고, 반면 숨님으로는 삶으로 창조되셨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의 시작이 "메시아"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억울한 당함'을 통해 꽃을 피운 사례를 다시 한 번 메시아에게서 찾습니다.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해봅시다. 메시아의 "비뚤어짐들에 대해 죽으심"은 곧 "의롭지 않은 이들을 위해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방식만이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바로 그 "의롭지 않은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간편합니다.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본문이 정말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본문의 "한 번"은 개역성경에서는 "단번에"로, NIV와 NASB에서는 "once for all", 나머지 번역에서는 "once"로 번역했습니다. 결정적인 단회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것을 이것을 십자가로 볼지, 아니면 메시아 예수의 삶 전체로 볼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의 영향을 받아, '단번의 제사'라는 측면에서 이 본문을 읽게 되면(물론 히브리서는 그러한 의미이지만), 이전에 제도와 주인과 남편과 아내를 섬기는 '삶'에 대해서 강조해온 베드로의 주장은 메시아 예수의 삶의 측면과 직접적인 연결점을 없게 됩니다. "단번에"라는 번역은 옳지만, 그 단번의 삶은 2000년 전 메시아의 삶 전체도 마찬가지이고, 사실 너무 당연하게도 그 어떤 삶도 단번이 아닌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위의 본문은 "죄인들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비뚤어짐들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당대 비뚤어짐들에 대해 죽음으로 사셨습니다.


  또한 저는 뒤에 이어지는 '살몸'과 '숨님'의 대조가 몇몇 주석자가 말하는 것처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혹은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의 대비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단번에"를 사건에 묶어놓았기 때문에,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속성으로 살몸과 숨님을 치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개념들은 같은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결코 헬라철학의 범주들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살몸으로는 죽임 당하셨고, 반면 숨님으로는 삶으로 창조되셨습니다.


  동사는 둘 다 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살몸'은 비뚤어진 인간성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1세기 에클레시아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개념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념을 통일시키기 위해 작위적인 단어들을 만들지 않아도, 그 둘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히브리 배경에서 도출된 단어들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살몸은 육체도 아니고, 인간성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성 전체가 무엇에 이끌리는지를 보여줍니다.


로마서 7:14b~15

나는 살몸에 속하여 비뚤어짐의 노예로 팔렸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나도 가늠할 수 없는 힘 아래 짓눌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살몸에 속한" 상태는 비뚤어짐의 노예, 즉 자신도 가늠할 수 없는 힘 아래 짓눌린 상태이고, 그 상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행하게 되는, 소위 "어쩔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이 인간의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이는 어쩔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살몸' 역시 신약성경이 가진 공통의 이해를 전제하고서, '비뚤어짐을 행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성'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참한 인간성을 삶에서 소멸시키는 것은, 자신이 아닌 외부상황과의 직면 속에서 벌어집니다. 무고한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속에서도 좋음을 창조하는 삶은 곧 "죽임당함"입니다.


  그리고 그 "죽임당함"은 동시에 다른 삶의 다른 양상을 낳게되는데, 곧 "숨님으로는 삶으로 창조되셨습니다"입니다. "숨님으로는" 이라는 말 역시, 육체와 분리된 영혼 따위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삶을 이끄는 주권, 그 주권을 따라 이끌리는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디우의 말처럼 살몸과 숨님은 "한 주체의 짜임"이고, 삶이 메시아를 마주했을 때 갈라질 수 밖에 없는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숨님으로는 삶으로 창조되셨습니다"의 삶은 고난받더라도(심지어 죽임당하더라도) 하나님께 신실한, 메시아 이전에는 없었던 인간성입니다. 예수는 그 인간성으로 이땅에 오셨고(그래서 숨님으로 나신 것이다), 그 인간성으로 살다가, 그 인간성으로 죽임당하셨고, 하나님은 그 인간성의 불멸을 부활로 확언하신 것입니다. 새 창조는 옛 창조를 이루었던 바로 그 인격의 도래를 통해 이 땅에 벌어지는 새역사입니다(따라서 새것은 가장 옛것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 숨님으로 메시아는 감옥 안의 숨들에게 가셨고, 말 전하셨습니다, 방주를 짜맞추던 노아의 날들에 하나님의 큰 참음이 당시 신실하지 않은 이들을 기다렸습니다, 그 방주 안으로 몇 사람만이, 그것은 여덟 프쉬케들인데, 물을 가로질러 건짐(구원)받았습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해석들 중에서, 인간성으로부터 영육을 분리시키는 해석을 분명히 배격해야 합니다.(그것이 사도신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도 말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숨님' 즉 온전한 인간성이, 갇혀있는 인간성 즉 '비뚤어짐의 노예가 되었던 인간성'을 만났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노아가 방주를 짜맞추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인간성을 이 땅에 드러내셨고, 큰 참음을 가지고, 그 비뚤어진 사람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방주에서 단지 여덟 사람만이, "물을 가로질러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여덟 사람은 '방주로' 향했습니다. '숨님'이라 언표되는 인간성은 도덕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 삶의 목적, 그 삶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날들에 메시아를 보내셨는데, 그 메시아는 그 여덟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 곧 온전한 인간성의 방향, 숨님이었습니다. 노아를 중심으로 그 인간성은 방주라는 거대한 환영 표지판을 만들고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인간성을 저버렸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메시아'는 예수의 성(last name)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책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원수와 전쟁을 벌여 이기고, 성전을 깨끗이 하는 일을 수행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를 통해 그 원수가 사탄이었음이 밝혀지고, 그 성전이 자기 육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숨님의 인간성으로 사탄과 맞서 자기 살몸을 극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메시아가 노아 시대에는 없었습니까? 노아 자신이 동시대 인격(숨)들에게 메시아였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데칼코마니인데 지금은 세례가 건져냅니다, 살몸의 때 씻음이 아니라 쉬네이도스의 좋음의 요청이 하나님께로, 메시아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이는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하늘로 오르셨고, 천사들이 그이 아래 놓이며 엑수시아들과 잠재력들도 (아래 놓입니다).


  베드로는 왜 노아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본문에서 "데칼코마니"라고 번역한 것은, '안티토폰(ἀντίτυπον)'으로 이 단어는 쌍둥이 모양 중 어느 한 쪽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아마도 당시 주물 공정에서 유래된 말이 아닐까 싶은데, 이 단어의 첫번째 뜻이 "단단한 몸"이고, 두번째 뜻이 "반대편에서 내리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이것이 죽은 이들에게 찍는 도장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같은 단어가 히브리서에도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 성소 그 자체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새번역은 "모형", 개역성경은 "그림자"라 번역했습니다.


  저는 '데칼코마니'라 번역했는데, 이 단어의 핵심 의미는 "짝"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노아 이야기와 당시 에클레시아의 상황이 서로 짝처럼 맞아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때 짝처럼 맞아들어가는 것이 "물을 가로질러 건짐(구원)받음"입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물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았고, 난민들도 물에 잠겼다 일어나는 세례를 통해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우리가 세례에 대해서 흔히 갖을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도 합니다. 세례는 살몸의 때를 씻어주지 않습니다. 살몸의 때를 씻어줘봐야 살몸은 살몸이기 때문입니다. 그 방향을 돌려놓지 않으면, 살몸의 결과는 죽음일 뿐입니다.

  "물을 갈로질러 건짐"은 살몸의 씻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요청이었습니다. 그 요청의 대상은 하나님이요, 그 요청의 과정은 메시아 예수의 부활이며, 그 요청의 내용은 쉬네이도스가 창조의 좋음에 들어맞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쉬네이도스'는 흔히 "양심"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이 쉬네이도스는 더 무거운 단어, 더 핵심으로 부각되어야 하는 단어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2:14~16
이방사람이 날 때부터 토라가 없어도, 토라가 말하는 것을 행할 때마다, 토라 없이 스스로에게 토라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쉬네이도스가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고 때로는 변명하며 마음에 새겨진 토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포하는 복된 소식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는 그 날에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마음에 새겨진 토라가 드러나는 사람에 대해 말하며, 그 사람의 증거가 쉬네이도스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쉬네이도스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모든 사람이 가진 보편적인 도덕률로 이해되었지만, 톰라이트는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된 이방인들의 특징으로서 쉬네이도스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19

이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생각 때문에 누군가 슬픔들을 부당하게 당한다면 (말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에서도 우리는 쉬네이도스를 이미 만나고 왔습니다. 슬픈 일들을 부당하게 당하더라도 지켜내는 바로 그 생각이 쉬네이도스. 은혜는 이러한 쉬네이도스의 원인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3:16

그러나 부드러움과 두려움과 함께, 여러분은 좋은 분별(양심)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언어폭력을 당할 때,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좋은 생활방식을 모욕했던 이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언어폭력을 당할 때, 그것을 뒤집을 수 있게 하는 지렛대도 좋은 쉬네이도스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쉬네이도스는 '세례'를 규정합니다. 세례는 하나님께 좋은 쉬네이도스를 달라는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그 시작은 하나님께 좋은 쉬네이도스를 달라하고, 그 요청대로 메시아처럼 죽음을 사는 일이 됩니다. 그것이 부활로 귀결될 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아의 날들 속에서도 안티튜폰인데, 왜냐하면 방주를 탄 노아의 가족들은 줄곧 물 밖을 갈망하며, 하나님께 "물 밖에서의 삶"을 요청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그것을 보여주는 단초입니다.


  하나님께 요청된 쉬네이도스, 그 쉬네이도스를 이루는 삶으로서 죽음, 그 죽음의 예정된 역전으로서 부활. 에클레시아의 삶은 메시아의 그것과 안티튜폰이 됩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승천으로 마무리합니다. "그이는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천사들이 그이 아래 놓이며 엑수시아들과 잠재력들도 (아래 놓입니다)." 천사들, 권리행사들, 드러날 힘들이 모두 자신들이 물을 지나 구원얻는 일을 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물 가운데를 지난 그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반응형

'베드로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드로전서 4:12~19  (1) 2016.11.16
베드로전서 4:1~11  (1) 2016.11.09
베드로전서 3:8~16  (0) 2016.10.26
베드로전서 3:1~7  (1) 2016.10.19
베드로전서 2:18~25  (0) 2016.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