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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1~11, 개인번역

그러므로 메시아는 살몸으로 겪으셨고,
바로 여러분은 바로 그 생각을 (무장으로) 갖추십시오,
왜냐하면 그 살몸으로 겪은 이는 비뚤어짐을 이미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욕망으로 겪는 것 속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으로 겪는 것 속으로로
그 살몸 안에서 곁에 남음이 크로노스를 사는 것.

 

  "살몸으로 겪었다"는 말은 십자가 처형을 포함한 메시아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이는 삶 내내 살몸, 즉 생존을 위해 욕망하는 인간성의 방향겪으셨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살몸과 숨님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사유를 전개할 때, 우리는 이 사유에 동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염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오늘 본문에도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살몸'이라는 삶의 지향성을 인지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더불어 '숨님'이라 불리는 그 살몸에 역행하는 삶의 지향성도 인지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있습니다. '살몸'을 겪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살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겪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겪는 대상을 인지하고 있을 때만 그것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떤 가게가 유명하다는 사실을 모르면, 매일 걷는 길 옆에 그 가게가 있어도 관심을 갖지 않듯이 말입니다. 인간성이 갖는 연약함, 한계, 비뚤어짐을 '겪는 사람'은 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도 그러셨습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생기는 그 어쩔 수 없는 삶의 방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오늘 저와 메시아는 그 출발이 같습니다.

 

  새로운 것이 도래합니다. 바로 생각입니다. 만일 당신이 살몸을 겪고 있다면,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바로 메시아의 생각입니다. 메시아는 살몸의 지향성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이 성찰은 내가 아닌 메시아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본래 내것이 아닌 외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은 바로 그 생각입니다. 베드로의 의미심장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왜냐하면 그 살몸으로 겪은 이(이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는 비뚤어짐을 멈췄기 때문입니다."

 

  즉 메시아는 살몸을 겪었지만, 비뚤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살몸이 곧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시아는 살몸을 겪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기이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기이한 길에는 '생각'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끼어드는데, 그 인식은 "하나님의 뜻"이라 불리고, 이것과 대립되는 것은 사람들의 욕망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살몸이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살몸을 그저 살몸으로 남겨두는 것. 위의 본문 맨 마지막 동사인 "살아있습니다"는 흔히 오는시대의 삶을 가리키는 '조에'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삶, 문명인의 삶을 말하는 '비오스'입니다. 즉 생각을 통해 살몸이 아무 영향력도 갖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을 메시아에게서 배웁니다.

 

  "그 생각을 갖추십시오"에서 "갖추십시오"는 군대에서 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 메시아를 따라 벌어지는 전투는 살몸과 생각의 투쟁입니다. 살몸은 나의 뜻이요, 생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살몸을 생각에 복종시킵니다. 이것이 문명인의 삶(비오스, βιος)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크로노스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 민족들의 하고잡에 힘냈던 것에 관해 말입니다, 
(그들은/여러분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과도함들 안에서,
욕망들, 
술취함들, 취해서 막말함, 광란의 연회들,
그리고 위법적인 그림자 숭배들 안에서 따랐습니다.
그 (민족들의 하고잡)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은 지금 낯설어 합니다,
그 과도한 구원없음으로 가지 않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비방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대비되는 개념을 가져옵니다. 바로 "민족들"입니다. 즉 베드로가 에클레시아를 "확장된 유대인, 참 유대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유대인과 대비되는 민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힘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더 이상 그러기를 멈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민족들이 힘냈던 목록들을 제시합니다.(이 목록은 로마서 13장의 목록과도 유사합니다. 아마도 바울과 베드로가 같은 내용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음란들, 욕망들, 술취함들, 취해서 떠듦들, 광한의 연회들, 불법적인 그림자 숭배들입니다. 복수명사들을 쓴 것으로 보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들의 원함"들은 성적 부도덕과 음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둘 다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적 부도덕과 음주는 생각이 살몸을 제압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적군의 지원병입니다.

 

  "불법적인 그림자 숭배들"은 국가가 금지하는 우상숭배 제의를 가리킵니다. 만일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의미로 쓰려면, 저 "불법적인"이란 말은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 숭배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베드로사 "사람이 만든 제도 아래에 놓이십시오"라고 말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좋음'을 섬기는 동역자로서 국가와 에클레시아는 공공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금지하고, 게다가 하나님도 금지하시는 제의를 굳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제의를 고집한다면, 성과 술 때문에(혹은 다른 이유고) 생각이 마비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살몸의 비뚤어짐들을 끊고, 새로운 생각으로 새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편지를 읽어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함께 생각없이 살던 이들은, 에클레시아로의 변화를 낯설어합니다. 이들 모두에게는 그 "과도한 구원없음"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오늘 해설의 서두에, "살몸"이라는 차원을 인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살몸을 인지하는 사람은 숨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숨님으로부터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지 않으면, 살몸인 사람은 살몸이 전체이기 때문에 살몸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에클레시아를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말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가진 이들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할 준비하신 분께. 즉 이 내용으로 죽은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살몸의 삶으로 (살았던) 이들을 따라 심판이 이뤄지고, 다른 한편으로 숨결의 하나님을 따라 (살았던) 이들을 따라 심판이 이뤄지기 위함입니다. 

 

  "말을 드리다"는 재판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모든 것들을 실토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판을 준비하신 그 한 분께(아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께 모든 심판의 전권을 넘기셨습니다. 요한복음 5:27) 말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가진 이들, 산 이들, 죽은 이들입니다. 이 목록에 에클레시아는 없습니다. 즉 가진 사람이던지, 산 사람이던지, 죽은 사람이던지 심판의 대상은 살몸에 자신의 인격을 협력했던 변절자들 뿐입니다.

 

요한복음 5:24,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그런데 설령 그들이라도, 메시아 예수의 말을 듣고서 살몸을 인지할 수 있고, 하나님 뜻으로부터 비롯된 메시아의 생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살몸의 귀결인 죽음에서, 숨님의 시작인 생명으로 넘어오는 길은 그 길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공포입니다. 내가 잘못한 모든 것들을 공명정대한 한 분에게 다 아뢰는 것은, 나 스스로가 공명정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클레시아에게 해당하는 공포는 아닙니다. 간혹 에클레시아 안에서 최후의 심판이 얘기되지만, 이것은 잘못하고 있는 집권자, 혹은 자신이 살몸임을 부정하는 파렴치한 사람에게 할 말이지, 숨결을 따라 사는 에클레시아와는 상관없는 말입니다.

 

  존 스토트는 "최후의 심판이 신자의 신실함을 자극할만한 유일한 것"이라 말했지만,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날에 올 영광만이 신자의 용기를 자극할만한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클레시아를 공포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두려움의 숨결이 아니라, 아들의 숨결, 곧 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는 아빠이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그 끝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구원에 걸맞는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위해서 술취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앞에서 각각을 위한 사랑을 힘을 다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비뚤어짐들의 넘친 것을 덮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향해 뒷담화 없이 손님사랑하십시오. 각자는 거저받은 것을 받은대로, 각자를 향해 바로 그 거저받은 것으로 섬기십시오, 하나님의 다채로운 은혜를 (사용하는) 온전한 집안 관리인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생각에서 시작해서 생각으로 마무리 됩니다. 제가 '구원에 걸맞는 생각'이라 번역한 단어는 '소프로네오(σωφρονέω)'입니다. 파자하면, '프로네오'는 생각이고, '소'는 '구원하다(소조)'에서 온 접두어입니다. '온전한, 보존된'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는 만물의 끝을 염두합니다. 이 끝은 베드로 스스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선언했던 끝이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끝입니다.

 

사도행전 2:16,17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이 끝을 살아가는 에클레시아는 그 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립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맞설 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몸에 눌러붙으려는 나'입니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삶의 방향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택하는 나입니다. 그 나와 싸웁니다. 그 살몸과 맞서며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구원에 걸맞는 생각입니다.

 

  일련의 순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1) 생각하고선 2) 기도합니다. 에클레시아가 술 취해선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대로 생각하고 기도하려면, 정신을 또렷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3)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사랑을 찬찬히 뜯어보시기 바랍니다. 비뚤어짐들의 넘친 것을 덮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살몸을 덮어 이길 수 있는 게 사랑이듯 말입니다. 망나니같은 살몸을 덮어다가 끝에 가져다 놓는게 사랑입니다. 살몸을 가져다 놓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살몸을 따라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호되게 혼이 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그렇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살몸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비뚤어짐들의 넘친 것을 덮"는다는 말 때문에, 잘못한 것을 숨기고 봐주는 것을 사랑이라 오해할 순 없습니다. 감추기는 커녕 오히려 "뒷담화 없이' 정직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사랑은, 서로를 익숙하게 대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로를 손님 대하듯 대하는 것을 사랑이라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손님은 낯선 사람입니다. 낯설다는 건, 내가 그 사람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에게 손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럼 사랑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각자"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즉 베드로는 전체주의적인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자가 중요합니다. 저의 이러한 해석이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다채로운"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이 단락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2~14장과도 대단히 유사합니다. 본문에서 "거저받은 것"은 희랍어로 "카리스마"인데, "은사"로 번역됩니다. 즉 하나님께 거저 받은 "다채로운" 은사들을 가지고, 공동체를 거저 섬깁니다. 즉 보편성과 개체성이 아우러진 진정한 인간관계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생각으로 살몸을 제압하는 것은, 개인적인 목적이 아닌, 더 큰 차원의 보편적 목적, 사람과 사람이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는 집안 관리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의 "집"은 아마도 성전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모임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새로이 창조하신 바로 그 메시아의 몸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이들을 집안 관리인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합니다. 집안 관리인은 개인이 소멸된 전체가 아닌, 각자를 위한 다채로운 은혜를 사용한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만일 누군가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들처럼. 만일 누군가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합창을 이끄시는 힘과 같이. 모든 것 안에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뚜렷해지시기 위함입니다, 메시아 예수 안에는 그 뚜렷과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는 강력(크라토스)이 있습니다. 아멘.

 

  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하듯 말해야 합니다. 이 말은 모든 말을 '종교적'으로 하란 말이 아닙니다.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신중하게 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섬길 때는 타인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합창을 이끄시는 하나님"처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합창은 고대 비극이나 희극이 상연될 때, 뒤에서 노래를 부르는 '코러스'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코러스를 이끄는 사람은 각자의 소리를 잘 듣고,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을 닮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과 섬김은 1) 모든 것 안에서 2) 메시아 예수를 통해 3) 하나님께서 4) 뚜렷해지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처음에 등장했던 '생각'으로 메시아 예수와 연결되고, 살몸을 인지한 각각의 신자는 다른 공동체 식구들을 모든 것 안에서 다채로우면서도 조화롭게 섬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통해서 다름 아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가 드러납니다. 그 집안 관리인들이 가꾸는 바로 그 집, 에클레시아를 통해 말입니다.

 

  베드로는 영광송으로 오늘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메시아 예수 안에 그 뚜렷함이 모두 들어있다고. 그러니, 우리가 그이를 생각하고, 그이를 따라 실천함으로 이 땅에 그 뚜렷을 이뤄야 한다고. 그리고 또 하나 제 눈길을 사로잡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강력(크라토스)". 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메시아 예수 안에 그 강력이 있습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3:17

왜냐하면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의도하신다면,

좋음 만드는 이들이 겪는 것이,

열악함 만드는 이들이 겪는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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