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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8~16

  그 끝에 관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는 같이 생각하며, 함께 겪으며, 형제 사랑하며, 공감을 가지고, 눌림을 생각하며, 악에 맞서 악을 돌려주거나 욕설에 맞서 욕설을 돌려주지 말고, 오히려 그 반대로 복 빌어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이것을 위해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토 텔로스(το τελος)'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데, 하나는 앞에 나왔던 예시들의 연장으로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에 나온 예시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1) 기독인이 정부에 대해서 2) 머슴이 주인에 대해서 3)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4)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어찌 해야하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하는 핵심은, 이 네 가지 관계 모두가 신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2장에서 "거룩"에 대해서 논한 베드로는, 그 거룩의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당시 난민 기독교 공동체를 그물망처럼 엮고 있던 다양한 관계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메시아 예수의 고난이 있었습니다.(2:21~25)

  저는 저 '토 텔로스'를 2:11~12의 결론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11~12

사랑받는 여러분, 나는 곁에서 속삭입니다, 방문자들과 임시 거주자들에게 말입니다, 살몸의 욕망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라고, 그 프쉬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들이), 민족들 안에서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이렇게 해야 하는 목적은, 여러분에 대하여 악을 행한다고 말하는 이들 안에서, 그 온전한 일로부터 관찰한 이들이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여다보시는 날에.


  노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내부의 생활방식입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공동체가 외부와 맺는 관계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이 시작되고 나서 예들이 열거되었습니다. 정부, 주인, 남편, 아내가 나오고, 오늘 본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내부 공동체의 생활방식을 말하고, 외부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며 단락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토 텔로스'는 2:11에서 시작된 사유가 정리되었음을 표시하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또한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2:11의 "살몸의 욕망", "프쉬케에 맞섬"이 단순히 성에 대한 권면일 뿐만 아니라, 맞은대로 복수하고픈 욕구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외부세계가 가져다 주는 억압을 그대로 돌려주고픈 욕구 말입니다.


  "형제 사랑"으로 번역한 필라델포이(φιλαδελποι)는 신실한 사람들 사이에만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신실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들끼리의 낙원을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함께 외부세계의 "악에 맞서 복을 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 식민지 한복판에 놓인 박해받는 공동체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이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각자 놓인 처지는 다르지만, "같이 생각하며", "함께 겪는다"고 말합니다. 그 생각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요, 그 생각 끝에 나오는 겪음들은 메시아의 몸(곧 에클레시아)안에서 겪는 "메시아의 남은 고난"입니다.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 이너써클 안에서는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성취가 시작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우리들끼리의 생활습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에클레시아는, 외부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 에토스를 배우기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적대자에 대한) 공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눌림을 생각하며, 악에 맞서 악을 돌려주거나 욕설에 맞서 욕설을 돌려주지 말고, 오히려 그 반대로 복 빌어주"는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가 사는 현시대와는 동떨어진 생활방식입니다.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고 적대감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적대감을 긍휼로 돌려줍니다. 이 위대한 전환의 중심에 메시아 예수의 고난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을 습관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부름'과 '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부름'과 '복'이 나왔을 때는 반드시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내러티브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구성요소는 1) 부르심 2) 땅 3) 복입니다.

  하나남께서 부르신 사람은 아브라함과 믿음으로 연결된 후손이 됩니다. 그리고 이 후손이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그 땅은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갖는 개념입니다. 미래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갱신된 창조세계를 말하는 것이요(1:4), 현재로는 오늘 내가 생활방식을 영위하고 있는 바로 이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내가 서 있는 땅이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언약이 갖는 "땅"은 현실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갖습니다. 즉 현실에 대한 최선과 더불어 그 최선이 결국 내가 아닌 신의 은총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미래가 이 "땅" 약속에 의해 확보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누리는 복은 다름 아닌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무한한 긍휼의 원천,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베드로 개인에게는, 이 본문은 메시아 예수께 육성으로 직접 배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즉 베드로가 만났던 예수는, 아브라함 언약의 복이자,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을 받은 이후 복에 대한 이해가 전복되었고, 메시아 예수가 보여주신 삶이 복이라면, 그 복을 시작으로 아브라함 내러티브의 나머지 요소들(부르심, 땅)도 새로이 읽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내러티브 뿐만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포함한 토라 전체가 메시아 예수에 의해 새로이 해석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 새로운 해석의 결과물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하는 이는
악에서부터 그 혀를 멈추고 입술은 거짓을 말하기를 멈출지라,
악에서부터 멀어지고 좋음을 행할지라,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라갈지라,
왜냐하면 주의 두 눈은 의인들에게, 주의 두 귀는 탄원에,
그런데 주의 얼굴은 악한 행실들에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그랬듯이, 베드로는 하나의 주장이 끝나면, 그것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구약 본문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시편 시편 34:12~16을 인용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베드로가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인지 골똘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 본문은 "악에서부터"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악에서부터 떠나는 길은, 다시 그 악에게 선으로 돌려주러 가는 길이라는 사실에서, 이 시편 이해의 새로운 해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박해받는 기독인들에게 "좋은 날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는 날들일 것입니다. 악에게 선으로 돌려주는 것만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해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그 좋음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여러분이 의 때문에 당했다면, 여러분은 복된 이들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좋음"이라 말합니다. 희랍어 '아가토스(αγαθος)'는 히브리어 "토브"의 번역어입니다. 즉 창조의 하나님 보시기 좋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좋음은 악에게 선으로 돌려줍니다. 왼뺨을 댑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누가 해하겠냐고 베드로는 반문합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베드로는 여기서 희구법 조건절을 씁니다. 즉 극히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의 때문에" 해를 당했다면, (여기서도 가치의 전도가 벌어집니다)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메시아와 공동 상속자가 분명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그 안에 확실히 계심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두려움을 여러분은 두려워도 말고 쩔쩔매지도 마십시오, 그런데 주님을 메시아로 여러분들의 가온에서 구별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묻는 모든 이에게는 늘 대답으로 준비된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나 부드러움과 두려움과 함께, 여러분은 좋은 분별(양심)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언어폭력을 당할 때,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좋은 생활방식을 모욕했던 이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해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에클레시아 밖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보복의 두려움, 존재 상실의 두려움, 인정받지 못하는 두려움, 물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 관계 결렬의 두려움. 결국 이 두려움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단 하나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이들에게, 이것을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을 메시아로 여러분들의 가온에서 거룩히 구별하십시오" 이 문장은 이사야 8:13의 인용입니다.


이사야 8:13

너희는 만군의 주 그분만을 거룩하다고 하여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할 분이시다.


  베드로는 이사야 8:13의 "만군의 주"를 예수께 적용합니다. 인격의 중심(가온)에 주님이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거룩히 기억합니다. "거룩히 구별"은 허튼생각 안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였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눈으로 목격한 사실입니다. 부정적인 가능성이나, 허망한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아도 됩니다.

  "메시아"는 예수님의 성(last name)이 아니라 직책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악을 무찌르는 왕이자, 하나님의 말을 전언하는 예언자이자,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는 십자가에서 바로 메시아이심이 인정되었습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는 가장 참혹하면서도 그 지극한 사랑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역사의 한복판에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 속에 깨끗하게 기억해두는 것이, 악을 선으로 갚는 원동력이 됩니다. 메시아가 그 사실 속에서 사시기 때문에, 그 사실 위에서 하는 생각과 시런은 메시아적인 것이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토대위에서 세우는 무너지지 않을 공든탑이 됩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를 가온에 구별한 삶은, 에클레시아 밖에서 보기에는 기이한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이한 삶은 반드시 질문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하면, 질문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삶은 메시아적이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세상이 세상임을 알게 하는 것이 참 기독교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악을 선으로 갚는 온전한 생활방식을 보고서, 자신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기독교과 세상이 그저 어휘만 달리 쓰는 번역 가능한 두 집단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구별된 다른 사람들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메시아적 삶이 갖는 소망에 대해서는 늘 대답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대답"이라 번역한 말은 '아폴로기아'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변론' 역시 아폴로기아입니다. 법정이든 일상에서든 무언가에 대해서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정당성. 그리고 그 메시아 예수의 구체적 사건들을 통해 전망할 수 있게 된 소망에 대해서, "모든" 기독인은 "언제나" 변론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투사의 태도가 아니라, 부드러움과 두려움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부드러움은 이 소망 자체가 가진 긍휼의 성격이요, 두려움은 우리 역시 갈 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분별".(개역성경에는 "선한 양심") 즉 창조의 하나님께 합당한 선과 악의 구분입니다. 이 좋은 분별은 아담이 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속에 메시아 예수가 사건으로서 거룩히 구별되어 계시기에, 그는 그 메시아께 합당한 선과 악을 사유하며 실천해나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여러분이 언어폭력을 당할 때,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좋은 생활방식을 모욕했던 이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이들을 망신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이 '고난'이라는 방식으로 그들을 얻기 위함입니다. 메시아가 하셨듯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구절은, 우리가 '토 텔로스'를 생각하면서 적용했던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유가 시작되었던 첫머리로 돌아가면, 우리는 같은 의미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12

이렇게 해야 하는 목적은,

여러분에 대하여 악을 행한다고 말하는 이들 안에서,

그 온전한 일로부터 관찰한 이들이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여다보시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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