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베드로전서 3:1~7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각자의 남자 아래 놓이는데,
"이와 마찬가지로"는 앞에서 제시된 원칙이 줄곧 일관적으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래 놓이다"로 번역한 휘포타쏘(υποτασσω)는 2:13에서는 황제, 총독과 그리스도인, 2:18에서는 주인과 머슴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3:1부터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도 휘포타쏘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아래 놓이다"라는 말이 굴종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신학자들이 밝혔습니다. 대부분의 논증은 당시 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뤄졌는데, 당시 여자들이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기준은 여성을 오히려 우대한 것이다라는 논조로 흐릅니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한 말입니다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굴종'은 뜻없는 복종입니다. 뜻이 없다는 것은 존재 자체의 등위가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귀합니다. 이 귀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로 소급되는 귀함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만물") 위에 계신 메시아는(고린도전서 15:27, 이 구절에서도 "아래 두셨다"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모든 존재를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휘포타쏘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27,28
"그이가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 만물을 그 아래에 두신 분은 그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물을 그가 아래 두실
때에는 아들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 아래 두신 분의 아래 두어지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로서 모든 것 안에 계시기
위함입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공유하는 이 휘포타쏘에 대한 인식은, 시편 110편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시편 110편은 전쟁을 묘사합니다. 권능의 지팡이를 들고 계신 "주"는 주의 군대와 함께 시온에 집결했고(2,3), 전투하시는 주는 곧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었음이 드러나며(4), 모든 민족을 심판하고, 통치자들의 시체들로 넘쳐나게 됩니다. 이 전투 이후 시냇물을 마신 주는 고개를 드는 장면으로 이 장엄한 전투의 시편은 마무리 됩니다. 이 시편의 첫 구절이 "그이가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 즉 '휘포타쏘'입니다.
우리는 이 전투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로마에 대항하는 유혈폭동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권능의 주께서 죽임당하시는 것이 전투의 절정이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발 아래 두신 왕은, 죽임 당하심으로 모든 악의 근원을 끊어버리셨고, 영원한 용서를 나타내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 오히려 자신이 죽임당하는 전투를 통해 권능의 주는 제사장으로 폭로된 것입니다. 넘쳐나는 시체들은, 그 메시아의 전투로 인해 질식당한 악의 세력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에게, 이 시편 110편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기존의 유대교에서 읽었던 방식을 뒤집으면서도, 시편의 한 글자도 버리지 않는 해석이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충격을 느꼈는지는 고린도전서 15:26,27의 반복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 휘포타쏘는 메시아 예수를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단어였습니다. 위의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강박에 가까운 휘포타쏘의 연속입니다.
만물을 아래 두신 이가, 그 만물을 위해 죽으십니다. 그리고 그 만물을 위해 다시 사십니다. 이 방식으로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식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요구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본문 바로 앞에서, 베드로가 메시아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시를 읽고 왔습니다. 휘포타쏘의 예수.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휘포타소의 남자입니다. 존재상의 위계의 늬앙스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남자가 여자를 위해 죽고 사는 삶의 방식만이 남을 뿐입니다. 여기에 뜻이 있습니다. 이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 관계 안에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휘포타쏘를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남편과 아내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래"라는 말이 균형은 커녕, 어느 한 쪽의 굴종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만물 위에 계시듯, 남편은 여자 위에 있습니다. 이 "위"는 '내려다보기 위한 위'가 아니라 '죽어주기 위한 위'입니다. 전적인 사랑으로 뛰어들기 위해 올라간 다이빙대입니다.
...이는 설령 로고스에 신실하지 않은 어떤 남자들이라도 그 여자들의 생활방식을 통해서 로고스 밖에서 얻기 위함이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러분 생활방식의 깨끗함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외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이 "이는 설령"으로 시작됩니다. 메시아의 역할을 해야 하는 남편이 신실하지가 않습니다. 즉 메시아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 경우, 남편이 메시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기존의 휘포타쏘 논리가 전복 위기에 빠집니다. 죽지 않으려는 메시아이기 때문에, 사랑의 화합은 요원한 일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로 정해놓은 것보다 더 큰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녀에게는 생활방식이 있습니다. 이 생활방식은 1:15에서 언급했던 그 '아나스트레포'입니다. 즉 그녀는 거룩한 생활방식으로 부름받았고, 남편과 자신 사이에 있는 심원한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그녀의 실천 방향이 됩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두 개의 "놓임"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는 거룩을 말했고, 이것을 믿지 않는 남편 - 믿는 아내 사이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휘포타쏘에 대해서 말했던 내용들이 여기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표명된 말(로고스) 밖에서도 타인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열려있습니다.
생활방식이 더욱 희망으로 떠오르는 와중에, 베드로는 이제 생활방식의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늘의 여러분은, 머리들 땋기와 금들로 된 장신구나 입는 겉옷들의 외부적인 코스모스가 되지 말고,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금들로 된 장신구"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보는 소아시아의 부녀자들이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부녀자들이 부유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1 아니면 저런 것들을 추구할 수 없는 난민들의 박탈감을 베드로가 알고서, 일부러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머리들 땋는 것, 금들로 된 장신구, 입는 겉옷들로서 추구하는 것은 "외부적인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는 '조화로운 체계', '우주', '유기체'라는 뜻도 있지만, '꾸밈'이란 뜻도 있습니다. 아마도 전자의 의미들과 관련이 있을텐데, 외모를 통해 구현하려는 조화는 눈에 보기에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코스모스가 아닙니다. 이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1:20에서 등장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0
(그 메시아는) 한편으로는 창조세계의 기초를 넘어 알려지셨고(하나님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크로노스의 끝에 여러분을 통해 드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베드로전서 5:9에도 코스모스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제외하면 모두 "창조세계"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저는 오늘 본문과도 연결되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꾸밈은 마음대로 놓는게 아니라 어떤 '질서'를 전제하기 때문이고, 어떤 질서를 따르냐에 따라, 개별 꾸밈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모'라는 질서가 머리모양, 금장신구, 겉옷이라는 개별 항목을 갖듯이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베드로가 메시아의 질서를 말했고, 그 질서가 다양한 개별 관계에 적용되듯 말입니다. 이런 반영들을 베드로가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숨긴 가온의 사람이 되세요, 부드럽고 고요한 숨님의 썩지 않음으로, 그 숨님은 하나님 앞에서 폴뤼텔레스입니다.
베드로는 겉보기의 질서가 아닌, 숨님의 질서를 말합니다. 그 숨님의 질서는 피상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과 숨에 의해 창조세계가 창조되었으므로, 이 숨님은 참으로 창조세계의 본질적 질서라 하겠습니다. 그 숨님은 부드럽고 고요한 내면을 창조합니다. 썩어 없어지는 장신구들과 다른 내면을 가꿉니다.
폴뤼텔레스는 개역성경에서 "값진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폴뤼'는 다양성이고, '텔레스'는 끝, 목적, 궁극, 이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값진 것"을 포함한 더욱 풍성한 의미체계를 끌어낼 수 있는 말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폴뤼텔레스라고 판단한 근거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29와도 공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29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그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전에도 거룩한 여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바랐기에 스스로를 질서잡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남편들 아래 놓이며 말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을 때, 그녀는 그를 '주'라 불렀습니다. 좋음을 행하고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 않는 여러분이 사라의 아이들이 됩니다.
다시 "이와 같이"가 나왔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키워드들은 [거룩], [하나님을 향해 바람], [질서잡음]. 이 키워드들은 메시아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관계를 관통하는 주제들이었습니다. 거룩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출애굽 이야기(1:16)와 하나님께서 이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으니 결국 유업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바람(2:9)과 질서에 대한 담론(2:13, 18, 3:1)은 베드로전서의 중요한 주제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주제들로 관계를 질서잡은 사례를 제시합니다. 바로 모든 민족의 어머니 사라입니다. 사라는 언약에 따른 아브라함의 개고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참여한 사람이자, 위태롭고 위기 가득한 여정 속에서도 아브라함과 끝까지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하란 땅으로부터 떠나는 '거룩'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바람'과 아브라함을 섬기는 질서에 자신을 맞춘 인물입니다. 그리고 같은 생활방식을 소아시아 지역의 신실한 부녀자들에게 베드로는 요구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분명한데, 하나는 무언가 위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위협이 남편에 의한 위협인지, 아니면 기독교인에 대한 위협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신약의 에클레시아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사라의 아이들'은 같은 생활방식을 공유하는 이들로서 정의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함께 한 집에 살면서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즉 여자에 속한 더 깨지기 쉬운 그릇을 가치있게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 것.
즉 은혜의 삶을 상속받는 공동상속자들에게도 그리 할 것, 여러분의 기도들이 막히지 않기 위해서.
3:1~6이 아내들에 대한 얘기였다면, 3:7은 남편을 향합니다. 역시나 "이와 마찬가지로"로 시작됩니다. "한 집에 살면서"는 성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즉 여기서의 남자들은 남편이 됩니다. 아내를 얻은 남편에 대한 권면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이 "지식"과 뒤에 나오는 "호스(ως)"를 명사절 접속사로 번역했습니다. "원칙으로 할 것"은 '아포네모(απονεμω, 노모스νομος로부터 끌어내다)'를 번역한 것입니다.
여성을 "더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 보는 것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비교급 형용사를 썼다는 것은, 남자도 그릇으로 본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다만 여성이 남성보다는 육체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가치있게 대한다는 내용은 무슨 의미일까요? 휘포타쏘의 정점에 계신 메시아 예수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이는 강하시기에, 약한 것을 돌볼 줄 아십니다. 강한 것은 약한 것을 돌보기 위함이라는 코스모스 안에서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정에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육체적 약함으로 인해 존중해야 할 것과 더불어, 아내를 "은혜의 삶을 상속받는 공동상속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에겐 상속권이 없던 사회 속에서, 메시아의 생활방식을 본받는 남녀관계 안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함께 상속받는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해야 함을 천명한 것입니다. 더불어 "공동상속자"는 복수이므로, 가정 안에 있는 또다른 그리스도인을 마찬가지로 가치있게 대할 것을 남편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공동 상속자에는 분명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 머슴'도 포함될 것입니다.
가정(오이코스)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관계는 1) 남편-아내 2) 주인 - 머슴 3) 부모 - 자녀 입니다. 이것들이 하나님과 에클레시아의 관계를 드러내는 수사적 방식으로 모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주인이시고, 부모가 되십니다. 에클레시아는 아내이자, 머슴이고, 자녀가 됩니다. 이 오이코스에 관한 담론이, '오이케마이', 삼위일체의 경륜적 차원의 논의로 발전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들이 막히지 않기 위함입니다"는 기도가 올바른 관계가 선행된 이후에 이뤄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남편이 여성을 어찌 대하는지가, 남편이 제대로 기도하기 위한 선행조건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남편이 남편 되기 위해서는, 여성과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메시아로부터 시작된 질서가 적용된 결과입니다. 온전한 페미니즘이 여기에 있습니다. 메시아의 생활방식으로 타자를 대하는 것만이, 관계의 온전함을 가져올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 J.N.D. Kelly
, 12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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