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경본문을 읽을 때, 이 본문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직접 우리 삶에 대입하고픈 충동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게 간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세상은 복잡다단한 일들로 실타래처럼 엮여있었을 것이고, 이런 것들을 고려해가면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 드는 단어들을 골라, 생각이 닿는 대로 편하게 읽어내고 싶어합니다. 그럼 삶도 단순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는 편하긴 하겠지만 위험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볼 본문은 더욱 그렇습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라는 구절을 우리는 어찌 이해하면 좋을까요? 종을 피고용인으로 놓고, 주인을 고용인으로 놓아, 무조건 '갑'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적인 현실 타개안을 내놓으면 될까요? 신약성경은 우리의 현실로부터 2000년이나 떨어져있습니다. 이 역사적 거리를 의식하며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 제한적인 정보만을 줄 뿐입니다. 신약성경과 오늘 우리의 삶이 갖는 공백을, 우리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연구로
채워 넣어야 합니다. 성경이 '정체성'이라는 화살촉을 제공한다면, 그 화살촉이 날아가는 속도와 방향은, 2000년전의 바람이 아니라
오늘 부는 바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정체성은 연속되지만, 삶의 정황은 그야말로 불연속입니다. 성경을 본다고,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한결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우리는 늘 제한적인 앎을 가질 수 있을 뿐이고, 성경은
만물박사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나가라고 말할 뿐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것을 끝까지
경계하며 말입니다.
역사적 거리를 소거해버린 채 읽는 읽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저는 요새 신천지라는 이단을 마주하며 느낍니다. 역사성을 잃어버린 읽기는 그야말로 '자의적'입니다.
베드로전서 2:18~25
모든 두려움 안에서 주인 아래 놓인 머슴들은,
좋고 맞춰주는 (주인)들에게뿐만 아니라 굽은 (주인)들에게도 (속해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문장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희랍어 역본은 티센도르프 8판과 네슬-알란트 27판입니다.) 개역성경과 새번역은 분사로 쓰인 '휘포타쏘메노이(ὑποτασσόμενοι)'를 명령법 동사처럼 번역했습니다만, 이 분사는 주어의 상태를 보여줄 뿐입니다.
"머슴"이라 번역한 '오이케타이(οἰκέται)'는 집안에서 일하는 노예를 뜻합니다. 노예라고 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노동에 지쳐있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고대사회의 노예는 우리의 상상보다 형편이 좋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았던 노예도 많았고, 요셉처럼 집 전체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도 노예라 불렀으니 말입니다. 또한 의사, 교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1/3 정도가 노예였다고 합니다. 고대 사회의 산업은 모두 이 노예를 동력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고대의 노예는 영속적인 신분이 아니라, 재산을 모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전서 7:21에서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라고 조언합니다.
본문이 언급하는 "머슴"들은 이미 사람이 만든 노예제도 아래 '타의로' 놓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질서를 불평하는 사람도 아니고, 뒤집으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이 "모든 두려움 안에서"입니다. 이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일까요? 바로 앞 절인 베드로전서 2:17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바로 옆에 로마 황제도 있었지만, 로마 황제에게는 "존중하고 있으세요"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머슴들이 가진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임에 분명합니다.
이 "머슴"들은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이 현실 자체에 하나님이 부여한 뜻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머슴들입니다. 마치 타의로 난민이라는 사회 현실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이 현실이 기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에클레시아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이 현실 속에서 내 생각대로 방종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머슴들에게 하나님을 부단히 생각하고, 그 분의 뜻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머슴이 되라고 말합니다. 난민 에클레시아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는 머슴들 역시 이중 정체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임해야 할 직접적인 관계는 바로 주인과의 관계입니다. 베드로는 정반대의 주인상을 상정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주인에겐 이렇게 처신하고, 저런 주인에겐 저렇게 처신하라는 실용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중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생각을 때문에 누군가 슬픔들을 부당하게 당한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대체 어떤 이름불림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비뚤어져서 얻어 맞고는 참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좋음을 행하고도 당하면서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곁에서의 은혜입니다.
문장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볼드체를 사용했습니다. 같은 형식의 문장이 두 개 연달아 등장합니다. 하나는 "이것이 은혜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수사의문문으로 "그러한 것은 이름불림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A. 먼저 은혜인 것부터 살펴봅시다. 베드로는 1) "하나님의 생각 떄문에", 누군가 슬픈 일을 부당하게 당하는 것이 2) "은혜"가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 때문에"에서 '생각'은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로 "양심"이라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분별"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에 관한 생각 때문에, 부당하게 어려움을 겪는 것을 베드로가 은혜가 부른다는 것입니다.
B. 반대로 잘못을 저질러서 얻어맞고는 견뎌봐야, 그것은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선, "나는 하나님 때문에 참는 거야"라고 생각해봐야, 하나님은 "너 그러라고 내가 출애굽시킨거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문장은 사태를 한층 더 진전시킵니다.
C. 첫 문장(A)에서 하나님에 관한 생각 때문에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했다면, 마지막 문장에서는 좋음을 실천하고도 부당하게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겪으면, 그는 하나님 곁에 있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적인 공백을 염두하며 읽자는 얘기로 시작했습니다. 만일 이 "머슴들"의 이야기를 피고용인에 관한 이야기로 쉽게 이해하려 한다면, 부당한 처사를 당하면서도 그저 참는 것이 능사라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제와 오늘날을 등가로 놓을 수 없습니다. 당시 노예는 자신이 주장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부당함을 말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부당한 고용 조건을 힘들게 견디라는 말로 이해해선 곤란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놓인 타자와의 관계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실천이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3)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실천으로 사는 이유는, 이것이 실용적인 현실 개혁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의 정체성과 연결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원칙들을 발견하고도,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에서 실제적으로 무엇을 조정하고 결정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백과사전이 아닐뿐더러, 텍스트 해석을 통해서 모든 답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성령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체성을 발견할 뿐입니다. 아니,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포트리스에서 포탄을 쏘기 위한 각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적절히 바람을 읽고, 힘 조절을 하는 것은 2000년전 이야기를 넘어선, 오늘날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으로 기록되진 않지만, 성령 하나님과 교제하며 만들어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본인도, 베드로전서를 처세술을 위한 책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 머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메시아와 연결된 정체성입니다. 머슴들이 주어진 질서 아래 놓여있으면서도, 어떠한 주인을 만나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는 메시아 예수에 관한 시(아마도 자작시)를 읊습니다.
메시아께서도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당하셨고,
여러분에게 원본을 남기셨는데,
이는 그이의 발자국들을 따라 여러분이 걷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정체성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 걷느냐 어긋 나느냐의 문제입니다. 신자의 결과는 현세에서 드러나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체념이 필요합니다. 이 체념은 우리의 기대를 미래의 메시아께 향하게 하고, 현실의 어떤 체제도 거리를 두고 보게 만들어주는 건강한 체념입니다. 다만 현시대에는 체념하고, 오는시대를 바라며 그저 따라 걸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생각과 좋음의 실천 때문에, 부당하게 당했던 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는 원본입니다. 여기서 원본은 희랍 꼬마들이 글자를 배울 때 사용했던 밀랍 판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즉 파인 홈을 따라 그려가면서 알파벳 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 말들을 베드로가 했을 때만 생기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직접 십자가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예수를 말렸다가 사탄 소리를 들었습니다(마가복음 8:31~33). 게다가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부당한 고난이 정점에 이르셨을 때, 그는 메시아를 세 번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14:66~72). 그런 베드로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수의 공생애 내내 그 메시아의 고난을 자기 삶의 원본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베드로가, 메시아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편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하는 세인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여기 충격적으로 달라진 인격으로 메시아 예수를 증언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이는 비뚤어짐을 행하지 않으셨고
그이의 그 입에서 속임이 없었습니다.
이사야에서 인유한 것이 분명한 이 구절들은, 앞에서 머슴들에게 요구한 내용과 같습니다. "비뚤어졌기 때문에 얻어맞고 참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부르심도 아니다." 메시아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먼저 걸으셨습니다. 비뚤어짐을 행한 적 없는데, 그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십자가를 떠올리는 이 본문은 이사야 53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메시아의 고난을 읽어내는 프레임이 이사야 53장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사야 53:9a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이는 욕보이면서도 맞서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당하면서도 당하게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판단을 맡기셨습니다, 판단하시는 분께 올바르게.
그이는 직접 우리의 비뚤어짐들을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나무로 향하셨습니다.
이는 그 비뚤어짐들에는 이미 죽어버렸고 의에는 우리가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53: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신뢰가, 고난을 겪어낼 수 있는 힘입니다. 하나님께 판단을 맡긴다는 것은,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어짐을 의미합니다. 그이가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삶에 대한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삶을 삶되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삶이 삶답게 살 수 있는 세계 전체를 일으키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짊어지셨고 나무로 향하셨습니다"라 번역한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나페로(ἀναφέρω)라는 단어인데, 1) 위로 올라가다(마가복음 9:2) 2) 제물이 드려지다(베드로전서 2:5, 야고보서 2:21, 히브리서 7:27) 3) 짊어지다 4) '승천(누가복음 24:21)'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2)로 이해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죄들을 십자가로 드리는 장면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웨인 그루뎀은 이러한 해석이, 예수께서 죄를 처리하시는 게 아니라, 죄를 십자가로 옮기는 운반책의 역할을 한 것이고, 십자가 사건 자체의 효력을 말하게 되기 때문에 불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처음 희랍어 원문을 봤을 때는, "'죄를 십자가로 들어올리다'로 해야되는 것 아냐?"하고 흥분했다가,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나무"라 번역된 단어는 크시론(ξύλον)입니다. 이 단어는 살아있는 나무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지팡이로 대표되는 나무로 만든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도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2:2
강의 여기저기에는 생명 나무가 열 두 열매들을 맺으며, 달따라 각각 그 열매를 내고, 그리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 민족들의 치료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무언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바로 이 '크쉬론'이 생명나무이고, 이 크쉬론이 민족들의 치료를 위한 잎사귀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신명기 21:23의 70인역에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신명기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람을 죽여 매다는 나무는, 자연적인 나무가 아니라 가공된 나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지팡이, 예수의 십자가, 계시록의 생명나무가 같은 단어군이었습니다.
그이의 멍자국으로 여러분들은 치료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양들처럼 어그러진 길로 가고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목자 곧 우리 호흡들의 지킴이에게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저 "치료되었습니다"가 계시록의 "만국 치료의 시작(계시록 22:2)"으로 읽힙니다. 물론 "치료"라 번역된 단어는 다릅니다만. 메시아의 고난과 그 고난의 정점인 십자가 처형은, 만국 치료의 시작이었고, 자신들을 "익은 열매(로마서 16:5, 계시록 14:4 ; 출애굽기 23:19, 잠언 3:9)"로 불렸던 이들은 자신들을 십자가 나무로부터 나온 새생명의 소유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처절한 고난의 현장에서, 마침내 이새의 싹이 돋아났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이사야서의 향기가 납니다.
이사야 53:5,6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사람들의 폭력으로 멍든 예수, 그러나 그 멍자국이 사람들을 치료합니다. 그 치료란, 내 앞에 서 있는 타자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주인이든, 까탈스런 주인이든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타자가 어떤 사람이든 사랑은 그 사람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에게서 그 치료가 시작되었다면 분명합니다.
"돌이키다"로 번역한 단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아나스트레포(αναστρέφω)'라는 단어를 "생활방식"으로 번역했었지요. "몸을 돌린다"는 어근의 기본 의미는 동일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역순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머슴들의 삶을 메시아와 일치시켰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냥 머슴이 아니라 길을 찾은 머슴들입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 메시아와 달리 살아갈 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같은 생각과 실천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먼저 가신 그이를 향해 몸을 돌이켜, 그이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대봅니다. 그 발자국에 피가 묻어있다면, 그것은 나더러 따라오라는 헨델과 그레텔의 빵조각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부르심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은혜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주인을 만나도, 메시아를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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