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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12~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분 안에서 타는 불을 낯설게 맞지 마세요, 이것은 낯선 이가 여러분과 함께 걷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메시아의 고난과 연합했다는 사실로 기뻐하세요, 그러면 그이의 뚜렷 드러남 속에서도 매우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1:7에 이어서 다시금 불의 이미지를 가져왔습니다.
베드로전서 1:7
이 안에서 여러분들이 기뻐합니다, 이 순간 잠깐 지금 다양한 시험들로 비통해해야 마땅하지만, 여러분들은 여러분 신실함의 증명된 바가(그 증명은 불로 이뤄지는 증명입니다)이 멸망할 금보다 풍성하다는 사실, 곧 메시아 예수의 나타남 안에서 여러분이 찬양과 뚜렷과 영예로 발견된다는 사실로 기뻐합니다.
불은 '증명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증명의 과정은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제련되어 나오듯,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불'을 낯설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불'이라 불리는 쉽지 않은 증명의 과정은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그러니 낯설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구약성경 안에서 이 '불'의 정체를 규명할 것입니다.
현시대의 자연인(퓨쉬코스)은 이 불의 과정을 낯설어하고 기피합니다. 현시대 안에서의 행복은 '지금 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불편함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친 시절은, 페이라모스, 가능성의 시절이기 때문이며, 이 가능성의 시절에, 우리는 메시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연합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연합의 길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를 아래 구약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13:7
"칼아, 깨어 일어나서, 내 목자를 쳐라.
나와 사이가 가까운 그 사람을 쳐라.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나 또한 그 어린 것들을 칠 것이다.
'내가 온 땅을
치면, 삼분의 이가 멸망하여 죽고,
삼분의 일만이 살아 남게 될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그 삼분의 일은 내가 불 속에 집어 넣어서
은을 단련하듯이 단련하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겠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그들에게 응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나 주를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목자가 고난당합니다. 그리고 양떼는 흩어집니다. 그런데 그 흩어진 양떼는 목자와 같은 일을 겪습니다. 그 결과 1/3이 남게 됩니다. 그 1/3만이 잠언과 베드로전서와 스가랴가 말하는 '불'을 겪게 됩니다. 이 불은 1/3과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이 그 1/3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 부르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스가랴의 저 구절을 인용하는 이가 바로 목자 자신입니다.
마가복음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의 사유는 이러합니다. 메시아가 고난 당하시고 이스라엘은 패망하여 전세계로 흩어질 때, 그 중에 1/3이 남아 불의 과정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참 하나님의 씨알로 드러날 것인데, 이들이 바로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보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들의 삶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려움을 피하는 현실적인 해결책 따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성격에 집중합니다. 즉 메시아와 하나되기 위한 고난이라면 피할 수 없고, 오히려 그러한 고난은 이미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바, 낯설게 여길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맞아들여야 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1) 겪음으로 메시아와 연합하는 현재와, 2) 메시아와 함께 뚜렷이 드러나게 될 미래라는 사유는, 현실의 쉽지 않은 겪음을 비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역전시킵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러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 베드로가 다음의 잠언 구절을 어찌 읽었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잠언 27: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만일 여러분이 메시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한다면, 복된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뚜렷의 그것 즉 하나님의 숨결이 여러분 위에 멈춰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의 다양한 반영이 깔려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의 이름으로 모욕당한 사람이 복된 신학적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사야 11:2입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rest upon Him).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새번역은 "내려오신다"라고 번역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동사는 셉투아진트에서 '아나파오', 즉 '위에 멈추어 있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즉 그 숨결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한 싹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지금 난민들은 에클레시아, 즉 메시아의 몸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공동체 위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멈춰있습니다.
즉 이사야 11장의 메시아 예언은 메시아의 몸인 에클레시아에 대한 예언도 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그들 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이사야 11:2의 '즐거움'을 베드로는 분명 우리가 앞서 확인한 '고난 속에서 얻는 기쁨'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 속에 닥쳐온 어려움을,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기"때문입니다.
또한 고든 피가 고린도후서 3:8,17,18에 관해 말했던, 성령과 영광 사이의 연결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뚜렷의 그것", 여기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고린도후서 3:8
하물며 영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후서 3:17,18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즉 여러분중 누구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행하는 이나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이로서 겪지 말게 하십시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다면, 수치로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을 그 이름 안에서 뚜렷하게 한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 겪음이나 쉽지 않다고 해서 '불'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살인자로서 겪는 겪음이 어려울지라도 그것은 불이 아닙니다. 도둑질로서 겪는 겪음이 어려울지라도 그것은 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겪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의 겪음은 오직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즉 메시아의 이름을 짊어졌기 때문에 겪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수치'를 언급하면서 불의 겪음을 더욱 세밀하게 규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명예와 수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는 일은 지양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은 때로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삶의 원리와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는 명예-수치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뒤집힙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면,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인 예수가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총 세 번 등장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베드로전서에서 한 번, 나머지 두 번은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이 명예-수치의 도식을 뒤집는 예로 등장합니다. 같은 말에 대한 다음의 상반된 평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1: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사도행전 26: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지금은) 하나님의 그 집으로부터 심판이 시작될 카이로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이 하나님의 집을 출처로 갖는 심판의 때"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지금은, 우리의 지금과도 같습니다. 바로 말세입니다. 메시아 예수로부터 시작된 기이한 시간, 하나님의 불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입니다.
베드로의 이 문장은 요한계시록을 떠올립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은 늘 하나님의 집, 즉 성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상은 요한계시록이나 베드로전서나 같은 구약 본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에스겔입니다.
에스겔 9:1~11
또 그가 큰소리로 외치시는데 그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이 성읍을 벌할 사람들아, 각자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가까이 나오너라."
그러자 여섯 사람이 북쪽으로 향한 윗문 길에서 오는데, 각자가 부수는 연장을 손에 들고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모시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의 먹통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와서 놋으로 만든 제단 곁에 섰다. (A)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까지 머물러 있던 그룹에서 떠올라 (B)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다. 그는 모시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통을 찬 그 사람을 부르셨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성읍 가운데로 곧 예루살렘으로 두루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려 놓아라."
또 그는,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성읍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쳐서 죽여라.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가엾게 여기지도 말아라. 노인과 젊은이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들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라.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C)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라. 모든 뜰을 시체로 가득 채워라. 이제 나가 보아라."
그러자 그들이 성읍 가운데로 나가서, 사람들을 죽였다. (D) 살육(곧 심판)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혼자 거기에 있었다. 나는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부르짖으며 아뢰었다.
"주 하나님, 예루살렘에다가 이렇듯 주님의 진노를 쏟으시다니,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을 주님께서 친히 다 멸하실 작정입니까?"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너무나 크고, 땅은 피로 가득 차 있고, 이 성읍은 불법으로 꽉 차 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을 버렸으며,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행실을 따라서, 그들의 머리 위에 그대로 갚아 줄 뿐이다."
그런데 모시 옷을 입고 허리에 먹통을 찬 사람이 와서 보고하였다.
"주님께서 저에게 명하신 대로, 제가 다 수행하였습니다."
에스겔 9장의 내용은 오늘 베드로전서 4:12~19가 다룬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영광". 즉 성령의 머묾이 등장합니다.
(B)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고, 이제 땅으로 갈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C) 심판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첫번째 대상은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들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베드로전서 5장 첫머리에도 등장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에스겔서를 인유함으로 에클레시아의 장로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성전에서부터 성령이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때가 예고되었다면, 베드로는 '지금'이 바로 그 예언이 성취되는 때라 이해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요한계시록의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자가 심판을 수행하는 장면은 말라기 3장과도 오버랩됩니다.
말라기 3:1~5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특사를 보냅니다. 새번역은 특사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천사라고도 번역되는 '말라크'라는 단어입니다. '보냄받은 이, 파견된 이'라는 기본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천사'하면 날개달린 영적 존재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천사라는 단어만 가지고는 사람인지 영적 존재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천(天)'을 보냄받은 이의 존재적 속성이 아니라, 출처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누군가를 보내셨습니다. 그 보냄받은 이의 하는 일은 '심판'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처럼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이 등장합니다.
심판의 대상을 살펴봅시다. 먼저는 레위자손입니다. 심판을 위한 불이, 정작 레위자손에게는 정화의 불로서 기능합니다. 두번째 심판의 대상은 "점 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 일꾼의 품삯을 뗴어먹는 자,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들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베드로가 말라기 3장의 관점으로 오늘의 본문을 작성했다면, 그는 에클레시아를 말라기 3장의 레위자손으로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지금 에클레시아가 예수의 이름 때문에 겪는 곤경은, 그들을 정화하기 위함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더불어 이 심판의 불은 에클레시아에겐 정화의 불이지만, 에클레시아 바깥 그들을 힘들게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심판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현재 고난의 삶으로 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은 미래에 심판을 받지 않지만, 현재 그 심판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미래에 심판받게 되는 비참한 역전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로부터
먼저라면, 하나님의 복음에 신실하지 않은 이들의 텔로스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의로운 이가 가까스로 구원받는다면, 경건하지
않고 죄인인 사람은 어찌 드러나겠습니까?
"만일 우리로부터 먼저라면"은 지금 에클레시아가 먼저 심판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현재 복음에 신실하지 않은 이들의 결말(텔로스)입니다. 신실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비교는, 말라기 3장의 후반부와도 그 맥락이 유사합니다.
말라기 3:14~18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지정한 날에, 그들은 나의 특별한 소유가 되며, 사람이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내가 그들을 아끼겠다. 그 때에야 너희가 다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비로소 분별할 것이다."
베드로는 말라기 3:14처럼 말하는 이들에게 반문합니다. '의인 마저도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가며 구원에 이르는데, 하물며 현실 속에서 어려움 모르고 살아가는 악인들의 결말은 어떠하겠는냐?'. 베드로가 "의인마저도 가까스로(with difficulty)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에 익숙하지만, 저 "믿기만 하면"이라는 말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삶 전체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1) 어떠한 어려움인지 분별하는게 중요하고(괜한 어려움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인지) 2) 그 어려움을 기쁨으로 맞으며 메시아와 연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오늘 베드로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거저 주어지지만, 그 믿음은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삶의 방책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베드로의 말은 잠언의 인용이기도 합니다.
잠언 11: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겪는 이들도 신실하신 창조주께 좋은행실로 자신들의 프쉬케들을 맡겨야 합니다.
베드로의 결론은 "겪음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로 시작합니다. 번역상 난점은 저 "도"에 있었습니다. 개역성경은 접속사 카이를 "또한"으로 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겪는 이들이 행해야할 추가적인 실천사항으로 이 구절을 이해했습니다. 새번역이나 영어역본들은 아예 카이를 번역하지 않았고요.
저는 "도"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겪는 이들은 에클레시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베드로전서 서두에서, 이들이 난민 상황에 처한 것을 하나님 뜻이라고 밝혔던 것이 여기서도 반복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사람들도"라 읽은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앞에서 언급했던 "경건하지 않고 죄인인 사람"을 상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도 "신실하신 하나님께 좋은행실로 자신들의 프쉬케를 맡겨야 한다"는 당위에 포함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자초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든지, 아니면 현재 메시아 예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나몰라라 하는 이들이든지, 고난의 성격과 유형을 떠나서 단 하나의 당위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은 자신의 프쉬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프쉬케는 영혼으로 번역되지만, "삶"이라 읽는 것이 낫습니다. 그간 성경을 통해서 육체와 분리된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영혼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이 줄곧 있었지만, 그것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푸쉬케는 기본적인 의미로는 '호흡'입니다.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됩니다.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삶(프쉬케)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메시가께서 십자가에서 바치신 삶은, 그 자체로 좋은행실이었습니다. 그이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고, 원수들을 위해 자신의 몸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셨으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새시대를 열어재끼는 희생양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이는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믿음으로 처음과 나중을 이으셨습니다.
이 장렬한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행실로"라는 전치사구가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창조의 좋음을 창조하는 날마다. 그 날마다를 줄곧 신실함으로 이어가는 것. 그 삶을 마무리하는 죽음. 맡기면 그만인게 아니라, 진정 맡기기 위해 정성들여 자신의 삶을 좋음으로 채워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행실은 하나님께 맡기는 과정입니다. 맡김은 그가 우리를 통해 창조하신 좋음들을 종국에는 하나님 것으로 돌려드림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베드로가 왜 하나님을 가리켜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불렀는지 고민해봅니다. 먼저 신실하셨던 하나님께, 나중 신실함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과 에클레시아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리고 신실함은 좋음을 창조하기 위한 대전제입니다. 좋음의 근원이신 그분께 신실하지 않고는 우리는 좋음을 낳기는 커녕, 선악과만을 따먹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 신실한 에클레시아는 좋은행실의 본보기가 됩니다. 좋음을 창조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이들도 바라는 것입니다!(그래서 황제와 총독은 하나님의 좋음을 섬기는 자들이라 베드로는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완의 좋음, 제한된 좋음, 좋음의 그림자들만 만들 뿐, 참 좋음은 거절하는 중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이 어려움을 낯선 게 아니라 기쁨으로 이해하라 했는지 생각해봅시다. 베드로 뿐만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합니다.
갖가지 시련을 만나게 되거든, 전적인 기쁨으로 해석하세요.
어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곧 좋은행실로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립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에클레시아 내부 진술이고, 후자는 에클레시아를 포함한 사회 전체를 놓고 한 말 같습니다. 베드로가 앞에서 말한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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