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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11~17

사랑받는 여러분, 나는 곁에서 속삭입니다, 방문자들과 임시 거주자들에게 말입니다, 살몸의 욕망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라고, 그 프쉬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들이), 민족들 안에서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목적은, 여러분에 대하여 악을 행한다고 말하는 이들 안에서, 그 온전한 일로부터 관찰한 이들이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여다보시는 날에.



  이렇게가 한 문장입니다. 베드로의 문장은 정말 길고, 그 긴 문장 속에 자신의 생각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할 줄 압니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봅시다.

-집 짓는 성령 : 곁에서 속삭입니다
  "파라클레시스(παρακλησις)"는 요한복음 개역한글판에서 "보혜사"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이 동사로 쓰이면, "곁에서 속삭입니다"가 되는데, 여기서 '권면', '충고', '호소'등의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즉 친밀한 관계 속에서 무언가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에 대한 반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보혜사가 성령의 별칭이기도 하거나와(이만희씨가 아니라),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이 표현을 즐겨쓰는데, 그때마다 에클레시아를 든든히 세우기 위한 권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4:6의 예언에 따르면,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는, 숨님으로만 되는 집"이 바로 에클레시아입니다. 그 집을 짓는 과정으로서의 말과 실천은 성령과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산돌에 함께 연결되어 지어가는 집"의 심상이 "곁에서 속삭입니다"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문자들과 임시 거주자들
  베드로는 이 "방문자들과 임시 거주자들"이란 말에 관해서 앞에서 깊이 숙고했습니다. 이 말은 현재 난민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이들을 에클레시아로 삼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신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로마의 통치 영역으로 들어왔지만, 로마의 제도 아래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이들은 어쩌면 아무런 제도적 구속도 없는 것을 '자유롭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국가 제도 안에서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말입니다.

-精氣神
  성령을 따라 제시된 첫번째 실천사항은, 살몸의 욕망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프쉬케와 맞서 싸우'는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프쉬케는 인간의 생득적 차원, 본성으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즉 살몸은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려는 것은, 우리가 날 때부터 가진 지향성과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아직도 날마다 느끼고 있습니다. 정말 심각하게 충돌합니다. 이것에 대한 고민과 투쟁으로 날마다 지칠정도입니다. 베드로는 이 본문에서 "온전한 생활방식"을 말할 것인데, 이것에 관한 논의가 살몸의 욕망이라는 내재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합니다. 온전한 생활방식의 시작은 성(性)적 지향을 거스르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은 신약성경이 독신을 옹호한다는 사실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다른 민족(이방)들은 성을 어찌 다룰지 생각해봅시다. 많은 부인을 갖고,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가서는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해오는 역사는 어느 민족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성격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슬러, 성을 제어하려는 방향에서부터 '온전(καλος)'이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 여성을 여성답게 볼 수 있고, 지배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 있으며, 내 편이 많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욕의 분출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그것을 잠재우려는 사람들은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룩한 생활방식의 목적
  이 이전본문을 살펴보신 분이라면, 베드로의 호세아 인용을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두 집단의 차이만을 짚어갔던 본문 속에서, 갑자기 두 집단의 연결점이 생겼습니다. 그 연결점 위헤서 숙고해야 하는 '말씀', '거룩', '제사장',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욱 직접적으로 이 생각을 밝힙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 속에서 온전한 생활방식을 살아가는 공동체는 다음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여러분에 대하여 악을 행한다고 말하는 이들 안에서, 2) 그 온전한 일로부터 관찰한 이들이 3)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클레시아가 악을 행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아마도 주변 난민들, 더 넓게는 로마인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에클레시아를 '악'이라 규정했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악'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낯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낯선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합니다. 동류를 모아서 세력을 형성하는 편이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나와 다른 사람은 밀어내고 선을 긋는 것이 '배타적인 우리'를 형성합니다. 에클레시아가 이러한 배타성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13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런데 베드로는 에클레시아를 낯설게 보는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의 온전한 삶을 관찰할 것이고, 그 관찰로부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민족들 안에서 온전한 생활방식을 영위하는 이유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말하듯,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통약성(commonsureability)가 있습니다. 즉 함께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에클레시아의 온전한 생활방식은 그들만의 리그가 될 것입니다. 에클레시아가 온전한 생활방식을 추구할 때, 성경은 바로 이것이 믿지 않는 이들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공식화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에클레시아의 온전한 생활방식이, 믿지 않는 이들이 믿게 되는 판단 근거라는 사실은 꼭 붙들고 가야겠습니다. 온전한 생활방식을 보일 수 없는 에클레시아는, 주변의 믿지 않는 이들에게(오히려 자신들에게 낯선 기독교를 '악'이라 규정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판단 근거를 제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생활방식을 대체해서 제시할 수 있는 판단근거는 없습니다. 가끔 방언 집회라든지, 치유집회라든지 하는 것들은 베드로가 제시한 에클레시아의 근본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생활방식 뿐입니다.

-들여다보시는 날에
  그렇다고 '에클레시아의 온전한 생활방식 = 믿지 않는 이들의 인식전환' 이라고 공식화 할 수는 없습니다. 인식전환은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이 개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붙이는 단서조항이 있습니다. "들여다보시는 날에"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이사야 10:3에서 가져온 것이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만,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이 표현은 베드로전서에만 출현하는데, 최종적인 재림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의 인식 전환을 가져오는 날을 가리킨다는 사실만 분명합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온전한 생활방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타인을 통해 우리의 온전한 생활방식을 들여다 보시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만 하다면, 믿지 않던 이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의 창조물 아래 주를 통해 놓이십시오, 주권을 가진 것같은 왕에게나, 왕을 통해 악을 행하는 이들의는 판결을 위해, 좋음을 행하는 이들의 칭찬을 위해 보냄받은 것 같은 총독에게나.


  논란의 문장이 등장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민감한 문장입니다. "아래 놓이십시오"라고 풀어놓은 것은 개역성경이 "복종하라"라 번역한 단어를 파자해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창조물"이 "모든 인간의 제도"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민 불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오늘날의 인식과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창조물"이란 말은 인간 제도를 넘어서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 '사이'에 놓이는 하나님의 질서"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국가 제도만이 아닌, 주인과 노예,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만든 것은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담겨있지만, 관계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당시 신으로 추앙받던 로마 황제를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함의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본문이 정권을 바꿔내는 혁명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1) "통해"라는 말은 일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하는 전치사입니다.  에클레시아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은 "주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에게 질서 없는 관계는 없고, 그 질서는 메시아 예수를 통해 진입하게 된 질서입니다.


  "주를 통해"라는 말이 가진 함의를 베드로전서를 함께 연구하는 형제와의 대화 속에서 더욱 풍성히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 제도는,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이들에게 고안된 사형 제도입니다. 즉 본문의 사람의 창조물의 일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는 그 사람의 창조물 아래 놓이십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의 신적권위를 인정해서도 아니고, 유대인들에게 익숙했을 혁명 운동에 동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은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인간은 역사 위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목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신성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을 베드로가 "모든 사람의 창조물 아래 주를 통해 놓이십시오"라고 에클레시아에게 권면했을 때, 여기서 주를 통해는, 메시아의 방식을 가리키는 전치사구일 것입니다. 따라서 친정권적으로도, 혁명적으로도 읽힐 수 없는 문장인 것입니다.


2) 그리고 중간에 주권을 "가진 것 같은"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가진 것 같은"은 임시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왕은 주권을 가졌지만, 그것은 영원한 권세가 아닙니다.(로마 황제는 다니엘 7장의 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판결을,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칭찬을 주는 것인데, 이것을 담당하는 사람이 총독입니다. 그런데 이 총독직 역시 "보냄받은 것 같은" 임시적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4) 가장 충격적인 단어는 "좋음"입니다. 이 "좋음"이란 말은, 왜 베드로가 "모든 사람의 창조물"이라는 어색한 말을 넣었는지를 규명해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즉 베드로는 창조 이야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 세계는 하나님 보시게에 '좋음'이라는 평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음'을 위해서 섬기고 있는 임시직이 있습니다. 바로 황제와 총독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같지만, 당대 베드로전서 독자들이 읽었을 때 분명한 늬앙스를 확인할 수 있을 표현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 친정권적인 태도만 취하면 하나님 뜻이라는 단편적인 생각은 설 자리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세계- 좋음'의 관계 사이에 통치자들이 놓입니다. 만일 창조세계의 좋음을 추구하지 않는 통치자가 있다면, 그 통치자는 그 통치가 가진 임시적인 성격에 따라 그 권한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다음과 같기 때문인데, (그것은) 좋음을 행하는 이들이 생각없는 이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밝힙니다. 그 뜻은, "좋음"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해하고 있는 "좋음"은 따뜻한 느낌이나 온화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생각없는 이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 역시 좋음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이 좋음은 창조세계의 좋음이기 때문에, 창조세계를 맡은 제사장 나라인 에클레시아가 추구해야할 바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을 복종과 불복종의 양자택일로 읽을 수 없는 이유는, 복종만이 옳지도 않고, 불복종만이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좋음'의 추구입니다. 그리고 이 좋음의 추구는 하나님과의 진실하고도 끊임없는 교제를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 평가한 좋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 그 좋음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인들로서, 또한 가리개처럼 악의 자유를 갖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노예들처럼(하세요).


  이 '자유인'이라는 자격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1장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메시아에 의해 악으로부터 출애굽한 자유입니다. 더불어 오늘 해설의 서두에서 밝혔듯, 로마 제도 바깥에 사는 난민으로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짊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유인이라면, 그 자유를 다시금 하나님께 내놓으라 명령합니다. 이상한 표현입니다. 이들이 자유를 얻은 것은 하나님 덕분인데, 그 하나님 덕분에 얻은 자유를, 다시금 하나님의 노예가 되기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발적 노예입니다. 이것은 굴종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만일 이 노예가 어떤 '사람'의 노예라면, 굴종적으로 부를만하겠지만, 이 노예됨은 만유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노예입니다. 굴종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입니다. 사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악으로부터 얻은 자유인데, 그 자유를 다시금 하나님의 질서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는 아담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아담에게 자유가 주어졌으나, 아담은 악을 저질렀고, 자기 자신을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가렸습니다. 에클레시아에게는 이와 정 반대의 일이 요구됩니다. 가릴 것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얻은 자유로, 더욱 하나님의 창조질서 "아래서" "좋음"을 추구하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의 반대 개념은 "가리개"입니다. 가리개는 덮어 놓는 것인데, 베드로는 이 덮어 놓음이 악이 자유를 갖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로 가릴만한 일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보여주고, 유대 율법과 성전의 화려함으로 자신들의 썩음을 감추려 했었던 유대 지도자들이 보여줍니다.

  또한 베드로는 앞에서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구약성경이 자신들에게 새로이 열렸다는('계시'되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리개"라는 표현은, 그 드러난 계시에 걸맞지 않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가치있게 여기세요, 가족들을 인으로 대하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그 왕을 가치있게 대하고 있으세요.


  네 개의 명령문이 이어집니다. 모든 것들을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인으로 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붙어있을만한 표현들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에클레시아 식구를 대할 때 조심조심하는 것입니다. 이 조심조심은 전전긍긍과 다릅니다. 타인의 입장을 세심하게 헤아려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형제 사랑'은 복음서와 요한일서를 생각나게 합니다.


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요한일서 3:14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은, 형제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이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이 없어서 모든 문제가 생겼는데, 우리는 문제의 공범이면서도 이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움에 떨며 억지로 하는 사랑이라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그런 상상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즉 본문에서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사랑을 모르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도 황제의 뒤통수를 칩니다. 여기서 "그 왕"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고, 베드로 당시의 로마 황제는 그 이름도 유명한 네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의적으로 같은 동사를 반복해서 배치합니다.


모든 것들을 가치있게 여기세요,

가족들을 인으로 대하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그 왕을 가치있게 대하고 있으세요.


  에클레시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좋음을 추구하면서도, 모든 것을 가치있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가치있게 여겨야 할 모든 것에는 로마 황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가치를 결정하는 높은 존재가 아니라, 에클레시아가 가치있게 여겨야할 모든 것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시제를 고쳐씁니다. "가치있게 여기세요"는 아오리스트, 즉 시간에 상관없는 시제입니다. 스냅사진 같은 것이지요. 가치있게 여기라는 내용만 초점을 맞춘 시제입니다. 그러나 "그 왕"에게 적용할 때, 같은 동사도 시제가 달라집니다. 베드로는 현제시제를 쓰는데, '지금', '현재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면, 사도 요한에게 짐승의 숫자로 표현된 "그 왕"은 오래 가지 않아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입막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 베드로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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