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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4~10
그이를 향해 우리는 나아갑니다, 그이는 산 돌,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은 한편, 하나님 곁에서 영예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산 돌들로서 숨님으로 이뤄진 집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직을 위해, (그 제사장직은) 하나님께 잘 받아들여지는 숨적 제사들을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올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기록에 이렇게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그이를 향해 우리는 나아갑니다"는 앞에서 '레마'에 관해 언급했던 내용들과 다시 연결됩니다. 저는 베드로가 난민들에게 전했던 '레마'를, 기존에 있던 구약 성경을 메시아 예수의 사건들을 절정으로 새로이 읽어낸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구약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살아가는 삶이 곧 에클레시아에게 요구된 생활방식이고, 이 생활방식이 "거룩"이란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즉 이들의 앎은 메시아를 정점으로 하는 구약 읽기이고, 이들의 삶은 그 구약 읽기의 연장선에서 구현하는 거룩입니다. 글자가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길을, 이들은 메시아와 함께 걷습니다. 앎과 삶이 메시아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아갑니다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문장은 "나아갑니다"라는 동사로 시작됩니다. 히브리서에서 이 동사를 어찌 쓰는지를 확인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이 '프로스에르코마이(προσερΧομαι)'는 하나님의 거룩한 씨알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구약 장면을, 희랍어로 번역했을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출애굽기 16: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일러주십시오."
베드로의 사고를 따라가봅시다. 베드로는 자신이 '레마'라 칭한 거대 서사를 염두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새로이 이해된 출애굽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에클레시아는 출애굽했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맡습니다.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거룩'이라 불리는 구별된 생활방식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제사장 나라의 거룩한 생활방식은 곧 예배이자, 하나님께 나아감이 됩니다. 난민으로 구성된 에클레시아의 현재 모습이 그러하다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산 돌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들이 예배하는 대상을, 베드로는 이렇게 부릅니다. "산 돌".
돌을 예배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돌'을 예배의 대상으로 놓고, 이 심상을 더욱 심화하려고 합니다. 그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돌"입니다. '돌'과 '살아있다'는 서로 충돌합니다. 돌이 살아있을 수 없고, 살아있다면 돌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베드로가 이 표현을 고집하는 것은, '돌'이라는 심상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은 주요한 주제입니다. 야곱이 집 떠나와서 벧엘에서 꿨던 꿈도 돌에 관한 것이었고, 다니엘이 해석한 느부갓네살의 꿈에도 돌이 등장했습니다. 야곱의 꿈에서 돌은 하나님의 사다리가 놓이고 기름이 부어지는 대지의 중심이었고,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온 돌은 이방 제국을 박살내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돌"이자, 태산이 되어 전세계를 가득 덮는 돌이었습니다. 야곱의 꿈과 느부갓네살 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중심이며, 이방제국을 대체하고, 세상을 점령하는 돌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와 유대 성전에 이야기로 이해되었습니다(게다가 히브리어로 '돌'은 '아들'과 발음이 유사합니다). 즉 유대인을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돌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막는 로마를 악으로 규정하고 무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세계재편을 예수는 반대하신 적이 없습니다.(물론 '유대인'이라는 말을 어찌 규정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은 돌로 지은 건물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씀이 건물 성전 중심으로 힘을 모으려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어찌 들렸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듯 성전 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에는 '돌'과 관련해서 첨예한 입장대립이 있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그 돌이 문자 그대로 돌로 지어진 건물 성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반면, 예수는 그 성전은 곧 자기 자신이라 주장했습니다.
요한복음 2:19,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은 한편, 하나님 곁에서 영예로 선택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산 돌"에 관해 부연설명하는 이 구절은 시편 118:22의 인용입니다.
시편 118:22,23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즉 베드로가 말하는 "산 돌"은 "사신 아들"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았는데, 바로 그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영예로 선택하셨습니다.
-영예
'영예(τιμη)'는 그간 '가치있는'이란 말로 번역했던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와 성전이 "가치있는 돌들(보석들)"로 장식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예'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얻는 명예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로이 지으시는 집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영예일 것입니다.
-선택되었다
또한 "(그이는) 선택되었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이사야 42장을 떠올리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42:1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숨결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유대인들이 닳도록 읽었을 이사야 42:1을 통해서, 우리는 "선택된 자"라는 말이 가진 다채로운 그림들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1)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또한 2) 복음서의 목격자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도 이사야 42:1의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세례 장면과 함께 3)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장면도 이사야 42:1과 공명합니다. 4) 그가 이 땅에 공의를 베푼다는 표현은 세례 이후 메시아께서 하신 일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선택된 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은 여러 그림들을 떠올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34에서도 "선택된 자"가 언급되고, 자연스럽게 1)~2)의 주제들이 따라 나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셨다"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이루신 사건들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구체적인 사건들은 신약저자들에게도 과거 기록인 이사야 42장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예수께서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말은 몇 개의 구절이 들어맞았다는 의미가 아닌, 그이의 삶 전체가 에언서를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얻은 영예
하나님의 첫번째 영예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에게 버림받은 사건이, 하나님께서 집 짓기를 시작하셨음을 뜻한다고 베드로는 밝힙니다. 머릿돌을 놓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이가 영예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십자가라는 과정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영예로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비참한 과정을 사용하셨고 예수는 꼭 그 과정을 통해서만이 영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겟세마네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피할 수 없는 잔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모든 일을 해피 엔딩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고, '건축'이라는 더 큰 그림의 시작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음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께서 새로이 지으실 집'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되었고, 이후 그 기초 위에 집을 마저 짓는 일이 남게 됩니다.
-메시아의 선택은 집 짓기를 위하여
그래서 이어지는 주동사(main verb)가 "집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입니다. 주어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느부갓네살의 꿈에 등장하는 모든 제국들을 무력화시키는 태산같은 돌들을 이 난민들로 구성된 에클레시아라 읽습니다. 즉 이들은 다니엘 예언의 성취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산 돌들"이라 부르는 것은, 이들이 '메시아'와 같은 성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산돌들이 짓는 집의 재료도 언급합니다. 바로 "숨님"입니다.
또한 "나아갑니다"와 "집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가 등위로 연결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곧 '그분의 성령으로 집 지어지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동사가 현재형동사로 쓰였다는 것은,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공동체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십자가의 예수를 기초로한 집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잠시 고린도전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집 짓기에 관한 베드로의 이해가 바울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
그럼 어찌 해야겠습니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각각 찬송, 가르침, 계시, 방언, 해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집짓기가 되게 하십시오.
바울은 '성령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고린도전서 12~14장을 구성했습니다. 즉 다양한 은사들이, 사랑을 통해서 발현될 때, 평화의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걸맞는 집이 지어집니다. 즉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을 다양하게 섬기게 하십니다.
이 '숨님으로 구성된 집 짓기'라는 개념을 염두한다면, 고린도전서 3:12,13도 새로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2,13
만일 누가 이 토대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물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들의 업적을 밝히되, 불
가운데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은 모든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검증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의 "집 짓기"도 개인적인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 함께 짓어가는 에클레시아를 염두한 집 짓기일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업적'은 '공동체 식구들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여는 베드로의 문장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직을 위해, (그 제사장직은) 하나님께 잘 받아들여지는 숨적 제사들을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올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직"은 출애굽기 19:6의 핵심 단어 두 개를 연결한 말입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베드로가 앞에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하며 "거룩"에 관해서 말했다면, 이제 "제사장"에 관해 말하고자 합니다. 에클레시아의 직임을 설명하겠다는 것이지요.
그 제사장직은 "하나님께 잘 받아들여지는 숨적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하나님께 잘 받아들여지는"이라는 표현을 보고 아벨을 떠올렸습니다.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 제사에 관해 제시하는 힌트는,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은 한 바 있으므로 서로 연결지어 생각해보겠습니다.
로마서 12:1,2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여러분을 가까이서 부르고 있어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세요. 이러한 제사가 이치(말씀)에 맞는 여러분의 예배입니다. 이 '현시대'의 틀에 자신을 맞추지 마세요. 오직 생각을 위로부터 새롭게 함으로 변신 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보고 인정하는데 이르세요. 그 뜻은 하나님을 닮아 좋고, 받아들일만 하며, 온전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거룩한 산 제사"를 구성하고 있는 각 단어들은 오늘 베드로전서의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베드로의 단어들과 같습니다. 바울은 거룩한 제사의 제물이 곧 "여러분의 몸"이라 말합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바울이 명령법으로 쓴 두 개의 문장 중 나중에 나온 것을 가리키는 데, 즉 1) 생각의 변신과 2)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보고 인정함 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에 베드로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라는 단서조항을 붙인 것은, 생각을 달리 하고, 몸을 올바로 쓰는 것이 예수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에클레시아로서의 '자격얻음(그이의 죽음)'과 '그 자라는 과정(그이의 숨결)'과 '끝(부활)'이 예수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즉 "산 돌로서 그이와 함께 지어져감"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새롭게 되는 모든 시간 속에, 그이가 살아계시기 때문이고, 사신 그이와 함께 해야만,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영예로이 선택된 모퉁이 (역할)로,
그리고 그이에게 신실한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베드로는 "거룩"에 관해 이사야 40장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던 것처럼, "산돌을 따라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산돌들"의 정당성을 이사야 28:16이라 밝힙니다.
이사야 28:16(새번역+개역한글)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시온'은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왕이 귀환할 것이라 선언된 장소입니다.
시편 2:6~9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산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나 이제 주님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네가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며,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그런데 그 시온에 임하는 왕이 버림받는 모퉁이 돌이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이를 버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예언이 되어버린 대제사장의 말을 들어봅시다.
요한복음 11:49~52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즉 예수가 제시한 원수사랑의 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 보였고,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의 현체제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온에 임한 왕은 그렇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왕 위에 선 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실함'이라는 매개로, 그들은 버림받은 돌과 연결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에클레시아라 불렀고, 베드로는 "숨님으로 지어져가는 산돌들"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이 땅에 새로이 나게 한 사람들입니다. 즉 베드로 편지의 수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최후의 심판을 염두한 말입니다. 사람들의 수치는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마치 버림받은 모퉁이 돌이 하나님의 영예였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여러분에게는 영예 (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집짓는 이들에게 거절당했던 그 돌이 다음과 같은 것이 됩니다, 구석 머리(돌)와 그루터기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그들이 말씀에 부딪치는데 (그것은) 그들이 설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위해서, 그들 역시 놓아졌습니다.
이 본문의 첫 문장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희랍어 문장이 으레 그렇듯, 에스틴(εστιν)이 생략되어 있다고 보면, 위와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 본문 전체를 관통하고 내려온 주제는 '영예'였습니다. 메시아도 '영예로' 선택되었고, '선택된 자'를 말하는 이사야 42:1도 영예가 언급되었고, 베드로가 직접 인용한 이사야 28:16에도 영예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영예가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영예'를 요한이 계시록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시를 장식하는 보석들로 이해한다면, 참 영예는 (설령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원으로 남아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어쩌면 이점이 베드로가 지중해 난민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베드로는 성경에 나오는 "영예"라는 단어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신실하지 않은 이들에 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신실함'과 '신실하지 않음'을 가르는 기준이 분명하게 제시되는데, 그것은 영예의 유무입니다. 그 영예는 모퉁이돌인 그이가 얻었던 영예요,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 영예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그이에게 신실한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치 이상의 가치, 혹은 그와 대립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τιμη는 '가치있는'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금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좀 더 긴 문맥을 가져와보겠습니다.
이사야 8:13~18
너희는 만군의 주 그분만을 거룩하다고 하여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할 분이시다.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다치며,
덫에 걸리듯이 걸리고 사로잡힐 것이다."
나는 이 증언 문서를 밀봉하고, 이 가르침을 봉인해서, 나의 제자들이 읽지 못하게 하겠다.주님께서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다. 내가 여기에 있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 나와 아이들은, 시온 산에 계시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는, 살아 있는 징조와 예표다.
베드로는 분명 이 이사야 8장 본문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편지에는 달랑 한 문장만 인용했을지라도 그 문맥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8장의 문맥을 보면, 베드로가 "산 돌"이라 말한 그이를 어찌 이해했을지가 분명해집니다. 그이는 "만군의 주 그분"입니다.
"거룩하신 만군의 주 그분"은 성소가 되십니다. 여기서 '성소'를 개역성경에서는 "거룩한 피할 곳"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은 성전, 특히 하나님 거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대제사장에게 1년에 한 번만 허용되는 그 지극히 거룩한 장소가, 에클레시아에게는 열린 장소,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이 만군의 주 그분을 "거치는 돌, 걸리는 바위, 함정, 올가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두 집단으로 나눠질 것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밀봉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실 수 있다는 가정이 너무 충격적이어서일까요? 하여간 이사야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주님을 기다리며 의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사야와 그 함께하는 아이들은,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는 "살아있는" 징조와 예표가 된다고 말합니다.(마치 "살아있는" 돌 같이)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사야 8장에는 우리가 베드로전서에서 보고 있는 개념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시온', '돌', '살아있는'.
즉 베드로가 인용하는 구절들은 특정 단어들을 중심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서로의 의미를 풍성하게 해줍니다. 이를 "게제라 샤바"라 부르는데, 신약저자들이 사용했을 개연성이 높은, 유대경전의 전통적인 해석방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이사야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감춘 내용을, 베드로는 공개합니다. 이사야가 쉬쉬한 내용을 베드로가 뚜렷하게 밝힙니다. 즉 '말씀'이 부딪치기 때문에, 설득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메시아와 신실함으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습니다.(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집짓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그 집의 일부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될 수도 없고, 그분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얻는 '티메'와도 무관합니다.
"이 사실을 위해 그들이 놓아졌습니다"라는 말을 어느 번역에서는 "그들은 그렇게 운명지어졌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놓아졌기 때문이고, 이것이 에클레시아를 위로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놓다"라는 동사에 주목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놓다"라는 동사가 쓰인 문장은 아래 두 문장입니다.
1) 시온에 돌을 놓는다.
2) 이 사실을 위해 그들이 놓아졌습니다.
"놓아졌습니다"의 주어는 누가봐도 하나님인데, 주어를 감추어 써놨습니다. 이를 '신적수동태'라 부릅니다. 즉 하나님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그 상황을 알고 계시다는 늬앙스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즉 하나님은 두 가지가 놓이는 상황을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는 시온에 돌이 놓이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통해서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에클레시아의 모퉁이돌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놓임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선택된 족속,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될 씨알 (입니다), 이는 어둠으로부터 여러분을 그이의 그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이의 탁월함들을 여러분이 밖으로 선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요한처럼 4중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선택된"이란 말은, 앞에서 우리가 확인했던 바, 하나님께 영예로 선택되었던 버림받은 모퉁이돌을 연상시키고, "제사장"은 출애굽 19:6의 인유이며, "거룩"은 이사야 40장의 썩지 않을 씨로 비롯된 생활방식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유가 될"이라는 말은, 지금은 아직 하나님의 소유가 덜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건축가가 집을 짓는 과정을 거쳐 결국 그 집을 차지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 집은 건축가가 들어가 살게 될, 건축가의 집이 분명합니다. 다만 건축이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유가 될"인 것입니다.
"산돌들"에 대한 4중 표현은 앞에서 말했던 것을 효과적으로 요약하면서도, 마치 다양한 수원의 물들이 하나의 저수지에 모이는 것처럼, 이 한 구절에 모입니다. "이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이는 어둠으로부터 여러분을 그이의 그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이의 탁월함들을 여러분이 밖으로 선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4중 표현으로 불리우는 공동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출애굽 서사 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끝에서부터 생각해봅시다. 이들이 제사장나라로서 출애굽된 목적은 하나님의 탁월함들을 '밖으로'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밖"은 대체 어디입니까?
이들이 "밖으로 선언"하기 위해 놀라운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각은 빛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에, 빛은 앎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놀라운"이라는 말은 그 '앎'에 대한 가치 판단을 말합니다. 즉 에클레시아가 놀라운(기이한) 앎(세계관)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앎 역시 밖으로 선언하기 위해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밖"은 대체 어디입니까?
그림으로 표현해봤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놓였습니다. 이 두 놓여짐은 베드로의 진술속에서 줄곧 대조되었고, 연결점이 없어보였습니다. 에클레시아가 출애굽한 목적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고, 이것은 거룩한 셍활방식으로 사는 것임을 밝혔을 때도, 이 두 놓임의 관계에 대해선 베드로는 침묵했습니다. 그러다 단어들이 그려내는 그림이 더욱 확장되는데, 그들이 거룩한 생활방식을 영위해야 하는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것은 "그들을 기이한 빛으로 부르신 이의 탁월함을 밖으로 선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놓여진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합니다. 즉 설득되지 않은, "밖"에 있는 이들이 신실함을 통해 산 돌과 연결되어 산돌들이 될 가능성 말입니다. 즉 지금까지 밝힌, "선택", "제사장", "거룩", "집 지어감"들이 모두 하위 목적들이었고, 이 하위목적들이 가리키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에클레시아 밖에 있는 타자를 항해 있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당황스러웠던 두 놓임이, 베드로에게는 이 새로운 가능성 때문에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근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이 새로운 가능성이 최대치로 폭발합니다.
전에 씨알이 아니었던 이들이 이제는 씨알이요, 전에 자비를 입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자비를 입습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 에클레시아 자신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호세아의 세 딸 이름으로부터 나온 문장입니다.
호세아 1:6
고멜이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았다. 이 때에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1라고 하여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겠다.
호세아 1: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로암미 2라고 하여라. 너희가 나의 백성이 아니며,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세아 2:1
창녀 고멜을 통해 얻은 자식들의 이름은, 모두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상황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남편을 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찾는 간음한 여인과 같습니다. 그 간음한 여인 사이에서 호세아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참으로 절망적입니다. "불쌍히 여김받지 못하는 딺",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런데 2장에 들어와 그 이름은 반전됩니다. "내 백성이다!", "자비를 입는 딸!"
베드로가 이 호세아 구절을 인유하는 것은, 난민들이 바로 이 과정을 거쳐 에클레시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에클레시아 밖에 "놓인" 이들에게도 열려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처참한 인간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앞에서 저는 메시아께서는 반드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선택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직을 수행하는 내내 버림받은 모든 이들에 대한 공감과 가능성을 가지고 행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당대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여겨졌던 장애인, 창녀, 어린아이, 세리들은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 메시아의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물론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메시아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이가 버림받은 모퉁이 돌이 되신 것은, 버림받은 이들의 '승귀'를 위함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바로 이 방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즉 새 이스라엘은 정말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불쌍히 여김받을 자와 같은 처지로 오신 하나님을 통해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 또한 제시합니다. 자비를 입지 못했던 자가 자비를 입어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이들은 자비를 입지 못했던 자에게 자비를 주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시온의 돌이 놓였고, 설득되지 않는 이들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는, 이 두 놓임 사이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정체성을 얻었습니다. 이 연결을 먼저 겪은 이들이 '아직' 설득되지 않은 이들에게 등돌리고 살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이제 이어지는 베드로전서의 내용은, 더 두 놓임 사이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가능성 속에서 산다는 점을 직시한다면, 당대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갔던 A.D.1세기 에클레시아로부터 오늘날의 에클레시아가 분명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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