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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7:9~18
...여기, 지혜를 가진 생각(누스)이 (있습니다). 그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고, 거기 여자가 그것들 위에 앉았습니다.
유대교에서의 '지혜'는 하나님의 딸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매개이자, 곧 인격화된 하나님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지혜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을 괴롭혀온 어떤 세력에 관하여 말해줍니다. 이 세력은 한 사람을 유혹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을 집어삼키기까지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력에 관해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건, 그 세력보다 더 오래된, 그리고 그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다른 '세력'뿐입니다. 지혜는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그 지혜가 말해주는 첫번째 진실은, '그 일곱 머리가 일곱 산이고, 거기 여자가 그것들 위에 앉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첫 문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짐승이 가진 일곱 개의 머리의 정체는 '산'이었습니다. '산'은 성경에서 국가, 왕권을 나타낼 때 씁니다. 시편 기자가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상의 기쁨"이라 말하는 하나님의 처소를 시온 '산'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지금까지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이라 표현해왔던 것의 실체가 일곱 왕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여자(음녀)가 앉은 위치입니다. 분명 앞에서는 여자가 짐승 위에 앉았다고 말했으나, 지금 보고 있는 17장에서 여자는 그것들, 즉 '머리들' 위에 앉습니다. 즉 음녀가 그 왕권들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허나 17:3에서 음녀는 머리들이 아니라 짐승을 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일곱의 왕권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연합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머리'가 상징하는 개별 의미들에 대해 말할 대는, 단일 짐승이 아니라, 일곱 개의 머리들 위에 앉았다고 쓰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해석이 아닙니다. 상징입니다. 상징은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의미 전달의 목적에 일관되게 그 표현 방식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징들을 하나의 대상과 일대일 매칭시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상징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여기 등장한 머리들이 '세력'인데, 이 세력은 종교적 세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17세기 계몽주의의 사상과 30년 전쟁의 피폐함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당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시절, 심지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조차 정치와 종교는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습니다(911테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 머리들에 정치의 범주까지 포함시킨다면, 오늘날 에클레시아는 정치에 대한 분명한 사명이 있음을 계시록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논란이 되는 것은 여기서의 '일곱 왕권'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입니다.
그리고 일곱 왕들이 있습니다. 다섯들은 떨어졌고, 하나는 (지금도) 있고, 다른 것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이 온다면 그것은 잠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 과거엔 있었고 지금 없는, 그리고 여덟번째 그는 또한 그 일곱들로부터 있습니다, 그리고 파멸을 향해 이끕니다.
당시 요한이 직면한 역사적 정황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 당시 로마를 다스리던 황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우구스투스, 2) 티베리우스, 3) 가이우스 , 4) 클라디우스, 5) 네로. 이렇게 다섯입니다. 그럼 "다섯들은 떨어졌고"라는 구절을, 이 황제들이 죽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로는 A.D.68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로가 실은 아직 살아있으며 파르티아 군대를 이끌고 다시 로마로 귀환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소문을 요한이 이용했을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하나는 (지금도) 있고" 라는 표현은 네로를 가리키는 게 됩니다. 그리고 네로가 죽은 이후 황제가 된 6) 갈바, 7) 오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쯤 네로가 돌아온다고 가정하면, '돌아온 네로'는 여덟번째가 됩니다. 즉 네로에 대한 소문을 요한이 이용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용해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요한은 네로 소문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대처로서 요한계시록을 쓰는 게 아닙니다. 요한은 훨씬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재료로서 당시 로마의 정치 상황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짐승에 대한 삼중표현을 위의 구절에 대입해보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그 짐승이 과거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있게 될 것
"과거에 있었다가"라는 말에 이미 떨어져버린 다섯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없고"는 여섯, 일곱번째 왕권이 되고, 이 왕권은 다시금 여덟번째처럼 돌아와(있게 될 것) 어린양의 부활을 패러디하지만, 결국 파멸당하게 될 것입니다. 삼중 표현과 일곱 머리의 내용은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을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숫자가 아니라, 계시록 안에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로 생각하면, 또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전체'입니다. 일곱은 모든, 전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모든 사탄적 권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말에 이를지 스케치하게 해줍니다. 다섯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섯번째에 해당하는 권세를 뚫고 광야길이 놓였기 때문입니다(마치 이사야 40장의 예언처럼). 그래서 광야 공동체에 의해 그 사탄적 권세는 극복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권세는 패망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그 사탄적 권세는 보란듯이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지만(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추앙하지만), 그 여덟번째는 그 망할 일곱에서 나온 거짓 부활입니다.
그리고 머리가 통치세력을 가리킨다면, 왜 그것이 짐승과 음녀의 결합으로 묘사되었는지도 생각해볼만 합니다.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짐승과, 인간을 유혹하는 음녀의 결합은 신천지가 주장하듯 종교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세력은 아닐 것입니다. 폭력과 속임수를 사용할 수 있는 정치, 종교의 복합체일 것이고, 요한에게 있어서는 황제 숭배의 종교적 측면과, 강한 군사력으로 중무장된 로마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엇을 일곱 머리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열개의 뿔들은 당신이 보고 있는 열 왕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나라를 취하지 않았지만, 왕들로서의 엑수시아를 한 시간동안 그 짐승과 함께 취합니다. 그들은 한 깨달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힘과 그들의 엑수시아를 그 짐승에게 줍니다.
머리에 이어서 '뿔들'이 등장합니다. 앞에서 일곱을 특정 왕들에게 대입해보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열 왕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열'은 열 개의 무언가를 대입시킬 수 있는 열이 아닙니다.(만일 뒤에 이어질 로마 황제들의 명단을 이어간다면, 계시록 저작시기가 2세기를 훌쩍 넘어버립니다) 여기서의 '열'은 많음을 뜻하고, 뿔은 그 많은 왕들이 가진 권세, 힘을 뜻합니다. 그들은 짐승과 함께 취해버렸습니다. 즉 사탄적 권세와 연합한 다른 세력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열 왕입니다. 리차드 보컴은, "로마의 통치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특권적인 지위를 보장받는 이방 통치계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즉 팍스 로마나라는 이데올로기에 취해, 전쟁을 정당화하고, 황제 중심의 초국가 세력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 팍스 로마나의 금잔에 든 것은, 온갖 거짓과 살육이 낳은 피비린내나는 오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초 국가 세력이 활동하는 시간을 요한은 "한 시간"이라 말합니다. 한 시간은 로마 통치 당시 시간을 재는 당시 가장 작은 단위로서 '호라'라고 합니다(여기서 hour가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말씀하신 시험의 기간과도 동일합니다. 한 시간입니다. 그 기간 동안 활동하는 악의 세력. 그때 에클레시아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 시간'이 역사의 중요한 변화가 이뤄지는 시기, 곧 시험을 의미하는 용례는 다니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린양과 맞서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은 그들을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들의 주이시고 왕들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초대(부름)받은 이들이 또한 선택되고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패러디와 폭력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정치와 종교적 성격이 섞여있는 세력입니다. 이들이 하나되어 어린양과 맞서 전쟁을 벌입니다. 그들은 깨달음도 하나되지만, 그 하나는 언약백성을 배제하고서 얻은 하나됨입니다. 그들의 하나됨은 죽고 살아나신 출애굽의 어린양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됨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은 그 거짓 하나를 이깁니다. 이김의 근거가 그 뒤에 나옵니다. 씨알의 주인들보다 어린양이 높으시기 때문에, 어린양은 왕인 그들 마저도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진정한 하나이시기 때문에. 즉 어린양은 "왕의 왕, 주의 주"이시기 때문에.
디모데전서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그리고 어린양의 주들의 주 되심, 왕들의 왕되심 이후 등장하는 병행구절은 그 어린양의 통치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줍니다. 바로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사람들의 신실함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왕권에 초대되었고, 타락의 문제를 해결할 이스라엘로 선택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여섯, 일곱번째 대접 심판에 참여했던 천사가 설명을 이어나갑니다.
"당신이 본 그 물들, 즉 그 음녀가 앉은 것은, 사람들과 무리들 입니다 곧 씨알들과 언어들.
물들의 정체가 폭로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12장에서 여자를 향해 물을 토해낸 사탄적 권세는 해달별을 입은 여자로 표상되는 에클레시아에게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앞 2,3장에서 일곱 에클레시아를 찾아왔던 이들이 바로 그 '물들'에 속한 이들임을 알게 됩니다. 씨알, 나라, 민족, 언어의 4중표현은 이 권세가 전지구적 권세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함은, 우리가 음녀에게 깔린 물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본 그 열 뿔들과 그 짐승, 그들이 그 음녀를 미워할 것이고, 그녀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며, 그녀를 발가벗게 만들고, 그녀의 살점들을 먹을 것이며, 그녀를 불로 태워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깔고 앉은 사탄적 권세의 막강함 이후 뜬금없는 그들의 내부분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치 예수를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 욕하던 이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처럼, 사탄적 세력은 서로 싸우며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마른 유프라테스 강으로 와서 바벨론을 함락시킨 동방에서 온 왕들이란 곧 17장의 열 왕이었습니다.
거짓된 하나를 외치던 음녀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비참한 꼴은 에스겔 23장*의 인유로 가득합니다. 에스겔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음녀라 부르고, 그 음녀 이스라엘이 발가벗겨저 수치를 당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음녀라 지칭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묘사가 그대로 계시록 17장 바벨론 음녀에게 적용됩니다.
에스겔 23:25,26,29
내가 질투하여 너희에게 분노를 터트리면, 그들이 너를 사납게 다룰 것이다. 그들이 너의 코와 귀를 잘라낼 것이며, 남은 사람들도 칼로 쓰러뜨릴 것이다. 너의 아들과 딸은 붙잡혀 가고, 너에게서 남은 것들은 불에 타 죽을 것이다. 그들이 너의 옷을 벗기고, 화려한 장식품들을 빼앗아 갈 것이다.
...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너를 다루며, 네가 수고한 것을 모두 빼앗아 가며, 너를 벌거벗겨 알몸으로 버려 두어, 음행하던 네 알몸, 곧 네 음행과 음탕한 생활을 드러낼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 가온들 속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깨침을 만드는 것, 그리고 한 깨침을 만드는 것,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는 것, 하나님의 말씀들이 이뤄질 때까지.
대접 심판을 맡은 천사를 통해, 이 악(惡)이 내부분열의 원인이 하나님임이 밝혀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위에서 진정으로 다스리시는 왕이었다. 그들이 거짓된 깨달음으로 하나된 것도,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를 짐승과 연합시키는 것도 모두가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정체가 17장 마지막에 밝혀집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았던 그 여자는 땅의 왕들 위에 나라를 가진 큰 도시입니다."
여자는 곧 도시를 가리킵니다. 패역한 도시, 땅의 왕들 위에 앉았다가, 그들에 의해 파멸되는 도시. 분열에 의해 파멸당하는 것은 악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로마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17:9~18
...여기, 지혜를 가진 생각(누스)이 (있습니다). 그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고, 거기 여자가 그것들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왕들이 있습니다. 다섯들은 떨어졌고, 하나는 (지금도) 있고, 다른 것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이 온다면 그것은 잠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 과거엔 있었고 지금 없는, 그리고 여덟번째 그는 또한 그 일곱들로부터 있습니다, 그리고 파멸을 향해 이끕니다. 그리고 그 열개의 뿔들은 당신이 보고 있는 열 왕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나라를 취하지 않았지만, 왕들로서의 엑수시아를 한 시간동안 그 짐승과 함께 취합니다. 그들은 한 깨달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힘과 그들의 엑수시아를 그 짐승에게 줍니다. 그들은 그 어린양과 맞서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은 그들을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들의 주이시고 왕들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초대(부름)받은 이들이 또한 선택되고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본 그 물들, 즉 그 음녀가 앉은 것은, 사람들과 무리들 입니다 곧 씨알들과 언어들. 그리고 당신이 본 그 열 뿔들과 그 짐승, 그들이 그 음녀를 미워할 것이고, 그녀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며, 그녀를 발가벗게 만들고, 그녀의 살점들을 먹을 것이며, 그녀를 불로 태워버릴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 가온들 속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깨침을 만드는 것, 그리고 한 깨침을 만드는 것,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는 것, 하나님의 말씀들이 이뤄질 때까지. 그리고 당신이 보았던 그 여자는 땅의 왕들 위에 나라를 가진 큰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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