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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7:1~8

  그리고 일곱 대접들을 가진 일곱 천사들로부터 하나가 왔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말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곱 대접의 심판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심판에 참여했던 천사 하나가 요한에게 옵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17:1~19:10은 앞에 등장한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대접 심판, 즉 대접이 유브라데 강과 공중에 부어진 것에 대한 자세한 의미를 풀어주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갑시다. 여기, 나는 보여주겠습니다. 당신에게 많은 물들 위에 앉은 위대한 음녀의 그 심판을, 그녀 뒤에서 땅의 왕들이 음행했고, 땅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부터 취했습니다."


  그 대접 심판에 참여했던 천사(분명 세마포를 입고, 금 빛 가슴띠를 두르고 있었을 겁니다)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단어는 심판이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어순이 거꾸로 됩니다만, 희랍어 원문을 순서대로 읽으면, "심판, 음녀의, 거대한, 앉은, 그 물 위에, 많은"이 됩니다. 이 천사가 대접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말해줄 내용이 심판인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내용은 그 다음부터 입니다.


1) 위대한 음녀


  성경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결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신부로 봅니다. 창조는 이 부부가 살기 위한 신혼집을 마련하는 일이었고, 안식은 이 부부의 행복한 삶을 가리킨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타락은 외간남자의 침입과 불륜이 됩니다.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새댁이 한순간에 결혼의 언약을 깨버린 간통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후 역사는 본 남편이 타락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남편은 심지어 자신의 숨결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감행합니다. 즉 죄악으로 얼룩진 아내를 새롭게 창조하여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아내가 다른 자아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음녀의 심상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을 고집하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대표적인 경으로는 호세아서가 있습니다.


호세아 3:1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호세아에게 음녀가 된 여인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음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한 음녀였음을 깨닫고, 다시금 남편에게 돌아와 깨끗해지고자 합니다(본남편의 용서가 없이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녀가된 자신의 정체성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벌어지는 일은,


나훔 3:1~7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
찢어지는 듯한 말채찍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병거 바퀴 소리. 말이 달려온다. 병거가 굴러온다.
기병대가 습격하여 온다. 칼에 불이 난다. 창은 번개처럼 번쩍인다. 떼죽음, 높게 쌓인 시체 더미, 셀 수도 없는 시체. 사람이 시체 더미에 걸려서 넘어진다. 이것은 네가, 음녀가 되어서 음행을 일삼고, 마술을 써서 사람을 홀린 탓이다. 음행으로 뭇 나라를 홀리고, 마술로 뭇 민족을 꾀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너를 치겠다. 나 만군의 주가 선언한다.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 위로 걷어 올려서 네 벌거벗은 것을 뭇 나라가 보게 하고, 네 부끄러운 곳을 뭇 왕국이 보게 하겠다. 오물을 너에게 던져서 너를 부끄럽게 하고, 구경거리가 되게 하겠다. 너를 보는 사람마다 '니느웨가 망하였다만, 누가 그를 애도하랴?'하면서 너를 피하여 달아나니, 너를 위로할 자들을, 내가 어디에서 찾아올 수 있겠느냐?"


  즉 아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름받은 언약백성이, 끝까지 음녀의 정체성을 고집하며, 음행을 일삼을 경우, 세상은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고 더욱 더 타락합니다. 이스라엘이 음녀가 된 댓가가 이리도 큽니다. 음녀가 반복하는 '음행'의 의미는, 개인적으로는 성(性)과 관련된 죄(결혼의 테두리를 벗어난 성적 행위)를 가리키겠지만, 공동체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 외에 다른 무언가를 열심내어 추구하는 것이 음행이 됩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람 사이의 착취는 이 우상숭배적 질서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부산물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음녀는 어느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거대한 음녀'라고 했으므로, 전지구를 집어삼킨 우상숭배적 질서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라 오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데이브 헌트는 이 음녀의 정체가 카톨릭이라고 말합니다만). 왜냐하면 이 거대한 음녀에게 반응하는 심정과 거룩한 신부가 되고픈 갈망이,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해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나는 카톨릭이 아니니까 안심이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음녀와 거룩한 신부의 대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고, 한 개인의 인격을 관통합니다. 나 자신이 거대한 음녀에 포함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이 거룩한 신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상 이 가능성 앞에 놓여있습니다. (신실함이란, 이 가능성 앞에서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입니다.)


2) 많은 물


  이 거대한 음녀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죄는 언제나 자가당착적인 측면이 있어서 누구도 자기 자신이 거대한 음녀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죄의 무서움입니다. 예수를 죽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악에 참여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오히려 자신들의 선택과 실천이 이스라엘을 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 계시록 본문에 대한 주의깊은 접근이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 말입니다.


  이 거대한 음녀는(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에반게리온에서 인류 전체의 LCL용액으로 구성된 거대화된 레이가 생각납니다.)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습니다. 많은 물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예레미야 51:12,13

너희는 바빌론 도성의 성벽을 마주 보며 공격 신호의 깃발을 올려라. 경계를 강화하여라. 보초를 세워라. 복병을 매복시켜라. 주님께서는 바빌로니아 백성에게 하기로 계획하신 것을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것이다. 큰 물 가에 사는, 보물을 많이 가진 자야, 너의 종말이 다가왔다. 너의 목숨이 끊어질 때가 되었다.


  많은 물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벨론 멸망에 등장합니다. 개역성경에는 "큰 물"로 단수 표현이지만, 이 단어는 복수입니다. 물이 많이 흐르기 때문에 복수 어휘로 썼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이 많은 물의 물은, 단순히 물만을 뜻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앉은"이란 표현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에 보면 "모르드개가 성문에 앉았더라"(에스더 2:19) 같은 표현이 있는데, 한가하게 성문에 앉아봤다는 말이 아니라, 성문에서 권한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앉았다는 말은, 이 많은 물들에 대해서 이 거대한 음녀가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물이 1차적인 의미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 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12장에서(12장에서는 신부의 해산의 내용이 나옵니다. 12장과 17장은 신부와 음녀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용이, 해를 입고 달을 밟고 열 두 별을 쓴 여자를 집어 삼키기 위해 물을 토해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때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용이 사용한 방법도 물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우리는 일곱 대접 심판에서, 바벨론의 수원(水原)인 유프라테스 강이 마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레스 왕의 이야기를 인유한 것으로, 마른 강바닥을 밟고 해뜨는 곳에서부터 왕들이 바벨론을 침공할 것이라는 내용도 확인했습니다. 이때 마르게 되는 물이, 지금 거대한 음녀가 앉아 있는 그 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천사가 여섯번째, 일곱번째 심판을 자세히 보여주는 장면에 와있기 때문입니다. 16장의 심판 장면과, 지금 보고 있는 거대한 음녀의 장면은 서로 연결됩니다.


  아직 많은 물에 대해서 들여다 볼 것이 남았지만, 일단 여기까지 하고 넘어갑시다. 어느정도 정리는 해둡시다. "심판, 음녀의, 거대한, 앉은, 그 물 위에, 많은"에서 '심판'은 '여섯번째, 일곱번째 대접심판'을 가리킵니다. '음녀'는 신부에 반대되는 우상숭배적 질서를 가리키고 '음행'은 그것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음녀가 많은 물들을 다스리는데, 그 많은 물은 말라버릴 유프라테스 강이요, 이것이 단순 물이 아니라, 바벨론의 힘의 원천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광야로 이끌었습니다, 숨님 안에서.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여자가 짐승 위에 앉은 것을, 그리고 그 짐승은 붉고, 신성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 옷을 두르고, 금과 가치있는 돌과 진주로 꾸몄습니다, 그녀의 손에 금잔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잔은 역겨운 것들과 그녀의 음행의 더러운것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미간 위에는 이름이 쓰여있습니다.


  첫 문장은 우리의 눈을 번뜩이게 합니다.


마태복음 4: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치 예수님처럼 지금 요한도 숨님에 의해 광야로 이끌립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사탄의 정체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광야'는 장소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에 우리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이 곧 광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광야'라는 말은 장소가 아니라, 무언가 대상을 바라보는 이가 서 있는 인식적인 토대를 가리킨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광야에 서 있는 이에게 보이는 것과, 반대로 많은 물에 앉은 이에게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산에 올라가서도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볼 수 있는 풍광이 다르듯, 이 '광야'라는 표현 역시, 무언가를 보기 위한 세계관, 관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광야에 있다면, 출애굽을 겪은 언약백성으로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고, 바로 그렇게 봐야만 사탄의 정체를 꿰뚫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광야'로 가서 사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understanding이란 말이 그렇습니다. 어디 위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리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광야의 시선으로 요한이 본 것은, 아까 그 음녀였고, 그 음녀는 짐승 위에 '앉아' 있습니다. 짐승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것입니다. 이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에 관해서는 이미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들의 합으로, 하나님을 배제하고도 사람끼리 잘 먹고 살 잘 수 있다는 헛된 꿈을 퍼뜨리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요한에게는 로마가 그러할 것이요, 세례 요한에게는 헤롯이,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뚜렷하게 저 짐승은 서 있습니다. 

  미로슬라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예언자적'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라면, 우리와 밀접하게 있는 거대한 세력들에 대해서 직언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합에게는 엘리야가 있었고, 크세르크세스에게는 에스더가 있었습니다. 똑같이 힘을 길러서 폭력으로 맞서자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어도 할 말은 하는 것이 기독교의 방법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폭력을 쓰지 않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 왕 같은 제사장다운 죽음이겠습니다.

  일곱 머리 열 뿔의 짐승은 오늘날도 건재하게 서 있습니다. 그 안에 신성모독으로 가득한 이론들을 가지고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른척하기 때문에, 그 붉은 빛이 투명한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뒤에 천사가 이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에 대해서도 풀어줄 것입니다. 다만 꼭 하고픈 말은, 에클레시아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그 핏빛을 드러내 맞서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보석이 앞 4,5장에서 하늘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지금 이 음녀가 스스로 하나님스러워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옷만 그런게 아닙니다. 성전에 놓일 법한 금으로 된 그릇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온갖 추악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금 그릇이나, 그 속은 오물 그릇이나 다름 없습니다. 광야에서 그녀를 보는 요한은 이 점을 간파합니다. 그러나 많은 물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금 그릇을 들고 있는 여자 위로 곧 금 그릇(대접)의 심판이 부어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미간을 보니, 그녀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뮈스테리온, 큰 바벨론, 그 땅의 음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머니."


  이것은 광야에서만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이 음녀의 정체는 바벨론, 이 땅에 우상숭배적인 질서를 조장하는 것들과, 비인간화된 것들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여자가 거룩한 이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는 것을. 그리고 나는 큰 놀라움으로 그녀를 보고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거룩한 이들 곧 예수를 증언하는 이들을 무수히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해의 진범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깜짝 놀랍니다. 아마도 그녀의 정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라 놀란듯 싶습니다.


"왜 그리 놀랬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그 여자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서) 그녀를 태우고 다니는 짐승의 뮈스테리온을.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짐승은 과거에 있었고, 현재는 없으며, 곧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이끌릴 것입니다. 땅 위의 거주민들은 놀랠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세계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그 삶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 짐승이 과거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있게 될 것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놀라는 요한을 나무랍니다. 요한이 알게 된 진실은, 요한이 그간 눈으로보던 현실과 무척 다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던, 그래서 아래서 우러러보면 그 손에 들고 있던 금 잔이 빛을 내던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출애굽과 약속의 땅 사이에서 바라보니, 그 번쩍이던 금 잔은 억울한 이들의 피와 역겨운 오물로 가득했습니다. 생각해보면, 12장에서 이 짐승이 여자에게 물을 쏟았을 때, 그 물도 '많은 물'이었을 것입니다. 즉 '음녀-짐승-많은 물'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해산을 마친 신부가 나온 12장, 음녀가 나오는 17장, 그리고 16장의 여섯, 일곱번째 대접을 연관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여섯번째, 일곱번째 대접 심판을 설명하던 천사는 이 짐승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짐승은 과거에는 있었고, 현재에는 없으며, 이제 곧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이끌릴 짐승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앞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삼중표현과 흡사합니다. 앞에서 물의 천사가 고백했던 내용을 확인해봅시다.

  당신은 옳으십니다, 계시며 계셨고 깨끗하신 이여,

  악의 세력은 온통 신적 권세에 대한 패러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은 선에 기생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원이신 한 분으로부터 흘러나온 힘에 기대지 않고서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악이 선에 기생하는 것에 대한 다른 글은 여기) 여자가 앉아 있는 많은 물조차, 창조주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패러디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계시록은 이들을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패러디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흉내내고 있는 사탄을 근원으로 오해합니다. 그리고 경배합니다. 앞에서 '광야'을 새로운 인식의 토대로 읽었던 것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출애굽이 악을 이기고 그 댓가로 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광야에 나온 이들은,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그 악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 인식의 맹점은, 스스로에 대해서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인데,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악에 짓눌려있는지 알지도 못한채 끌려갑니다. 그러나 광야의 인식은 자기부인으로 얻어지고, 자기 부인은 자기 객관화를 통한 자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입니다. 이것을 객관적이고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메시아 예수로부터 온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주(主)"라 고백할 때, 즉 나에게 손님(客)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나의 주인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나의 주관 삼을 수 있습니다. 초월자로서 온 우주에 대해 객관이신 이가, 곧 나의 주관이 되십니다.

  이 관점은 기독교가 가진 내부 고발의 전통과도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 있다고 말하는 고백, 즉 회개가 있어야 기독교 세계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개인적인 내부고발은 공동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으로만 공동체는 깨끗하게 됩니다. 죄 고백은, 자기 비하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요, 그 평가는 신으로부터 온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패러디(혹은 아이콘, 혹은 에이돌라)에 붙잡혔던 이(혹은 이들)의 자기 해방이 이뤄집니다.


  짐승에 대한 삼중표현에 대해서 최근 생각한 것이 있어 덧붙입니다.


그 짐승은 과거에 있었고, 현재는 없으며, 곧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이끌릴 것입니다.


 짐승이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이 현재에 없다는 말이 의아합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엘리야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그림은 복잡하지만, 생각은 단순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아합(과 이세벨)과 엘리야의 관계를 계시록에 적용해보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힘은 줄곧 엘리야를 압박합니다. 아합 왕에게 3년간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한 엘리야의 목숨은 위태로워지지만, 그릿 시냇가에 와서 까마귀가 가져다준 고기를 먹고 사르밧 과부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아합과 이세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후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이들 850명과 자기 생애 안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로뎀으로 갑니다. 거기서 마치 이스라엘 이야기를 요약하는듯한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 모습은 호렙산에서 대 결말을 이룹니다. 이후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합니다.


  여기서 아합과 이세벨로 대표되는 악은, 전에는 있었으나, 광야에 사르밧 과부와 함께 있는 엘리야에게는 없으며, 이후 최후의 결전 이후 패망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과도 유사한 패턴입니다(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엘리야가 초인적인 속도로 40일간 달려, 호렙산(시내산)에 오르는 기행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요한은 광야로 인도되었습니다. 거기에 짐승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광야의 자리에서, 많은 물들 위에 앉은 짐승과 여자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리고 곧 짐승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테지만, 광야를 지나온 요한(과 그의 에클레시아)은 마치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압도적인 이김을 얻었듯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서있지 않은 이들에게 음녀와 짐승은 대단한 것이고, 경배할만한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 영향력으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던, 즉 광야로 들어서지 않은 이들입니다.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항 밖을 논할 수 없듯, 악으로부터 출애굽하지 못한 이는, 악이 해결된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17:1~8

  그리고 일곱 대접들을 가진 일곱 천사들로부터 하나가 왔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말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갑시다. 여기, 나는 보여주겠습니다. 당신에게 많은 물들 위에 앉은 위대한 음녀의 그 심판을, 그녀 뒤에서 땅의 왕들이 음행했고, 땅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부터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광야로 이끌었습니다, 숨님 안에서.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여자가 짐승 위에 앉은 것을, 그리고 그 짐승은 붉고, 신성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 옷을 두르고, 금과 가치있는 돌과 진주로 꾸몄습니다, 그녀의 손에 금잔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잔은 역겨운 것들과 그녀의 음행의 더러운것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미간 위에는 이름이 쓰여있습니다.

    "뮈스테리온, 큰 바벨론, 그 땅의 음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머니."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여자가 거룩한 이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는 것을. 그리고 나는 큰 놀라움으로 그녀를 보고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리 놀랬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그 여자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서) 그녀를 태우고 다니는 짐승의 뮈스테리온을.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짐승은 과거에 있었고, 현재는 없으며, 곧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이끌릴 것입니다. 땅 위의 거주민들은 놀랠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세계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그 삶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 짐승이 과거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있게 될 것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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