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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8:1~8

  장면이 바뀌고 나는 하늘로부터 걸어내려오는 다른 천사를 보았는데, 그는 큰 엑수시아를 가지고 있었고, 땅은 그이의 뚜렷으로부터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장면이 바뀌고, 우리는 오랜만에 환함을 봅니다. 그런데 이 환함은 어쩌면 오랜만이 아니라 생전 처음보는 환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면이 바뀌기 전 요한과 우리가 보았던 것은 일곱 대접 심판이었습니다. 그 중 다섯번째 심판 때 대접은 짐승의 왕좌에 부어졌고, 짐승의 나라는 온통 어두워졌습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보게 되는 진실이었습니다. 음녀와 짐승은 온 땅을 어둡게 만들면서도, 스스로를 사람들이 빛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파라오처럼 말입니다, 아니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모든 거짓 권력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로부터 공중을 뚫고 내려오는 천사가 환한 빛을 가져옵니다. 땅이 이제서야 환해집니다. 이 환함은 에스겔의 인유입니다.


에스겔 43:2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땅은 그의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하려고 오시는 환상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43:3). 그런데 땅을 환하게 하시는 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멸망만은 아니었습니다. 


에스겔 43:7

  "사람아, 이 곳은 내 보좌가 있는 곳, 내가 발을 딛는 곳, 내가 여기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영원히 살 곳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내 거룩한 이름을 다시는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 백성이나 왕들이 음란을 피우거나, 죽은 왕들의 시체를 근처에 묻어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멸망과 재건'. 이것은 생명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우리는 묵은 것은 계속 내버리고, 새 것을 계속 생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죽어버린 것을 아주 내버리고, 새 것만으로 생명을 구성하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입니다. 현시대의 생명이 묵은 것과 새 것의 끊임없은 순환이었다면, 이제 새 것으로의 온전함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빛이 온 땅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묵은 것을 없애버리실 차례입니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즉 다이몬들의 거주지였고 모든 더러운 숨결들의 보금자리이며 모든 더럽고 증오하던 새의 보금자리, 왜냐하면 그녀의 포르네이아의 격함의 포도주로부터 모든 민족이 마셨고, 그리고 모든 땅의 왕들이 그녀와 함께 포르네이아했으며, 그리고 땅의 상인들이 사치스러운 힘으로부터 부유했다."


  얼마 전 라틴어를 번역하다가 urbs라는 단어를 어찌 번역해야 하는지 한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을 고집했고, 그 친구는 도시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기사 당시의 도시가 성읍이니 그리 대단한 차이가 있겠냐만은, 요한계시록 번역에 있어서는 그 친구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큰 도시'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도시는 오늘날 문명입니다. 문명은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모든 문화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고, 그 꽃에 양분을 가져다주는 교역의 줄기들이 복잡한 그물망처럼 짜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노동과 생산이 이 창조세계 위에 그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투쟁해서 얻어낸 쾌거요 업적입니다. '뉴욕'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듯이, 인간은 도시를 일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왔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도시 중의 도시 바벨론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 피워낸 꽃부터 더러운 것들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가리면서도 하나님 행세를 하는 추상명사들이 그 꽃에 모여들었습니다. 온갖 더러운 생각들이 도시에 살고 있고, 말씀을 물어가는 '새'들 역시 도시에 가득합니다.

  이 도시의 타락은, '그녀'로부터 비롯됩니다. 모든 민족이 그녀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마시는 것은 '취함'과 '쾌락'을, 즉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마비되고, 좋게 느끼는 것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공중을 넘어서 사고할 수 없게 됩니다. 남은 건 물리적인 만족 뿐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은 홀로 마시지 않고, 이 음행의 포도주를 서로 나눠마시게 했습니다. 공중 안에 갇혀서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시 프로젝트에 씨알은 착취당하며 병들어갔습니다.

  상인들은 이를 통해 더욱더 부유해졌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보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 프로젝트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무언가 해보자는 생각은 아담까지 거슬러가고, 타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건설해보자는 시도는 가인의 성으로 소급되고, 모든 인류가 이 포도주를 마신 것은 바벨탑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에덴 프로젝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덴은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합니다.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없고, 땅에서 높아지기는 커녕 땅과 함께 전원생활을 영위해나갑니다. 요한이 보고 있는 도시는 바벨탑의 귀신이 죽지 않고 제 덩치를 불려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대한 멸망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로부터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21:9

그런데, 갑자기 병거가 몰려오고, 기마병이 무리를 지어 온다. 누가 소리친다. "바빌론이 함락되었다! 바빌론이 함락되었다! 조각한 신상들이 모두 땅에 떨어져서 박살났다!"


예레미야 51:8

바빌로니아가 갑자기 쓰러져서 망하였다. 그를 애도하고 통곡하여라. 혹시 그가 낫지 않는지, 유향을 가져다가 그 상처에 발라 보아라.




  그리고 나는 그 하늘로부터 다른 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희들은 거기 그녀로부터 나오라, 나의 씨알아, 그녀의 비뚤어짐들과 더불어 코이노니아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재앙들로부터 너희들이 붙잡지 않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녀의 비뚤어짐들이 하늘 아래까지 들러붙어 있고, 하나님은 그녀의 옳지않음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새 창조의 순간, 바벨론의 멸망이 선언되고, 또한 하늘로부터는 천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출애굽하라."

  음녀와 몸을 섞은 이 도시의 타락한 문화와, 사람들을 짜먹는 경제 구조는 그 멸망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재앙이 무효화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답게 되기 위해서 묵은 것을 떨쳐내야 하는 법입니다. 다만 저 출애굽의 호소는, 스스로 묵은 것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녀와 함께 하는 것은 인간성을 비뚤어지게 만듭니다. 착취로 점철된 교역과 코이노니아 하면서 나 역시 착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깊에 몸 담그면 담글수록, 나는 재앙에 가까워집니다. 그녀의 비뚤어짐들은 쌓이고 쌓여서 이제 하늘 아래까지 들러붙어 있습니다(예레미야 51:9). 그러나 바벨탑이 그렇게 높아지도록 하나님은 좌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제 바벨론이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뱀으로부터 시작된 바벨의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이 무너질 것이라는 구약 예언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여러 본문들을 인유했는데, 그 중에서 세 개의 본문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 본문들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을 쓰기 위해 구약본문들을 가져왔지만, 우리는 거꾸로 구약본문에 접근하기 위해 요한의 시각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

예레미야 51:37, 45


  그러면 바빌로니아가 폐허 더미로 변하고, 여우 떼의 굴혈이 되어,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그 참혹한 형상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서 빈정거릴 것이다.

...

  나의 백성아, 너희는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하여, 목숨을 건져라. 주의 무서운 분노 앞에서 벗어나라.


2)

이사야 52:5, 9~12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여기 바빌로니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의 백성이 까닭도 없이 여기로 사로잡혀 왔고, 지배자들은 그들을 조롱한다. 날마다 쉬지 않고 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으니,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겠느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너희는 떠나거라, 그 곳에서 떠나 나오너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그 가운데서 나오너라. 주님의 그릇을 운반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너희 앞에 가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너희 뒤를 지켜 주시니, 너희가 나올 때에 황급히 나오지 않아도 되며, 도망 치듯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3) 소돔과 고모라.





  너희들은 그녀에게 되갚아주어라 그녀가 되갚아주었던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그 일들에 따라 두배의 것들을 두배로 하라. 그녀가 섞은 잔 속에 너희들이 섞어주어라 그녀에게 두배로. 그녀가 스스로를 드러나게 하고 사치를 부렸던 만큼, 그만큼의 괴로움과 애곡을 그녀에게 돌려주어라.


  여기서 '너희들'은 앞에서 출애굽 하라고 명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늘의 소리는 이들에게 나올 것을 명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되갚아주라 명하십니다. 그것도 두 배로.

  이 말은 폭력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더욱더 폭력적이어야 한다는 말일리 없습니다. 이 '되갚아줌'은 그녀를 더욱 괴로워하고 애곡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녀는 잔속에 우상숭배를 담아 이들을 먹이려 했지만, 이들은 같은 잔 속에 더한 무언가를 섞어 그녀에게 내미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기꺼이 내어놓는 희생이 아닐까요?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악을 더욱더 괴롭게 만드는, "갑절의 갚음"이 아닐까요? 요한과 동시대를 살았던 에클레시아들에게 이런 편지가 회람되었습니다.


로마서 12:18~21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온전한 일을 앞서 생각하세요.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세요.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들이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사안을 맡기세요. 기록되기를,

    "원수 갚음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원수가 배고프거든, 언제든지 그를 먹이십시오. 만약 그가 목마르거든, 언제든지 그를 마시게 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여러분이 그 원수의 머리 위에 핀 숯불을 쌓아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세요.


  이것이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악이 사람을 점령하게 되면, 가해자와 당사자 모두 복수심에 불타서 악을 위한 제물이 되어버린다면, 로마서 12장의 방법은 악을 두 번 죽입니다. 희생자도 악에 점령되지 않고, 가해자마저도 악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 본문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는 본문은 신명기 32:35장입니다.


신명기 32:35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원수들이 넘어질 때가 곧 온다. 재난의 날이 가깝고, 멸망의 때가 그들에게 곧 덮친다.'


  신명기가 예견한 원수들이 넘어질 때, 재난의 날, 멸망의 때가 곧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때까지 에클레시아는 같은 방식으로 싸워나갑니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할 때 원수는 두 종류가 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지 말자고 말할 때의 원수는 사람이 되고, 우리가 사람에게 원수를 갚지 않을 때 심각한 타격을 입는 원수는 계시록 18장의 여자가 됩니다. '원수 갚음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악에 대한 가장 심각한 타격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원수는 사람이요, 악은 음녀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구약 인유들을 살펴봅시다.


시편 137:8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신비한 차원을 만납니다. 바벨론이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갚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먼저는 원수를 갚으실 권한이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사람이라 쓰여있으므로, 곧 메시아 예수가 되십니다. 더불어, 우리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 메시아께 전권을 위임해드리므로 바벨론에게 원수를 갚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람이신 예수와, 사람들인 우리는 같은 복 안에 있게 됩니다.


예레미야 50:28,29


(저 소리를 들어 보아라. 바빌로니아 땅에서 도망하여 빠져 나온 사람들이,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셨다고, 그의 성전을 부순 자들에게 복수하셨다고, 시온에 소식을 전하고 있다.) 


  "너희는 활 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바빌론을 쳐라.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주 앞에서 오만하게 행동하였으니 너희는 바빌론 도성을 포위하고 쳐라. 아무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너희는 그들의 소행대로 보복하여 주어라. 그들이 하였던 것과 똑같이 너희도 그들에게 갚아 주어라.


  구약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들에게, 신약의 관점은 비로소 구약을 일관성있게 읽도록 돕습니다. 그들의 소행대로 '보복'하라는 것은 메시아 예수 이후 똑같이 죽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본문의 '갚아 주어라'는 메시아 예수를 기점으로 '원수'라는 단어를 두 차원으로 나눔으로써 의미가 전복됩니다. 그들의 소행대로 보복하는 것의 가장 탁월한 방식이 사랑임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행위가 나를 악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나 역시 '똑같이' 그들을 선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갚아줘야 합니다.


예레미야 51:24

"그러나 이제는 내가 바빌로니아 땅과 바빌로니아 백성에게 원수를 갚겠다. 그들이 시온에 와서 저지른 모든 죄악을,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그들에게 갚아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이한 갚아줌', 세상이 '기독교의 황금률'이라 말하는 복수가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끝날에 모든 악을 처리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가능해집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수 갚음을 하지 않으시면, 그간 하나님께 원수 갚음을 맡겼던 방식이 아무 효용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녀의 가온에 그녀 스스로 말한다, "나는 여왕으로 앉아있다, 즉 나는 과부가 아니다, 그리고 결코 애곡을 보지 않으리라" 이를 통해서 한 날에 그녀에 대한 모든 재앙이 올 것이다, 죽음과 애곡과 기근, 그리고 불로 그녀가 살라지리라.


  이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생각해봅시다. 이 바로 앞에서는, '그 도시에게 갚아주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갚아주어야 하는 이유는, 즉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 도시의 문화에 물들거나 착취의 경제 구조를 의지하지 않은채), 보이는 사람에 대한 더욱 더 뜨거운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도시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스스로 과부가 아니며, 즉 하나님이 필요 없으며, 자신은 슬퍼할 일이 없는 완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 '음녀'의 지배 아래서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없으며, 나는 슬퍼할 일이 없을거야.' 이것은 마치 라오디케아이 에클레시아에게 인자가 주신 권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가 말하길, '나는 지금 풍요롭고, 예전부터 줄곧 풍요로왔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정작) 너 자신이 어려움에 짓눌려 있고, 비참하며, 가난하며, 눈 멀었고, 벌거벗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심판의 이유입니다. 악은 바로 이 교만 때문에 멸망할 것이고, 에클레시아의 사랑을 거절하는 이들은 바로 이 교만 때문에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모든 기회로부터 자신을 박탈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과 도시의 멸망은 자멸입니다. 스스로 군림하려고 하니, 그녀와 교역하고 있던 땅의 왕들이 들고 일어나 이 교만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방법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멸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죄입니다. 악이 스스로 자멸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을 어찌 악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멸하는 악이 왜 나를 자멸하도록 만들었냐고 하나님께 따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여겼으면서도?


이사야 47:7~9


너는 언제까지나 네가 권좌의 여왕으로 군림할 것이라고 믿고, 이런 일들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않았으며, 이후에 일어날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탕한 여인아, 이제 너는 이 말을 들어 보아라. 네가 평안히 앉아서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나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나는 과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자식을 잃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였지만, 자식을 잃고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한 날에 갑자기 닥쳐올 것이다. 너의 주술이 아무리 능하고 너의 마술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이 일이 너에게 반드시 닥친다.

 

  실제로 A.D.1세기 '로마'라는 도시는 문화로보나 경제로보나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지금 그 위용은 박물관에서나 확인해야 합니다. 게다가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심 가질 적에도, 안으로는 황제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끊임없는 소요와, 밖으로는 이민족들과의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그칠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더욱 더 끔찍한 것은, 패역한 도시는, 바로 그 하루 아침을 향해서 태동부터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강하신 주 한 분 하나님이 그녀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 도시가 멸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에덴 프로젝트를 가로 막았던 타락한 도시가 멸망당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이 문장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심판'입니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판단'으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묵은 것으로, 멸망당할 것으로 판단하셨습니다. 새 창조에 어울리지 않는 바벨의 것으로 판단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강하다고 자랑하는 도시보다도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18:1~8

  장면이 바뀌고 나는 하늘로부터 걸어내려오는 다른 천사를 보았는데, 그는 큰 엑수시아를 가지고 있었고, 땅은 그이의 뚜렷으로부터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큰 바벨론이, 즉 다이몬들의 거주지였고 모든 더러운 숨결들의 보금자리이며 모든 더럽고 증오하던 새의 보금자리, 왜냐하면 그녀의 포르네이아의 격함의 포도주로부터 모든 민족이 마셨고, 그리고 모든 땅의 왕들이 그녀와 함께 포르네이아했으며, 그리고 땅의 상인들이 사치스러운 힘으로부터 부유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늘로부터 다른 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희들은 거기 그녀로부터 나오라, 나의 씨알아, 그녀의 비뚤어짐들과 더불어 코이노니아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재앙들로부터 너희들이 붙잡지 않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녀의 비뚤어짐들이 하늘 아래까지 들러붙어 있고, 하나님은 그녀의 옳지않음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그녀에게 되갚아주어라 그녀가 되갚아주었던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그 일들에 따라 두배의 것들을 두배로 하라. 그녀가 섞은 잔 속에 너희들이 섞어주어라 그녀에게 두배로. 그녀가 스스로를 드러나게 하고 사치를 부렸던 만큼, 그만큼의 괴로움과 애곡을 그녀에게 돌려주어라. 왜냐하면 그녀의 가온에 그녀 스스로 말한다, "나는 여왕으로 앉아있다, 즉 나는 과부가 아니다, 그리고 결코 애곡을 보지 않으리라" 이를 통해서 한 날에 그녀에 대한 모든 재앙이 올 것이다, 죽음과 애곡과 기근, 그리고 불로 그녀가 살라지리라. 왜냐하면 강하신 주 한 분 하나님이 그녀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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