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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11~18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다른 짐승을, 그리고 그것은 어린양과 비슷하게 두 뿔들을 가지고 있고, 용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짐승의 모든 엑수시아를 그 앞에서 행합니다.
다시 "나는 보았습니다"로 시작합니다. 새로운 환상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12장부터 시작된 내용으로 치면, 우리는 이제 세번째 환상으로 진입했습니다. 먼저는 1) '여자와 용의 환상'을, 이어서는 2) '첫번째 짐승 환상' 그리고 이제 볼 것은 3) '두번째 짐승 환상'입니다.
이 두번째 짐승도 첫번째 짐승처럼 용과 모든 엑수시아를 공유합니다. 따라서 이 짐승을 용과 다른 무언가로 보려는 시도는 무익합니다. 요한의 환상에서, 붉은 용은 이 두 짐승을 바다로부터 가져왔습니다. 바다는 악의 진원지를 뜻했습니다. 사탄이 바다 모래 위에 서있었고, 이어서 두 짐승이 묘사되는 이 환상 전체 묶음은, 그 앞에 있었던 두 증인과도 매치됩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을 두시지만, 사탄은 두 짐승을 둡니다. 이는 명백한 하나님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절대의 하나를 모방한 상대의 하나입니다. 상대의 하나가 절대의 하나가 되려는 것을 말로 하면 거짓말이요, 죄로는 참람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 말했을 때, 그 하나는 "하나, 둘 셋"의 '하나'나, 1+1할 때의 1이 아닙니다. 더하거나 뺄 수 있는 하나는 하나님의 하나가 아닙니다. '유일신'의 '일(一)'은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토대가 되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나 없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변의 대상에 따라 위치와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인 1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절대입니다. 만물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절대자가 아닌 무언가가 자신을 절대화합니다. 사탄은 명백히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짐승은 어린양과 비슷하게도 두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내는 어린양이 아닙니다. 그는 용처럼 하나님과 하늘 장막의 사람들을 비방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스스로 절대적 하나인듯 말합니다.
다니엘 8:3~12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강가에 서 있는데, 그 숫양에게는 뿔이 둘 있고, 그 뿔이 둘 다 길었는데, 한 뿔은 다른 뿔보다 더 길었다. 그 긴 것이 나중에 나온 것이다. 내가 보니, 그 숫양이 서쪽과 북쪽과 동쪽으로 들이받는데도, 아무 짐승도 그 앞에서 대항하지 못했으며, 그 손에서 구해 낼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 숫양은 자기 마음대로 하며 더욱 강해졌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보려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 숫염소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올라와서 땅에 두루 다니는데,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두 눈 사이에는 뿔 하나가 뚜렷이 보였다. 이 숫염소가 두 뿔을 가진 숫양, 곧 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본 그 숫양에게 다가가서, 성난 힘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보니, 그 숫염소가 숫양에게 가까이 가서 몹시 성을 내며, 그 숫양을 쳐서 두 뿔을 부수어 버렸다. 그 숫양은 숫염소와 맞서서 싸울 힘이 없었다. 숫염소가 숫양을 땅에 집어 던지고 짓밟았으나, 그 손에서 숫양을 구해 낼 사람이 없었다.
숫염소가 매우 강해지고 힘이 세어졌을 때에, 그 큰 뿔이 부러지고, 그 자리에 뚜렷하게 보이는 뿔 넷이 하늘의 네 바람으로 뻗으면서 돋아났다. 그 가운데의 하나에서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땅 쪽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그것이 마치 하늘 군대를 주관하시는 분만큼이나 강해진 듯하더니, 그분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마저 없애 버리고, 그분의 성전도 파괴하였다. 반역 때문에 성도들의 군대와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 뿔에게로 넘어갔다. 그 뿔은 하는 일마다 형통하였고,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
요한은 분명 이 두번째 짐승을 다니엘서 8장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또한 다니엘서 2~7장까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지만, 8장부터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땅과 그 땅에 거주하는 이들을 행합니다, 첫번째 짐승을 경배하기 위해서, 그 첫번째 짐승의 죽음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표적들을 행합니다, 즉 불도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사람들 앞에 내려오게 행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 앞에서 행하도록 그에게 주어졌던 표적들을 통해서 땅에 거주하는 이들을 그릇되게 합니다, 말하길,
두번째 짐승은 전지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의 목적은 첫번째 짐승을 경배하기 위함이요, 경배의 근거는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부와 명예가 건재하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짐승은 이제는 엘리야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땅에 불을 가져오는 것은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의 표적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앞서 두 증인 중 한 명을 상징했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 짐승들이 두 증인을 패러디 하고 있음이 분명해지는데, 이들이 패러디하고 있는 표적은 땅에 거주하는 이들을 어그러진 길로 이끄는 결과를 낳습니다. 상대적 하나를 절대적 하나인양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그 짐승에게 아이콘을 만들어 주라고 말합니다, 큰 상처를 가진, 그리고 살았던 (그 짐승에게).
두번째 짐승은 또한 거짓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주었던,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던 아론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십자가 이후에도 건재한(것처럼 보이는) 붉은 용을 위해 아이콘, 즉 우상을 만들어 주라고 합니다.
이처럼 두 개의 짐승을 우상화하고, 인류 전체를 어그러진 길로 인도하는 경우를 여로보암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2:26~28
그런데 여로보암의 마음에, 잘못하면 왕국이 다시 다윗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올라갔다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옛 주인인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면, 그들이 자기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은 궁리를 한 끝에, 금송아지 상 두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
그리고 그에게 그 짐승의 아이콘에 숨결을 주도록 주어졌습니다, 즉 짐승의 아이콘이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아이콘에게 경배하지 않는 누구든 죽게 만듭니다.
둘째 짐승은 어린양의 뿔을 달고, 엘리야의 표적을 따라한 것을 넘어 이제 하나님을 흉내내어 그 아이콘에 '숨결'을 주어 죽은 아이콘을 살려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짐승의 숨결에 따라 사람들이 붉은 용을 위해 만든 아이콘은 마치 인격이 있는양 말을 하고, 그 부활한 붉은 용을 경배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모두에게 행합니다, 즉 작은 사람들과 큰 사람들, 넘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자유인들과 종들에게 (행합니다), 표를 그들의 오른손이나 그들의 미간에 주기 위함이고, 누구든 사거나 팔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표 곧 짐승의 이름, 그 이름의 수를 갖지 않으면.
이어지는 구절은 두번째 짐승이, 어찌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지에 대한 부연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영향력은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넘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그 영향력은 표로서 드러납니다. 그들 모두의 오른손이나 미간에 표를 주려고 하고, 만일 그 표를 갖지 않으면 사거나 팔 수 없게 됩니다. 표라는 말은 '카랑마'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서 '캐릭터'가 왔습니다. 이 표를 주려는 행위는 출애굽기 13:9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출애굽기 13:9
이 예식으로,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와 같이,
당신들이 주님의 법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 미간과 오른손에 토라가 주어졌으나, 사탄의 삼자일체 안에 순응한 이들은 표가 주어집니다. 그 표는 짐승의 이름입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누스'가진 이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볼지라, 즉 인간에 속한 수를. 그리고 그의 수 육백 육십 육.
요한은 환상에 대한 묘사를 갑자기 멈추고, 여기에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누스'는 지적 통찰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요한은 이 계시록 13장 후반부의 환상을 줄곧 다니엘 8장의 맥락에서 생각해왔고, 그 8장에서 풀리지 않았던 것이, 이제 풀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듯 합니다.
다니엘 8:23~27
그들의 통치가 종말에 이를 때에, 그들의 죄악이 극도에 이를 때에, 뻔뻔스런 임금, 흉계에 능숙한 임금이 일어날 것이다. 그는 힘이 점점 세어질 터인데, 그 힘은 제 힘이 아니다. 그가 놀라운 힘으로 파괴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며, 강한 사람과 거룩한 백성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는 음흉하여서 매사에 속이는 데 능숙하고, 마음이 방자하여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을 많이 죽이며,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아도, 그는 끝내 망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설명한 아침과 저녁 제사 환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직 멀었으니, 너는 환상의 비밀을 잘 간직해 두어라. 그 때에 나 다니엘은 몹시 지쳐서, 여러 날 동안을 앓았다. 얼마 뒤에 일어나서, 왕이 맡긴 일을 계속하였으나, 내가 본 그 환상 때문에 나는 몹시 놀랐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니엘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이, 이 짐승의 숫자에 이르러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니엘 8장은 아람어로 기록되었던 다니엘서가 갑자기 히브리어로 전환되는 장입니다. 아람어가 당시 세계 공통어였다면, 히브리어는 이스라엘만 사용하던 언어였습니다. 이 맥락 위에서 육백 육십 육이라는 숫자는, 히브리어 게마트리아로 이해됩니다. 우리에게는 아라비아 숫자가 익숙하지만, 아라비아 숫자가 이렇게 통용되지 않았을 때는, 자신들의 문자로 숫자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수비학, 게마트리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게마트리아로 육백 육십 육은 네로 황제를 지칭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네로 황제 개인만을 가리켰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당시 기독교를 핍박하던 네로라는 인물을 비밀스럽게 내세운 것은, 사탄적 삼자일체를 가리키기 위함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인간화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인 무수한 7의 향연 속에, 오직 세번의 6은 여기서만 등장합니다. 완전의 7과는 대비되는, 그 한계가 분명한 인간적인 것. 그 인간을 짜먹고 이용해서, 스스로 절대의 하나가 되어보겠다는 악의 실체에 대한 폭로입니다.
요한계시록 13:11~18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다른 짐승을, 그리고 그것은 어린양과 비슷하게 두 뿔들을 가지고 있고, 용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짐승의 모든 엑수시아를 그 앞에서 행합니다. 그리고 땅과 그 땅에 거주하는 이들을 행합니다, 첫번째 짐승을 경배하기 위해서, 그 첫번째 짐승의 죽음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표적들을 행합니다, 즉 불도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사람들 앞에 내려오게 행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 앞에서 행하도록 그에게 주어졌던 표적들을 통해서 땅에 거주하는 이들을 그릇되게 합니다, 말하길, "땅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그 짐승에게 아이콘을 만들어주라고 말합니다, 큰 상처를 가진, 그리고 살았던 (그 짐승에게). 그리고 그에게 그 짐승의 아이콘에 숨결을 주도록 주어졌습니다, 즉 짐승의 아이콘이 말도하고 그 짐승의 아이콘에게 경배하지 않는 누구든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모두에게 행합니다, 즉 작은 사람들과 큰 사람들, 넘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자유인들과 종들에게 (행합니다), 표를 그들의 오른손이나 그들의 미간에 주기 위함이고, 누구든 사거나 팔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표 곧 짐승의 이름, 그 이름의 수를 갖지 않으면.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누스'가진 이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볼지라, 즉 인간에 속한 수를. 그리고 그의 수 육백 육십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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