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요한계시록 11:1~15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처럼 보이는 갈대가 주어졌습니다, 말씀하시길,
처음에 이 "지팡이처럼 보이는 갈대"를 접할 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뒤에 가서야 알게 되었는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리 될 것입니다. 다시 보니 이 지팡이처럼 보이는 갈대가 '요한'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또한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지팡이처럼 보이는 갈대"가 요한에게 주어졌을 때 들렸던 소리를 살펴봅시다. 아마도 이 도구에 대한 사용설명서인 것 같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측량하라 그리고 제단과 그 안의 예배자들도 (측량하라). 그리고 성전의 바깥 마당은 밖으로 던져라 그리고 그것은 측량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성전의 바깥 마당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이 거룩한 도시를 42개월동안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구를 받은 이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을 측량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은 받아든 "지팡이처럼 보이는 막대기"로 하나님의 성전의 경계를 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바깥 마당은 밖으로 던져라"는 문장에서 해석이 둘로 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성전 안에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사람들일 것이라고(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을 보듯) 생각했습니다. 즉 성전 종사자로서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성전은 곧 메시아 자신이고(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바깥 마당 역시 성전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바깥 마당에 대한 언급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이방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도 그것은 성전을 무너뜨릴만한 공격이 될 수 없고 기껏해야 바깥마당만 그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마치 창세기 3:15처럼 사탄은 공격하지만 메시아의 발꿈치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더불어 그 상한 발꿈치 역시 메시아의 몸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건재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분명히 고난을 받습니다. 성전이신 메시아의 삶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이 성전 측량의 인유는 에스겔 40~48장입니다.
에스겔 40:17~20
그런 다음에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바깥 뜰로 들어갔는데, 그 바깥 뜰에는 사방으로 행랑방들이 있고, 길에는 돌을 깔아 놓았는데, 그 돌이 깔린 길을 따라, 서른 채의 행랑이 붙어 있었다. 그 돌이 깔린 길은 대문들의 옆에까지 이르렀고, 그 길이는 문들의 길이와 같았다. 그것은 아래쪽의 길이었다. 또 그가 아랫문의 안쪽 정면에서부터 안뜰의 바깥 정면에 이르기까지의 너비를 재니, 백 자가 되었다. 이 길이는 동쪽과 북쪽이 같았다. 또 그 사람이 나를 바깥 뜰에 붙은 북쪽으로 난 문으로 데리고 가서, 그 문의 길이와 너비를 재었다.
에스겔에게도 바깥 마당은 측량의 대상, 즉 성전 '안' 이었습니다. 바깥이라는 말은 성전 안의 바깥이지, 성전 바깥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바깥성전은 '핍박받는 성전'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전의 바깥 마당이 짓밟히는 기간은 1260일입니다. 즉 이 기간은 메시아 자신과 그의 몸인 에클레시아가 핍박받는 기간입니다. 이 1260일을 해(年)으로 계산하면 3년 반이고, 이는 앞에 나왔던 "한 때, 두 때, 반 때(세 때 반)"와 같은 기간입니다. 메시아의 공생애 기간도 3년 반이었고,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 예언한 기간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 기간을 개월로 바꾸면 42개월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여정 동안 이스라엘은 총 마흔 두번 진을 쳤고(민수기 33장),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인유는 인자의 승천 장면이 기록된 다니엘 7장입니다.
다니엘 7:25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
신실하지 않은 이들에 의해, 신실한 에클레시아가 핍박을 받는 기간입니다. 곧 메시아의 초림부터 메시아의 재림에 이르는 기간입니다. 이때가 에클레시아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성전을 공격하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인유들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63:18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주님의 성소를 잠시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짓밟습니다.
다니엘 8:13,14
내가 들으니, 어떤 거룩한 천사가 말하는데, 또 다른 거룩한 천사가 먼저 말한 그 거룩한 천사에게 물었다. "환상 속에서 본 이 일들이 언제까지나 계속될까?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매일 드리는 제사가 폐지되고, 파멸을 불러올 반역이 자행되고, 성소를 빼앗기고, 백성이 짓밟힐까?" 다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다. "밤낮 이천삼백 일이 지나야 성소가 깨끗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두 증인들에게 줄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천 이백 육십일동안 예언할 것이다, 굵은 베옷을 입고서. 그들은 그 두 올리브 나무, 그 두 금 촛대다(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둘'이란 숫자는 증인의 숫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세사람"은 토라에 대해 증언하고, 그 지킴의 여부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최소 단위입니다.
민수기 35:30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증인들이 있어야 한다. 오직 한 증인의 증언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
신명기 17:6
그런데 사람을 죽일 때에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죽일 수 없으며,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두' 증인은, 성전을 짓밟는 이들의 비뚤어짐을 입증할 자격을 갖춘 이들입니다. 이들은 메시아의 초림부터 재림 사이(즉 "한 때 두 때 반 때"), 성전의 바깥마당이 공격받는 기간동안 활동합니다.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예언'입니다. 이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차려입었던 것처럼, 이들은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큰 슬픔을 예언하는 이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그 두 올리브 나무"와 "그 두 금 촛대"로 언급되는데, 앞에 "그"가 붙은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올리브 나무와 금 촛대이기 때문입니다. 올리브 나무와 금 촛대 모두 스가랴의 인유입니다. 금 촛대의 경우, 우리가 인자 환상을 다룰 때 이미 살펴봤습니다.
스가랴 4:11~14
나는 그 천사에게 물었다.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는 무엇을 뜻합니까?"
나는 또 그에게 물었다.
"기름 담긴 그릇에서 등잔으로 금빛 기름을 스며들게 하는 금대롱 두 개가 있고, 그 옆에 올리브 나무 가지가 두 개 있는데, 이 가지 두 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 천사가 나에게,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천사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 천사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와 가지 두 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기름 부어서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 구절 뿐만 아니라 스가랴 전체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계시록 11장의 문맥과 맞아 떨어집니다. 스가랴 1장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도시 한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 성전에 대한 측량이 이뤄지고, 3장에서는 그 성전 재건을 바라지 않는 사탄에 대한 진술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촛대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위한 올리브 나무요, 금촛대이니 모두 성전에서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성전 안에서 사용되는 이들이니 그들이 "주 앞에 서"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우리가 4,5장에서 보았던 하늘 성전이 아닙니다. 여기는 짓밟히는 성전이 있는 '땅'입니다. 즉 땅에도 성전이 있고, 주님은 땅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금 촛대와 올리브 나무를 통해 우리는 하늘과 땅이 성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부당함으로 가득한 이 땅도 하나님의 성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그들을 부당하게 하고자 하면, 불이 그들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의 그 적들을 삼킨다. 그리고 만일 누가 그들을 부당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와 같이 틀림없이 그가 죽임 당한다.
두 증인에 대한 진술이 이어집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하면, 그들은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앞에서 토라를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증인을 언급하기 위해 인유되었던 신명기 문맥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신명기 19:21
당신들은 이런 일에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으십시오."
그리고 이 두 증인의 입에서는 불이 나옵니다. 이 불은 곧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5:14
"그들이 그런 말을 하였으니, 보아라, 내가 너의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은 장작이 되게 하겠다. 불이 장작을 모두 태울 것이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점점 이 두 증인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함이 더해가는 가운데, 이제 결정적인 힌트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늘을 닫는 엑수시아를 행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예언하는 날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들은 물들에 대해서도 그 물들이 피로 돌아서고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칠 엑수시아를 행사한다,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두 증인은 하늘을 닫고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했던 예언입니다. 그리고 뒤에 물을 피로 바꾸는 것은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즉 이 두 증인은 변화산에서 예수와 함께 나타났던 그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토라를, 한 사람은 예언서를 대표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는 갈대가, 모세가 파라오 앞에 나서는 장면에서는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즉 계시록 11장에서 요한이 받은 "지팡이같이 보이는 갈대"는 그가 모세와 엘리야처럼 활동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에클레시아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에클레시아가 두 증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에클레시아 중, 인자의 칭찬을 들었던 에클레시아는 둘이었습니다. 즉 두 증인은 메시아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도록 이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베옷을 입은 슬픔을 가지고) '신실한 에클레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증언을 이룰 때, 구덩이로부터 올라온 짐승은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짐승은 그들을 이길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큰 도시 거리에 그들의 시체(떨어짐)는(숨결로 소돔과 애굽이라 불리는), 거기에서 그들의 주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고 그들은 씨알들과 민족들과 어어들과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의 시체를 사흘 반나절동안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시체들을 무덤에 놓도록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땅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들에 대해 기뻐하며 좋게 표현하고, 그리고 선물들을 서로 보낸다, 왜냐하면 바로 그 두 예언자들이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 에클레시아가 증언을 마칠 때(이룬다는 표현은 끝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집니다. 다니엘 7장의 이야기처럼 짐승들이 바다로부터 올라와 에클레시아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짐승이 이깁니다. 본문의 큰 도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세상 전체입니다. 소돔과 같이 악하고, 이집트처럼 언약백성의 갈 길을 가로막습니다. 비뚤어진 세상 전체에 대한 심판을 슬프게 외치던 에클레시아는 결국 그 세상에서 죽임 당합니다. "땅에 거주하는 이들"의 다시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기뻐하며 좋게 표현합니다. 자신들을 저주하며 심판을 부르짖던 눈에 가시 같았던 이들이 죽었습니다. 두 증인의 죽음을 다행스럽게 여긴 권력자들처럼 그들은 서로 선물을 보내며 이 일을 축하합니다. 자신들이 권력을 잃어버릴 일이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주께서도 바로 '거기서', 즉 악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부터 시작되는 전복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반나절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산 숨결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그들의 두 발로 섰고, 그리고 큰 공포가 그들을 보는 이들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말하는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곳으로 올라오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예수와 그를 따르는 에클레시아의 같은 운명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임당한 에클레시아는 사흘 반나절 후에, 그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가 마른뼈가 일어나는 장면으로 잘 알고 있는 에스겔 37장 인유가 쓰입니다.
에스겔 37:5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땅의 사람들에 의해 죽임당해 마른뼈처럼 소망없던 두 증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다시 살아납니다. '예언-죽임당함-부활'의 삶이 그대로 에클레시아에 재연됩니다. 자신들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일어난 에클레시아를 보며 세상은 경악합니다.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이제 '승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름으로 그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의 적들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큰 지진이, 그리고 도시의 1/10이 떨어졌고, 그리고 그 지진으로 이름들에 있어서 칠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이 공포에 빠지게 되었고 뚜렷을 하늘의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승천은 휴거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 땅을 버리고 하늘로 도망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승천은 "하늘에 오름"이요, 이 오름은 우리가 "왕위에 등극했다"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서 인정받아, 하늘에 있는 왕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다는 말조차, 이 땅과 무관한 차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세계는 하늘과 땅이 겹쳐있는 차원입니다. 우리는 땅에 있지만 동시에 하늘에도 있습니다. 하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비로소 하늘의 뜻 따라 이 땅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승천의 바른 의미가 계시록에서도 옳게 적용됩니다. 에클레시아는 이 땅을 다스리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하늘과 땅을 잇습니다.
그리고 이 두 증인의 승천 장면과 비슷하게 요한이 하늘에 올랐던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1~6a
장면이 바뀌고, 나는 하늘에 있는 열려 있는 문을 보았고, 내 뒤에서 말하던 나팔같이 들렸던 처음 소리가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이 일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을 보여주리라."
메시아와 요한, 그리고 에클레시아가 비슷한 사건을 겪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계신 하늘을 경험하고, 그 하늘을 땅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다시 살아난 두 증인은 에스겔 37장의 인유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38장으로 넘어가면 큰 지진이 등장합니다. 계시록도 마찬가지로 두 증인의 부활 이후 큰 지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지진에 대한 반응인 "큰 공포"에 대해서 제가 참고하고 있는 두 주석자의 해석이 갈렸습니다. 그레고리 빌은 여기서 말하는 "공포와 하나님께 영광돌림"이 진실한 회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예로 출애굽기 15:16과 시편 105:38을 듭니다. 또 느부갓네살 역시 다니엘이 꿈을 해몽해준 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곧장 우상을 세웠다고 언급합니다. 반면 톰 라이트는 재앙으로도 이루지 못한 것을,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죽고 사는 에클레시아를 통해 이뤄졌다고 말합니다. "재앙이 실패한 그곳에서 에클레시아의 순교적 증언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열방이 와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의 메시아의 나라가 될 것이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일곱 나팔의 마지막 본문을 확인한 뒤에 생각해봅시다.
이 큰 지진으로 큰 도시, 타락한 인간계의 1/10이 떨어집니다. 떨어진다는 말은 (말 그대로) '타락(墮落)', '죽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10은 '전체에 임할 시작'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지진으로 7000명이 죽게 됩니다. 이 7000이라는 숫자 역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엘리야의 숫자이지요.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 아래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 자기 하나 밖에 없다고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7000의 숫자를 준비해두셨다고 했습니다. 이 7000은 완전수 7에 많음을 나타내는 1000의 곱입니다. 즉 신실한 사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이 시작된 계시록 본문에서는 이 7000이 정반대로 쓰입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숫자가 아니라, 남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숫자가 됩니다.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이 전세 역전이 일곱 실 이야기과 일곱 나팔 이야기에서는 서로 달리 표현된 거 같습니다. 일곱 인 심판에서는 "도살당하는 이들의 충분한 숫자가 차기"를 기다리는 기간, 그리고 이렇게 에클레시아가 '도살'당하는 기간은, 이 큰 도시가 자신들의 비뚤어짐으로 인해 더욱 멸망으로 곤두박질치는 시기입니다(마치 창세기 15:16처럼).
두번째 화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세번째 화가 속히 옵니다.
이제 우리는 8장부터 봤었던 일곱 나팔 심판의 끝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11:1~15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처럼 보이는 갈대가 주어졌습니다, 말씀하시길,
"일어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측량하라 그리고 제단과 그 안의 예배자들도 (측량하라). 그리고 성전의 바깥 마당은 밖으로 던져라 그리고 그것은 측량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성전의 바깥 마당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이 거룩한 도시를 42개월동안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두 증인들에게 줄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천 이백 육십일동안 예언할 것이다, 굵은 베옷을 입고서. 그들은 그 두 올리브 나무, 그 두 금 촛대다(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그리고 만일 누가 그들을 부당하게 하고자 하면, 불이 그들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의 그 적들을 삼킨다. 그리고 만일 누가 그들을 부당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와 같이 틀림없이 그가 죽임 당한다. 그들은 하늘을 닫는 엑수시아를 행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예언하는 날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들은 물들에 대해서도 그 물들이 피로 돌아서고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칠 엑수시아를 행사한다,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증언을 이룰 때, 구덩이로부터 올라온 짐승은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짐승은 그들을 이길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큰 도시 거리에 그들의 시체(떨어짐)는(숨결로 소돔과 애굽이라 불리는), 거기에서 그들의 주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고 그들은 씨알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의 시체를 사흘 반나절동안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시체들을 무덤에 놓도록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땅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들에 대해 기뻐하며 좋게 표현하고, 그리고 선물들을 서로 보낸다, 왜냐하면 바로 그 두 예언자들이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반나절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산 숨결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그들의 두 발로 섰고, 그리고 큰 공포가 그들을 보는 이들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말하는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곳으로 올라오라!"
그리고 그들은 구름으로 그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의 적들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큰 지진이, 그리고 도시의 1/10이 떨어졌고, 그리고 그 지진으로 이름들에 있어서 칠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이 공포에 빠지게 되었고 뚜렷을 하늘의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두번째 화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세번째 화가 속히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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