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1. 말씀대로, 마하나임, 그러나 걱정되는 발걸음


  그 '복 사건' 이후, 야곱이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 밑으로 도망간지도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1:3
"너는 네 조상의 땅, 너의 친족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고향인,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일단 발걸음을 돌리고 나니 천사들이 돌연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은 두 패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을 본 야곱은 그곳을 '두 군대'라는 뜻의 "마하나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고, 천사 군대들도 보았음에도 야곱은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이제 큰 부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에서가 마음만 먹으면 야곱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약탈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부터 집어먹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심부름꾼을 에서에게 보내 '한 번만 봐달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심부름꾼들이 가져다준 소식은 참담했습니다. 그들은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죽이러 온다'고 야곱에게 전했습니다.

  야곱은 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과 종들, 그리고 가축들을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마치 마하나임처럼). 혹여나 한 쪽이 죽으면 다른 한 쪽은 달아날 셈이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큰 결심을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손이 벌벌 떨리고, 앞으로 가는 발걸음이 주저되었습니다. 마음이 갑갑했던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창세기 32:9~12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고향 친족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이 요단 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부디, 제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너의 씨가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기도한 뒤, 더이상 갈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하루 묵기로 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잠을 청하려고 하지만 잠이 오질 않습니다. 일단 형에게 줄 선물을 골라 봤습니다. 얼마나 야곱이 걱정했는지, 그 선물의 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염소 200마리, 암염소만 있으면 안되니까 수염소도 20마리. 염소만 주긴 뭐하니까 양도 얌놈 200에 수놈 20마리. 암낙타 30마리, 그리고 그 암낙타가 낳았던 새끼들 전부,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예전에 현대 정주영 회장이 굶주리는 북한에 소떼를 보내준 적이 있는데, 그때 1001마리를 보냈습니다. 새끼를 밴 소들로 보냈으니, 실제로는 1000마리도 훨씬 넘는 숫자였습니다. 차에 소들을 실어서 북으로 보내는 장면을 방송에서 보여줬는데,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에 절반 정도되는 수의 가축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흥정하고 꼼수부리는 야곱은 이번에도 여전합니다. 이 선물들을 한 번에 보내지 않고 나누어 보냅니다. 500여 마리를 한 줄로 길게, 또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자기 자신은 맨 뒤에서 갑니다. 만약 에서가 선물을 받지 않고 죽이거나 하면, 그땐 잽사게 줄행랑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일단 선물은 보내놓습니다. 얼마나 줄이 긴지 보내놓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선 자려고 누웠습니다. 그런데 잠이 안와요. 다시 일어나서 요단강 줄기에서 나온 얕은 강 얍복을 건넜습니다.


2. 씨름, 복과 이름의 관계


  일단 식구들, 종들, 가축들을 일단 먼저 다 건너게 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홀로남은 야곱을 누가 붙들더니 대뜸 씨름을 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가 힘을 주니, 야곱도 물러설 수 없어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족도, 종들도, 재산들도 모두 떠난 홀로 남은 자리에서 야곱은 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이와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밤이 새도록 말입니다.

  야곱이 힘없이 무너질 것 같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온 야곱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자 야곱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누군가는 야곱의 엉덩이 뼈를 세게 쳤습니다. 그래서 엉덩이 뼈가 나갔습니다. 그런데 끔찍하게 아팠을텐데도 야곱은 손아귀에서 힘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제 해가 떠오르니 그만 놓으시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입에서 "복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절대 못 놓습니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구와 씨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야곱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복 때문에 엉덩이 뼈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 사람, 야곱에게 새 이름을 지어줍니다.

창세기 32: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지 시점에 멈추어 천천히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은 복을 원했습니다. 물론 이 복은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입에 으레 오르내리는 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나오는 바로 그 복입니다. 그런데 '복'을 원한 야곱이 받은 것은 이상하게도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씨름 이후에도 야곱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지만, 이름을 받고난 뒤 야곱의 태도는 180도 달라집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름이 바뀌어야 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야곱이 받은 이름은 그 복 안으로 들어가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일종의 자격,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달아야 하는 이름표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그 특별한 일이란, '이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이기고, 사람도 이깁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힘을 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도 힘을 내고, 사람에게도 힘을 내야 합니다. 힘낸다는 것은 저쪽에서 관두자 할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복이란,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그저 가나안 땅뙈기가 아니라, 새롭게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땅보다 먼저 시간을 받았습니다. 바로 오는시대입니다.


  2) 그리고 그 오는 시대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바라며 사는 동지들을 얻었습니다. 바로 에클레시아입니다. 비뚤어짐을 이기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새롭게 다스리려고 하십니다.


  3)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복과 저주의 기준입니다. 기름이 부어진 야곱의 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름이 부어진 그 돌이 곧 복이요, 그 돌을 거절하면 저주입니다. 곧 숨님받아 사는 사람들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1), 2), 3) 모두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이긴다고 하면 무언가 낯설게 들립니다. 하나님은 절대 지지 않는 분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십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지십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지시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서 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복을 얻겠다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절하게, 철저하게 져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복을 얻고자 하는 이를 위해 철저히 져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러한 본문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2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는 침략당하고 있다.
그래서 힘내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하나님을 이기고, 사람도 이겨야 합니다. 저쪽에서 포기하자 할 떄까지, 복을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심지어 져주기까지 하시면서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더욱 더 오는시대, 더욱 더 에클레시아, 더욱 더 성령. 더욱 더 그리 하려는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얻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지심은 곧 우리를 낳으심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신 날, 이스라엘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릅니다. 마치 메시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져주신 그 날에, 우리는 에클레시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바로 그 순간부터 현시대의 어둠이 저물고, 오는시대의 해가 동튼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져주셨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 져주셨고, 그 져주시는 방법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은 탄생합니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엉덩이 뼈가 어긋나서 이제 앞으로 평생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는 새 이름을 얻었고, 마침내 복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그의 '신실한' 자손들, 곧 열 두 지파들을 통해 이뤄질 것이고, 그들이 결국 땅을 얻을 것이며,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긴 그곳에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자신을 위해 져주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던 그 자리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만나는 바로 그 얼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시려고 우리에게 져주셨을 때, 우리와 하나님이 그렇게 연결될 때, 현시대의 우두머리는 머리가 박살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절 속에서, 이 새로운 사람 이스라엘은, 새롭게 살아갑니다.

  아, 야곱 이야기의 나머지를 살펴봅시다. 이제껏 뒤로 물러나있던 야곱은 다리를 절둑거리며 무리의 가장 선두로 나섭니다. 제대로 걸을 수 없으니 줄행랑도 다 쳤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이제 야곱은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복 안으로 들어온 것이 확실하고, 그 복을 주신 분은 창조주이십니다.


4. 이스라엘의 한 걸음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서 에서가 보입니다. 야곱은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사죄의 의미로 일곱번 절했습니다. 그러자 걱정과는 달리, 소식을 전해준 거짓말쟁이들의 말과는 달리, 에서는 달려와서 이스라엘을 끌어안았습니다. 그 둘은 함께 울며, 20년간 서로 멀리했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다시 만난 기쁨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복과 저주의 기준답게, 그는 화해의 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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