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야곱은 왜 떠났을까?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화로운 집안이 이 '복 사건'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형은 성내며 동생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고, 동생은 이제 형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이 든 아버지는 무력하게도 힘도 없이, 이 쪼개지는 가정을 그저 바라봐야만 합니다. 이삭은 최후의 방법을 쓰고자 합니다. 야곱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는 것입니다. '이삭'이란 이름은 '웃음'이란 뜻인데, 전혀 웃을 수 없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그는 야곱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기 28:1,2
이삭이 야곱을 불러 복을 빌어 주며 당부했습니다.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마라.
밧단아람에 계신 네 외할아버지 브두엘의 집으로 가거라.
네 외삼촌인 라반도 거기에 사신다.
라반의 딸들 가운데서 한 여자를 골라 그 여자와 결혼하여라.
이삭은 먼저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왜 일까요? 지금 이삭 가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습니다('맹세의 우물'이란 의미의 브엘세바라는 곳인데, 창세기 21장에 아비멜렉 무리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우물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약속해주신 것들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면, 그 약속이 흐려질까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그 약속은 이 사람들을 통해 뚜렷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명없더라고도, 이 아브라함 집안은 이것으로 삽니다. 결혼 마저도 이 일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내놓은 대안은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럼 두 가지가 좋습니다. 일단 동생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려고 하는 형에게서 야곱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자신의 부인인 리브가의 오빠가 살고 있으니, 가나안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사람 중에서 결혼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후서가 보여주는 그대로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6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이 어떻게 짝이 될 수 있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와 벨리알이 어떻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며,
신실한 사람과 신실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고 그들 중에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약속을 이어받은 신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바로보는 시각이 다르고, 어려움이라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니 어찌 한 배에 탈 수 있으며, 하나됨을 이루겠습니까? 그리고 신실한 사람과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 짝이 될 수 없다는 말 뒤에 '하나님의 성전'이 언급되는데, 이는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야곱 이야기와 데칼코마니처럼 맞아 떨어집니다. 뒤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1. 그 언약 때문에
그리고 이삭은 다시금 그 중요한 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창세기 28:3,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에게 많은 자녀를 주셔서,
네가 많은 백성의 조상이 되기를 원한다.
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너와 네 자손에게도 주셔서,
지금 네가 나그네처럼 살고 있는 이 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을 차지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여러분은 이삭이 재차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은 써있는대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타락을 뒤집는 하나님의 방법, 해결책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하나님의 이 언약입니다. 이삭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결국에는,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으로 이어지는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찌 이루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치면,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에서 말하는 '자녀'와 '자손'은 핏줄로 연결된, 성 씨가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신실함'으로만 연결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 '에클레시아'가 무슨 뜻인지 배웠습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은 '신실함'으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오직 신실함으로 야곱과 연결됩니다. 이삭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해결책 이스라엘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신실함 뿐입니다.
그렇다면 신실함은 무엇입니까? 메시아 예수를 따름입니다. 숨님을 누가 받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 숨님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압니다. 숨님을 받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오순절날 숨님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숨 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녀, 자손은 메시아 예수를 따르고, 숨님으로 숨 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은 곧 우리와 하신 약속이 됩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반드시 얻게 될 땅이란, 땅구슬 한 귀퉁이를 말하는는 게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하나님이 그 땅 주고자 지금까지 역사를 주관해왔다 생각하면, 그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려는 땅은, 전체입니다. 그것도 새로워진 전체입니다. 성경은 이 약속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유업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를 따르고, 성령으로 토라를 이루는 사람들이, 메시아와 함께 다스릴 땅입니다.
그렇다면 '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따를 그이, 우리에게 숨을 주시는 그이, 그이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이상 우리가 무엇을 바라리요! 예수 그이를 얻었다면, 땅 속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신의 전부를 팔아 내어놓습니다. 그걸 받은 주인은, 우리가 내놓은 것을 새롭게 해서, 다시 우리 손에 맡겨주십니다. 하나님께 삶을 맡기면, 큰 일날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큰 일 났습니다. 존재의 근거는, 실체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요. 하늘에 기대지 않은 사람은 결국 그 서 있는 토대가 부서지고 허물어질 것입니다. 반석 아닌 데에 기댄 결과는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참할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복이 어떻게 이뤄질지에 대해서 세세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이 복의 수여자가 되고, 또 다시 이 복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했습니다. 보내는 이삭이나, 피신하는 야곱이나, 둘 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복. 야곱의 동기가 어찌되었든, 이제 야곱은 그 복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장은 그 복 때문에 인생을 망친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그 복과, 그 복을 누리는 사람들(자손)과, 삶의 터전(땅). 야곱은 이제 그 약속 떄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출애굽합니다.
2. 후회해도 소용없는 사람
그러나 이러는 와중에 우리의 에서는, 또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고 있습니다. 이미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뜻을 거스르고서 가나안 사람과 결혼을 한 상태고,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니라 두 사람의 부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복에 관해서, 그 복을 전달하는 일에 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니까, '지금이라도 아버지 뜻에 따라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큰 아버지인 이스마엘에게 찾아가서, 그 딸들 중에 하나인 마할랏이라는 여자를 또다시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것을 빌미로 아내를 하나 더 얻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실컷과 성냄과 뻔뻔함을 버릴 생각 않고는, 그 복은 알아볼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복입니다. 에서의 이 일이 있고 천년도 넘게 지나고서,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그 에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12:16
또한 성(性)이 비뚤어진 사람이나,
음식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판 에서처럼
숨 잃어버린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알다시피 에서는 후에 복을 상속받고 싶어 눈물로 구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마저 놓치는 미련함이 일상에서 옵니다. 왜 에서는 그 복 앞에서 겸손할 수 없었을까요? 왜 에서는 당장 먹고, 결혼하는 것 말고 더 크고 깊은 것을 생각할 수 없었을까요? 이런 질문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복을 받을 적절한 그릇인지 말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늘 알고 무릎꿇습니다만, 그럼에도 우리의 인격의 그릇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메시아를 담는 인격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메시아는 멜로디입니다. 주 선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멜로디를 돋보이게 하는 화음들입니다. 우리의 불협은 멜로디를 듣기 싫게 만듭니다. 그러나 멜로디에 질서 있게 쌓인 화음들은, 서로 다른 음을 낼 지언정, 그 안에 말그대로 하모니가 있습니다. 주 선율은 그대로이지만, 적절한 화음이 쌓이기 전과 후는, 그 표현의 '풍부함은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께서 '독'생자라는 말은, 주 선율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양자 되었다는 말은, 그 주 선율에 붙는 화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나'로서 태어나게 하신 음을 분명히 내야 합니다. 분명히 내고서, 메시아 옆에 붙어 제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소리가 화음인지 불협인지 늘 귀를 열고 있어야 합니다. 절대의 지휘자가 우리 앞에 계십니다.
야곱은 길을 떠납니다. 결혼하고 싶어서 떠난 거 아닙니다. 사기치다 걸려서 도망가는 것만도 아닙니다. 복 입니다. 야곱의 삶이 고단해진 것은, 복을 얻고자 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팥죽에 독을 탄 것도 아니고, 형을 때리고 죽이려고 했던 것도 아니니, 생각해보면 야곱이 썼던 방법은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것을 보는 것처럼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이거 줄테니까, 너는 이거 줘.' 다만 그가 얻으려고 했던 것이 정말 모든 것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가 고난을 겪는 것은, 그가 얻은 복이 가져오는 자연스러운 결과 아닙니까? 마치 그 복께서 누울 곳도 없이 다니셨던 바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야곱은 이제 하란으로 향합니다. 하란은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지나온 곳입니다. 아브라함 약속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야곱의 발걸음은 가나안을 떠나 다시 아브라함이 힘겹게 걸어왔던 그 길을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잘 먹고 잘 살던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에 대한 동정심에 불타서 누군가를 죽이게 되고, 그로인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듯,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아닌 광야를 40년간 만나듯, 예수께서 공생애가 시작되자 예루살렘이 아닌 (성령의 이끌리심을 따라) 광야로 시험 받으러 가시듯. 야곱은 홀로, 외로이, 허허벌판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무언가를 참되게 얻고자 한다면,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엄마가 싸준 짐 짊어지고서 야곱은 터벅터벅 걸어갔을 것입니다. 한참을 걷다가 '루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하루종일 걸었더니 해는 뉘엿뉘엿지고, 야곱은 밖에서 자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큼직한 돌 하나를 가져다가 머리에 배고서 잠을 청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외로이 잠을 청하는 야곱이 꿈을 꾸었습니다.
3. 야곱의 꿈 : 모든 민족에게 복 주는 돌
그 꿈 속에서 야곱은 사다리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사다리는 땅에 세워진 것인데,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사다리 꼭대기에 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8:13~15
“나는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네가 지금 자고 있는 땅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지며,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리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사다리 꿈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찬찬히 되새겨 봅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나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하나님입니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1) 먼저 땅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땅이 또 무슨 땅인 줄 알고 있지요. 2) 그리고 자손이 나옵입니다. 이 자손들은 땅의 흙만큼이나 많고, 지구촌 곳곳에 동서남북으로 퍼져있는 자손들입니다. 3) 그리고 이 자손들을 통해서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려는 사람들과 모든 시간 속에서 함께 하고, 모든 공간 속에서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곱은 다시 이 땅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설령 야곱이 죽어 이 땅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늘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기 계시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어!"
그러고는 야곱은 자신이 꿈 꾸었던 곳에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문"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자기가 베개로 썼던 돌은 곧게 세워다가, 그 꼭대기부터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이 돌배게 위로부터 흘러 땅을 흥건하게 적셨습니다. 마치 방금 하나님의 약속처처럼, 하나님의 복이 곧게 세워진 야곱의 자손들 위로부터 흐르고 흘러, 땅 위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넘치듯 말입니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이때부터 '벧엘'이 되었습니다. 벧은 '집'이란 뜻이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나중에 '성전'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야곱이 한 말을 들어봅시다.
창세기 28:20~22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여행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하나님을 저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제가 기둥처럼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아직 하나님을 턱하니 믿지 못해고, 불안한 마음에 하나님과 흥정합니다. 형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장자권을 가져왔듯, 하나님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야곱의 형편없는 말 속에서도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성전이 세워집니다. 돌처럼 단단한 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은 하나님 사시는 집이 되고, 그 집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세워진 돌, 하나님의 성전을 아십니까?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했다면 틀렸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심을 알게 하는 그 참 성전, 곧게 세워져 기름 발라진 돌은,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4. 그 돌
여러분이 이 야곱 이야기를 잘 들었다면, 다니엘이 해석한 꿈 이야기도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라는 바벨론 왕에게 꿈을 꾸게 하셨고, 우리의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했는데, 그 꿈이란 이렇습니다.
다니엘 2:30~35
하나님께서 이 비밀을 제게 알려 주신 이유는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 꿈의 뜻을 풀어 드림으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아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왕이시여, 왕은 꿈에서 어떤 커다란 신상을 보셨습니다. 그 신상은 왕 앞에 서 있는데, 크고 번쩍거리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쇠였습니다. 그리고 그 종아리와 발의 반쪽만이 쇠이고, 나머지는 진흙이었습니다.
왕이 신상을 보고 있는데,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이 어디선가 날아와 쇠와 진흙으로 된 신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쇠와 은과 금도 동시에 산산조각이 나서 타작 마당의 겨처럼 작아지더니 바람에 날려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상을 친 돌은 매우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여러분도 풀 수 있겠습니까? 광야 한 복판에서 만나는 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이 그러했듯, 모세도 광야 한 복판에서 출애굽한지 50일째에 돌을 마주했습니다. 그 돌은 '토라'였는데, 그 돌맹이가 자체가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그 돌에 새겨진 의미가, 뜻이 바로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돌은, 그 보이지 않는 의미를 깎인 자신을 통해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파내어 의미를 드러내는 돌이 이후 나타나셨는데, 요한은 그를 가리켜 '말씀'이라 불렀습니다. 그이는 돌로 지은 성전은 모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 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이라 주장했으며, 이 주장은 당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충격적인 사건을 거쳐 입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는데, '아들'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돌'과 같은 발음이었습니다.
야곱이 오늘 보여주듯, 돌이 세워지고, 그 돌에 기름이 부어지며, 그 돌을 통해서 세상에 기름 바다가 됩니다. 기름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 이 암호같은 말씀들이 풀어질 것입니다. 그 돌은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줄로만 알았던 권세를 깨뜨립니다. 그 돌이 매우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덮습니다. 그 돌은 누구십니까? '돌'은 곧 '복'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돌이 변해서 된 큰 산은 무엇입니까? 그 산은 온 땅을 어찌 덮습니까? 저 예언은 어찌 이루어졌습니까? 이 예언 앞에선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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