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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고린도전서 15:12~19
부활이 없다고 가정해보라


    그런데 만일 메시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다시 일으키졌기 때문에 선언(케뤽쏘)되셨다면, 어찌 여러분 안에서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 말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만일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면, 메시아도 일어나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메시아께서 일어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케리그마도 비었고, 우리의 신실함도 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거짓 증언자들로 알려집니다, 그 하나님이 메시아를 일으키셨다고 증언했기 때문인데, 만일 죽은 이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메시아는 죽은 이들 가운데 일어난 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메시아가 일어나지 않으셨으면, 여러분의 신실함은 목적 없고, 여러분의 비뚤어짐도 여전합니다. 게다가 메시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삶에서만 메시아 안에서 소망하는 이들이 될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주어'는 중요합니다. 주어를 넣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판사님의 판결이 달라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B1의 첫 문장에서, 우리가 '부활했다'라는 술어에 잘 쓰지 않는 주어를 발견합니다. 바로 '메시아'입니다. 저 역시도 부활에 대해서 얘기할 때,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하지, '메시아'가 부활했다고는 잘 안해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주어로 '메시아'를 씁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라는 '개인'에 대해서, '초자연적 사실'로서 부활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성경>은 부활에 대해서 특별한 개인이 이룬 기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현시대와 오는시대의 시간관 위에서, 악에 대한 처벌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 인간의 드러남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메시아가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 거대한 이야기의 이룸에 대한 진술이 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고 말하면, 오는시대가 오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의 왕이 처벌받고, 이제 세상의 진정한 왕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인 '복음'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지도 않은 오는시대를 살기 위한 신실함도 가치 없어지고, 메시아의 왕위 등극 소식을 전한 이들은 거짓 증언을 한 꼴이 되어 십계명(토라)을 위반하게 됩니다. 이미 메시아에 대한 신실함 때문에 죽임 당한 사람들도 개죽음이 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큰 일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수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으로만 부활을 이해하고,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아'의 의미로 부활을 거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해주어야 할 사실은, 메시아의 부활입니다. 성경 전체 이야기의 맥락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과 고증, 또한 그 이야기 안에서 살아내는 삶으로서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첫 줄, "메시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다시 일으키졌기 때문에 선언(케뤽쏘)되셨다면"을 봅시다. '일으켜졌다'는 말은 수동태이고, 행위의 주체로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언'이라 번역한 말은 '케뤽소'인데, 여기서 '케리그마'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케릭(선언된)+마(것)'('거저 받은 것'이라는 '카리스.마'와도 결합방식이 동일합니다.). 1장에서 우리는 케리그마가 개역성경에서 '전도'라 번역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꼐서 하신 그 일으키심으로, 메시아로 선언되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전도요, 본문의 선언입니다.

  또한 저 첫줄의 문장은, '예수께서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이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그것이 현시대의 악한 압제자를 파멸시킨 사건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명을 달리했던 무수한 유대 지도자들과 같은 비극적 운명을 맞은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뒤 벌어진 부활이 모든 생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죽었던 한 사람이 진정 메시아였고, 그로 인해 오는시대가 현시대로 돌입했다는 인식은 부활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사고방식의 전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사고 방식의 전복'이라는 측면을 더 생각해보면, '예수께서 부활로 그가 참 메시아라는 사실이 선언되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부활로 선언이 되었기 때문에 메시아가 '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선언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2. 고린도전서 15:20~28
두 단계의 부활 : 단독부활 ~ 단체부활
 
  그러나 실제로 메시아는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로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왔으므로,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고, 메시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들여다 봅시다. 먼저는 '메시아'입니다. '예수가 살아나셨다'와 '메시아가 살아나셨다'는 같은 사건에 대한 진술이지만,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가 살아났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개인에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살아나셨다'라고 하면, '메시아'라는 고유명사가 어떤 뜻인지 알고자 할 것입니다. 이 '메시아'라는 말은 현시대와 오는시대로 이루어진 인류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아의 역할은 1) 악한 압제자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과 2)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이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 일을 통해 현시대의 끝장과 오는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살아나셨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나시기 전에도 이스라엘은 '메시아'라는 말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부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부활이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종말론을 정리한 그림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현시대와 오는시대를 알고 있었으나, 그 그림은 현실을 왜곡시키는 단편적인 그림이었습니다. 현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오는시대가 오는 것도 맞고, 그 사이에 메시아가 나타나 악한 압제자를 파멸시키고, 성전을 깨끗게 하는 출애굽 내러티브도 옳은 말이지만, 그들이 가진 그림은 참되게 인(仁)을 추구하는 하나님 씨알의 사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는 의견이 있어서 정리해봅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숨에 속함'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14장에서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고든피는 주장하기를, ㄱ)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부활이 두 단계가 한 단계로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고, ㄴ) 하나님의 숨결을 이미 경험한 자신들은 이미 완성된 실존에 이르렀다고 여겼기 때문에, ㄷ) 또 다른 부활이 불필요하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를 영/육 이원론에 근거해서 추론하던 기존 관점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두 단계를 통해 이뤄지는 부활에 대해서 바울이 역설하는 본문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B2 단락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염두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 단락의 중심 내용인 두 단계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메시아요, 다음에는 그이가 나타나실 때 메시아께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이가 모든 다스림과, 모든 권세와 힘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빠 하나님께 바칠 때입니다. 그이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두실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당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 단계 부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 먼저는 메시아 예수의 단독 부활이 이루어졌습니다.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 본래부터 있었고, 예수의 부활은 본래부터 있던 부활을 이룬 첫번째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그리고 '열매'라는 표현은, 뒤에 나올 '씨앗-나무 비유'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2) 그리고 '그이가 나타나시고', 그 때 메시아께 속한 사람들의 단체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즉 이 사건이 벌어지는 시점은 '재림'입니다. 재림은 '파루시아'라는 말을 쓰는데 말의 뜻은 '곁에(파르)' + '있음(우시아)' 입니다. 이 말은 온갖 문제에 신음하고 있는 로마 식민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식민지는 신이라 여겨지는 로마 황제가 식민지를 방문해서, 자신들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때 황제가 식민지를 방문하는 것을 가리켜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주체만 다를 뿐 같은 개념이 '재림'입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아서 온갖 무질서와 불균형을 가져오는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메시아 예수의 다시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주의 날에 모든 것이 바로 잡힐 것입니다.
  '나타남'이라는 말은 재림이 꼭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개념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고 말할 때 '하늘'은 꼭 우리 머리 위에 있는 푸르른 하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푸른 하늘이자, 우주이자, 하나님의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고, '인간의 차원'이란 의미의 '땅'은 언제나 그 하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은, 지구(땅구슬) 전체와 접할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영역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이가 다시 나타나신다는 것은, 그가 베일 뒤에 감추인 자신과 하늘을 한꺼번에 드러내심을 가리키는 표현이 됩니다.

  3) '그의 다시 나타나심'의 날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바울은 익숙한(우리에게도) 성경 이야기를 가져와 풀어놓습니다. 바로 '인자 이야기'입니다. 에덴에서 사람이 이름 붙인 짐승들이 바다로 부터 올라와 오히려 사람을 짓밟고 잡아 먹는 현시대를 배경으로 그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짐승들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고, 짐승들은 심판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짐승들을 심판하시는 이는 그 짐승들의 목숨을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인자가 등장합니다. 인자는 구름을 타고 다니엘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라 칭하는 존재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은 구름을 타고 온 인자에게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이양합니다. 이것이 A.D.1세기 유대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자 이야기입니다.
  이 인자 이야기가 이미 이뤄졌습니다. 바로 메시아 예수의 승천입니다. 인자는 구름을 타고, 모든 땅을 다스리는 참 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인자 이야기를 인용한 문맥은 승천이 아닙니다. 재림입니다. 그리고 인자 이야기와는 다소 다른 내용들이 보입니다. 인자가 나라와 권세를 이양받는 장면이 아니라, 다시 아빠 하나님께(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 돌려드립니다.(이것이 인자가 받았다던 세 가지 중에 '영광'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는 이유입니다. 인자가 받았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장면이 재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자 이야기가 짧은 시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의 승천에서 재림으로 이어지는 낀시대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은 짐승과 싸우는 시절이며, 분명하게 승리가 보장되었기에 낙담할 수 없는, 계시록 12장의 해산한 여자가 광야에서 보내는 3년 반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대결말을 그려내는 시편 110편을 가져옵니다.

  "그이가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 만물을 그 아래에 두신 분은 그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물을 그가 아래 두실 때에는 아들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 아래 두신 분의 아래 두어지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로서 모든 것 안에 계시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오른 인자. 그가 현시대의 모든 나라와 권세를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그렇게 인자를 통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 제자리란 아빠 하나님 발 아래. 만물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반역을 꾀했던 문제 투성이의 식민지는, 본래부터 왕이었던 한 분을 맞습니다.
  바울은 이 "그의 발 아래 두셨다(placed in order)"라는 표현을 재치있게 반복하며 자신의 문장을 구성해 나갑니다. 현시대의 질서가 깨지고, 창조세계의 새질서가 재편됩니다. 영광의 꼭대기에 아빠 하나님이, 그리고 그 아래 아들과 만물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위에도 옆에도 모든 만물과 함께 하심이 드러납니다. 아빠와 아들 사이를 가득 채우시는 숨님을, 아들과 함께 하는 이들도 시원하게 들이마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 발 아래 두셨다' 라는 표현을 이미 확인하고 왔습니다. 우리가 14장 마지막절에서 보았던, "질서대로"라는 말인데, 같은 단어입니다. '탁시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는 군대의 진영을 연상시킵니다. 즉 승리를 목적으로 달려가는 다수의 사람들, 그런데 그들이 견고한 진영을 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영의 꼭대기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마치 약속의 땅으로 전진하는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으로 열 두 지파가 오와 열을 맞추어 질서있게 편성되었듯 말입니다. 광야에 임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광야가 꽃동산이 되는 새창조의 결말이 주의 날에 이뤄집니다.

고린도전서 6:2
성도들이 현시대를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현시대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C. 고린도전서 15:29~34

날마다 죽기 :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죄 짓지 마십시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메시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내가 이 말을 합니다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C로 넘어옵니다. 바울은 B1에서 했던 것과 같이, '부활이 없다면'의 가정을 다시 한 번 사용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가정해보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모두가 "메시아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라는 확신 속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반례 뒤에 '한 가지 해야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1) 먼저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 받는 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직 통일된 의견이 없습니다. 두 가지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을 나중에 부활해서 만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실함을 가졌으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을 때, 다른 신실한 사람들이 대신 세례를 받는 경우를 말한다고 합니다.

2) 그리고 바울은 미래에 단체부활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현시대에서 오는시대를 살기 때문에 받았던 고난은 다 소용이 없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3) 그리고 단체부활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저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 외에 중요한 일이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이사야 22장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벌어지는 대목인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놀자판입니다. 또한 <성경> 외에도 고대 희랍 희곡의 한 소절을 인용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저 지금 누리에 눌러붙는 삶 밖에 모른느 사람은, 주변 사람들 마저도 그러한 삶으로 망치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4) 그래서 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날마다 죽기"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썩지 않는 면류관, 즉 부활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죽이는 삶입니다.(이 '죽기'는 뒤에 '심기'로 이어집니다.) 이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자살이 아니라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고린도 에클레시아에는 하나님께서 모두의 부활을 통해 이루시려는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비웃으며 되묻습니다.


B' 고린도전서 15:34~49

숨에 의해 결정되는 삶과 몸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나며, 그들은 대체 어떤 류의 몸으로 온단 말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의문문은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모든 살이 똑같은 살은 아닙니다. 사람의 살도 있고, 짐승의 살도 있고, 새의 살도 있고, 물고기의 살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뚜렷함과 땅에 속한 몸들의 뚜렷함이 저마다 다릅니다. 해의 뚜렷함이 다르고, 달의 뚜렷함이 다르고, 별들의 뚜렷함이 다릅니다. 별마다 뚜렷함이 다릅니다.


  바울은 '씨앗과 나무'를 빗대어 '부활과 몸'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받지 못합니다." 라는 문장을 보면, 바울이 무엇을 설명하고 싶은지 알 수 있습니다. 씨앗은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씨앗의 죽음 이후 '살아남을 받는 것'은(그저 '살아난다'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살아나게 하시는 한 분을 염두하고 쓴 동사입니다.) '나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겨난 나무들은 각기 고유한 몸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개체는 고유함을 갖습니다. 그 속이든 겉이든 완전히 똑같은 생명체는 없습니다. 개체들 각각이 고유하지 않으면, 다양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고유함은 다양성의 전제입니다. 그렇게 씨앗의 죽음이후 다양한 생명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양하기만 한 줄 알았던 개체들이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늘에 속한 몸, 다른 하나는 땅에 속한 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의 뚜렷함은 다릅니다. 이렇게 빗대어 설명하는 문단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제 아래 문단에서 이 [씨앗의 죽음-나무의 '일어섬'-다양한 몸-하늘/땅에 속한 몸]의 설명을 부활과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단은 15장 들어와서 바울이 처음으로 '몸'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6:13~20, 12:12~27과 연결지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부끄러운 것으로 심는데, 뚜렷한 것으로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심는데, 숨에 속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본성에 속한 몸이 있으면, 숨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이 본문이 많은 오역을 낳았기 때문에, 아래의 표로 분명하게 정리해봅니다.

썩을 것 심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남

 부끄러운 것 심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남

 약한 것 심기

 강한 것으로 살아남

 본성에 속한 몸 심기

숨에 속한 몸으로 살아남


 왼쪽에 언급된 것들이 '씨앗'입니다. 썩을 것, 부끄러운 것, 약한 것인데, 이것은 본성에 속한 몸이고, 첫 사람 아담이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본성'이고,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인데, 이 모든 것들은 심어야 합니다. 심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죽이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본성에 속한 몸(퓨시키코스* 소마)' 이 개역성경이는 '육의 몸'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흙으로 돌아갈 물질로 이뤄진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코스'는 윤리적, 역동적 삶과 관련된 의미. 구성 요소는 '-노스'가 붙는다.) 만일 우리가 심어서 죽어야 할 것을 '육체'라고 이해하면, 다시 일어서게 될 '숨에 속한 몸'을 육체와 무관한 '영혼'이라 쉬이 이해해버리게 될 것입니다. '육의 몸'이라 할 때 '육'은 '육체'가 아닌 자연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의'는 '~에 의해 결정된'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개역성경의 '육의 몸'을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몸'이라 읽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본성'이라 번역한 '프쉬케'에 대해서 이미 살펴보고 왔습니다. 이 단어는 2장과 7장에 등장하는데,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극심한 기근을 맞았을 때(7장), '너희가 '보통사람(퓨시코스)'처럼 살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16
그러나 보통 사람은 하나님의 숨으로부터 온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숨으로 분별하는 사실이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숨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하지만, 그들 자신은 어느 누구의 분별에도 메이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 분을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의 생각을 가졌습니다.

  퓨시코스의 사람은 프뉴마의 일을 받지 못합니다. 프뉴마로 분별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합니다. 즉 '본성에 속한 몸'이란 '통상적인 일에 의해 결정되는 몸', 현시대 이상의 것을 추구할 수 없는 인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한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위의 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삶이 '썩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이며, '약한 것'입니다. 따라서 심어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본성이 비뚤어지지 않게(죄 짓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본성을 가지고 사는 삶이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심지어 이것은 아담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아담이 '생기'를 받아 창조되었으나, 바울은 70인역을 인용하여, 아담이 '프쉬케의 사람', 즉 본성적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그의 본성은 제대로 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거절했을때, 그의 본성은 하나님을 잃은 본성, 뜻 없는 호흡이 됩니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본성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리는 숨결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숨에 속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본성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숨에 속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이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아담은 프쉬케의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본문에 '살아있는 본성'이라 번역한 말이 개역성경에는 '산 영'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본성에 속한 몸은 개역성경에 '육의 몸'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산 영'의 '영'은 프뉴마가 아니라 프쉬케요, '육의 몸'의 '육'은 '사륵스'가 아니라 역시 또 '프쉬케'입니다. 즉 '영'과 '육' 사이 적절한 번역어를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는 '영'으로 어느 한 쪽에는 '육'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아담은 프쉬케의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즉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그럼 '본성이 나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은 '본받을' 기준을 필요로 하고(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구현된 진리의 기준으로서 자기 자신입니다.), 어떤 기준을 본받느냐에 따라서 본성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류영모 선생의 말대로라면 '바탈'입니다. 간혹 원죄론을 비판하면서 '아담의 죄가 왜 내 죄에요?'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 바울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 존재로 태어나고, 그 본성이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만나지 않으면 타락한 본성이 된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담은 살아있는 본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살리는 숨결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영혼처럼 비물질적 상태가 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숨결에 의해 (죽을 몸을) 새롭게 하는(살리는) 인간'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숨결에 의해 결정된 인간성, 숨결을 따르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출처'를 의미합니다. 즉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을 향합니다. 그렇게 하늘을 땅으로 가져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 보장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님에도, 오랫동안 이렇게 읽혔습니다. 바울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늘로 가려고 하지 않고, 땅에서 사람들을 섬기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지향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위의 본문을 표로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첫 사람 아담

 마지막 아담

 살아있는 본성(산 영)

 생명 주시는 숨결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

 하늘에 속한 그이의 형상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몸을 심으면,

 거룩한 숨결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몸이 살아남


  첫 사람은 살아있는 본성적 존재고, 흙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로마서 연구 2.0>에서는 '아담성'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아담성은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담성을 극복한 최초의 인간으로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 아담입니다. 아담성을 끝장낸 새로운 아담입니다. 그는 이 땅을 본성이 아니라 숨결로 살아갔고, 따라서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마지막 아담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심기'란, 바울이 C에서 말했던 '죽이기'가 됩니다. 본성에 따르는 삶, 통상적인 일에 의해 결정되는 삶을 거절하고, 거룩한 숨결에 의해 결정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본성이 아니라 숨결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 전체, 즉 신실함으로 시작해서 단체 부활에 참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는 것으로 이뤄지는 과정 전체를 하나님 나라, 구원이라 부릅니다.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사람이 '퓨시코스'였습니다. 아담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중간단계, 새창조로 나아가는 과정적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었습니다. 본문에 '살아있는 본성'이라고 번역한 것은 '살아있는 퓨시케'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부어지면, 그 사람은 퓨시케를 뛰어 넘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뛰어넘는 것이 아닙니다. 숨결은 받았지만, 몸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숨결받은 사람은 끼인 사람입니다. 끼인 시대 속에 살아가는 끼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중첩된 시간을 창조하시고, 또 그 안에 본성과 숨결이 충돌하는 사람을 새로이 창조하셨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기꺼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던 최초의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고, 올바른 실천을 하며, 숨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삶을 배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첩된 시대는 새로운 존재의 요람입니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숨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됩니다.

  메시아 예수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살아갔던 새창조의 아담. 그를 가리켜 '하늘에서 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도 '다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본성을 넘어서는 숨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첫 사람은 본성이지만, 둘째 사람은 성령입니다. 흙으로 빚은 사람과 달리, 그는 부활하여 자신의 출처가 하늘임을 밝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옷을 입습니다. 이 옷입는다는 표현은 창세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깨뜨렸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고, 무화과 나무 잎사귀 옷으로 그 자기 자신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동물이 피를 흘려 죽었고, 그의 가죽이 사람들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해결할,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이 부활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 옷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그이의 형상', 흙으로 만들지 않은, 하늘에 속한 완전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완전한 몸을 입게 될지 아닐지가 바로 지금의 신실함의 여부가 결정합니다. 신실함은 최후의 심판에서, 내가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사람임을, 지금 알 수 있게 하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읽었던 바울의 말들이 새로이 보입니다. 씨앗은 '아직 옷 입지 않음'이니, '본성적 인간'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나, 이것을 부활의 몸 외에 다른 것으로 감추려고 하니, 그 본성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본성적 인간이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의 속에는 신실함이 창조되고, 그 삶에는 한 점 향해 달려가는 성실함이 지배하며, 그리고 그의 마지막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6:4b,5, 개인번역
...아버지께서 온통 드러나시어 죽은 사람 가운데서 메시아를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새롭게 된 삶 속에서 걷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이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우리가 '함께 새싹이 돋아난 사람'이라면, 또한 그이의 다시 사심과 같은 모양으로 우리가 그리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A'. 고린도전서 15:50~58
새로운 몸, 죽음에 대한 승리, 찬송과 권면

  가족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뮈스테리온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찰나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도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먼저는 '살과 피'입니다. 이 말은 다시 또 '육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몸과 영혼을 나누는 플라톤식 사고를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통전적으로 인간을 조망합니다. '살과 피'는 우리가 '살몸'이라 배운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성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마태복음에서는 '천국'), 우리가 죽어서 갈 장소가 아니라, 메시아의 죽음으로 현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부활로 오는 시대가 개시되어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뤄지는 이야기 전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두 번째 출애굽~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유산'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로마서 8:15c~18
아빠 아버지! 숨님 또한 우리의 숨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이들이라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메시아와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나타나고자, 그와 함께 고난도 받는 한 말입니다.


  즉 유산은 메시아 예수와 우리가 함께 누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곧 새창조가 완성된 창조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보았던 환상 하나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가 겪은 뮈스테리온 속에 등장하는 어떤 이들은, 살아서 메시아의 재림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 생각했지만, 이후 고린도후서, 빌립보서를 거치면서 그의 생각은 달라집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후대에 나타날 사람들에 대한 뮈스테리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변화됩니다. 그때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린다는 말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데 그 앞을 떡하니 가로 막고 서있던 여리고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산으로 상속받을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데, 그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최후의 대적, 최후의 성벽이 나팔소리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 최후의 대적의 정체를, 바울은 예언서들을 인용하여 밝히 드러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이김을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비뚤어짐이요, 비뚤어짐의 권세는 토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곧게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를 위한 창조적 노동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일함'이 주로 인해 헛되지 않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기 전, 우르르 무너지는 최후의 대적이 바로 죽음입니다. 바울은 호세아 13장과 이사야 25장을 인용합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가 이미 예고되어 있었고,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단 두구절만이 그러한 것이 아닌, 본래부터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부활로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마침내 창조를 이루시어 그 새로운 아담들에게 창조세계를 맡기시는 이야기임이 밝혀집니다.(여리고성 이야기를 통해 마지막 나팔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뚤어짐의 권세는 토라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로마서 연구 2.0> 7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긴 내용을 풀어놓았다간 주객이 전도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이김을 '주시는'이 현재형인 것에 전율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을 벗어난 어디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죽음의 영향력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한 증명으로서 살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프쉬케의 호흡(목숨)으로는 할 수 없으나, 프뉴마의 호흡(얼숨)으로는 살 수 있는 그 이김의 길(도)이 우리 앞에 지금 주어졌습니다. 거룩한 숨결의 구름 기둥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살아있는 성전, 숨결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길에 곧게(똑바로), 굳게(단단히) 서서, 주를 위해 창조적 노동(일)을 해나갑시다. 아빠가 일하시니, 우리도 일합니다. 함께 창조적 과업에 참여하고, 그 날(주의 날)에 완성될 것을 기대합니다. 생각으로만이 아닌, 우리의 모든 삶을 걸어 기대해도 아깝지 않은, 감추인 보물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온 몸으로 했던 일들이, 결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옛적부터 계신 분이 기억하신다면, 그는 말씀만으로도 그 기억을 존재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3
반면 어떤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 주십니다.


  그림을 크게 그리시기 바랍니다. 끼인 존재로서의 나, 끼인 시대로서의 지금의 시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메시아 예수와, 그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창조세계 전체를 지금 새롭게 창조해나가시는 아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헛되게 믿고 따를 수 없는, 그 한 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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